제목 : 세상을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본문 : 요한일서 5장 1절~5절

설교자 : 조 정 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스포츠 경기(육상, 씨름)로 묘사한다(엡 6:12; 딤후 2:5). 종종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이 엄청난 상대 팀과 싸우는 경우, 기대를 별로 하지 않으면서도 점점 지는 모습을 보이면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씨름도 매우 유사하다. 우리 대적은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권세자, 통치자 마귀와 귀신들이고, 그들은 우리 육신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철저히 공략한다. 당신은 이기고 있다고 느끼는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할 만큼 크게 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세상은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성경을 반대하고 거스르는 길로 빠르게 흘러간다. 말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과 돈과 쾌락과 죄를 사랑한다. 그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도인은 종종 마귀나 세상은커녕 개인의 삶이나 가정, 교회에 일어난 죄와 싸우는 데도 힘에 부친다. 전혀 이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계속 넘어지고 퇴보하는 것 같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5절).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다. 어떻게 최후 승리를 확신하는 것일까? 어떤 자가 이기는 자일까?

1. 이기는 자는 주를 믿는 자다(1, 4-5)

“이기는 자”(명: nike)라는 말을 자주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 요한은 부활의 주를 만나 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교회마다 “이기는 자”에게 약속을 주셨다. 

에베소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서머나 교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버가모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두아디라 교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사데 교회: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빌라델비아 교회: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라오디게아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이기는 것이 오롯이 우리에게 달린 일이라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요한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1절). 4절과 5절을 이어서 보라.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1절과 4-5절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자마다)

동사의 시제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언뜻 보면 우리의 믿음이 선행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영적 출생(거듭남)이 오며, 그 결과 승리를 얻는 것처럼 본문이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믿는 자”의 ‘믿다’ 동사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믿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서 ‘나다’ 동사 시제는 완료형이다. 과거 한 시점에 시작되어 계속해서 그 결과가 영향을 미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올바른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신 자,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따라 거듭난 자는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믿고 고백한다. 바로 그런 자가 세상을 이기는 자다.

선행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역시 그렇다. 자기 노력과 열심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곧 하나님이 낳으신 것이다(요 3:8). ‘원하는 자,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롬 9:16; 참고. 요 1:13).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것이다(약 1:18).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본문에서도 요한은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을 말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했다(1, 5절). 예수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모두 다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반드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 스스로 혹은 남이 만든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연합한, 그래서 영원히 사귐을 갖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셔서 반드시 그들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4:4).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고(요 16:33), 바울은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확신했다(롬 16:20).

그리스도인은 싸움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계시록 20장과 21장을 보면 마귀와 그 수하들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고(계 20:10), 사망과 음부, 마귀와 세상을 좇던 자들(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 역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4-1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친밀한 사귐 곧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두라. 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도저히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 힘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을 확신하라(롬 8:37).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고전 15:57). 지는 것처럼 느껴져도 절대 지지하는 팀을 바꾸지 말라. 결국엔 하나님 편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풍성한 은혜로 당신을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당신이 끝까지 믿고 따를 분이다.

2. 이기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1-3)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참된 믿음, 산 믿음은 그에 따른 ‘행함’을 맺는다(약 2:26).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께 믿음을 둔 자가 이기는 자이고, 그 믿음이 참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난다. 성경은 그 모든 행함을 요약하여 ‘사랑’이라 부른다.

1-3절까지 사랑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해 나타나는데, 먼저 성도를 향한 사랑이다(수평).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3절에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주목한다(수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절). 2절에선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서로 별개의 행함이 아니라 단단히 결합된 행함이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여기서도 논리적인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앞서 우리의 믿음(신앙)이 새로운 출생을 가져오고 그 결과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시고 그 결과 하나님께 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게 하신다고 배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이 승리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참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열매다.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사랑이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사랑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사랑은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맺고 있는 영생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자라는 걸 계속해서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신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 곧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벧전 1:22). 영적으로 태어난 자는 영적인 형제, 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된다(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요한은 그래서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다(3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주시기 때문이다(빌 4:13).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무겁지 않은 명령인가? 

실제로 느끼기엔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몇 가지 면에서 확실히 그렇다. 첫째, 유대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 규칙과 전통은 사람을 옭아매고 결국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지옥 자식이 되게 하지만(마 23:15),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형제자매 사랑은 이미 온전히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갈 5:1). 그래서 훨씬 가볍다.

둘째, 우리가 성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마 11:30).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성도를 기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사랑과 순종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한다’ 말하면서 불순종하는 자를 악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고(요 14: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본문에서 요한도 아멘으로 화답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3절).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2절).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래서 사랑하기 쉬운 형제자매, 어려운 형제자매 모두를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 4:8).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뜨겁게 사랑하실 것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요 14:23). 무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영생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모든 자가 불못에 던져질 때,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자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적용

앞에서 다룬 믿음 그리고 사랑이 우리가 승리한다는 소망을 보게 한다. 그러면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시작하신 사랑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기는 자답게 살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이기는 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절제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향해 공격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규모 없고 무절제한 삶, 게으른 삶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한 자도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남들 다 알고 남들 다 하는 일을 과감히 버리고 관심 두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그러는데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절제해야겠는가? 모든 뉴스, TV 프로그램, 유튜브, 화제의 인물, 정치 경제적 이슈, 돈 많이 쉽게 버는 법, 예뻐지고 잘생겨지는 법 등을 알 필요는 없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는 일, 그래서 하나님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라.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라.

기도하라. J. C. 라일은 기도를 가리켜 믿음의 호흡이라고 말했다. 우리 믿음이 숨을 쉬려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신뢰하며 아뢰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이 점점 연약해지고 거의 없는 것처럼 희미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 믿음으로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며 산다면 우리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평생 패배자처럼 힘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런 설교는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거룩을 불러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이기는 자로 살려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원에 이르는 열매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면에서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절제와 더 많은 기도를 요구한다. 더 많이 절제하여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사랑을 기도와 절제로 더욱더 굳건하게 만들어 승리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적은 무리, 힘없는 패배자처럼 여겨질지라도, 결국엔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들과 딸로 승리의 보좌에 함께 앉아 다스리며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되길, 이기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