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목마른 사람(들) 3

본문: 요한복음 4장 1-42절

설교자: 최종혁

첫 시간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본문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서 읽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요한은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믿고 영생을 얻었기에 ‘수가 부흥’이라고 지칭할만한 사건이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42절)라고 고백했기에 수가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구원이 단지 그들에게만 해당되었던 은혜가 아니었다는 것도 요한은 분명히 기록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끊이지 않는 영적 목마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는 구주시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예배하는 우상 숭배자들을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시는 구주시다. 아담 이후에 태어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적 목마름 가운데 그들을 채울 수 없는 헛된 것만 추구하고 있다. 그것을 섬기고 있다. 그들 모두에게 예수님이라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라. 이런 상황, 즉 어떤 사람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있고 누군가가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누가 누구를 찾는 것이 맞는가?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쪽에서 도울 수 있는 쪽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도 무언가를 댓가로 지불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당장에 내가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그것을 주겠다고 하고, 만약에 없으면 나중에 어떻게 하겠다는 서약같은 것을 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고 그런 종교를 만들어 냈다.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지불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어떤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결핍)이 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려(채우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조차도 얻지 못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마침내 그것을 얻어 내지만 그것이 참된 구원이 아니었음을 알고 ‘헛되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인류의 긴 역사가 증명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바람을 잡으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노력이 헛된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문제가 잘못되었고 따라서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도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구원에 이르는 방식도 잘못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밖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환경이 문제이고 시스템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무엇을 가지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바꾸려고 하고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문제를 여전히 하나님을 배제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온갖 것을 추구하지만 결코 하나님은 추구하지 않는다. 온갖 것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정작 참된 구원을 주실 구원자 하나님께는 나아가지 않는다. 끊임없는 갈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는 않는다.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이 갈증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어떤 일부 사람들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의 비극이다.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으면서 여전히 교만해서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우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 상태라면 우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이 맞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말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다. 23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사람들 중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이 있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이고, 오늘 본문에서 또 다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일을 먼저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 하신다. 그들의 말과 삶을 통해 하신다. 그것이 바로 전도이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그런 전도자로서의 본을 보여주셨고, 오늘 살펴볼 27-42절에 기록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이후 이어진 수가 동네에서 발생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전도에 대한 추가적인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전도자 예수님

이전까지의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전도자로서 어떤 본을 보이셨는지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것과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찾아 가심(1-9절)

첫째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먼저 찾아가셨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셨고,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내셨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에는 사회, 문화적인 장벽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셨다. 복음에는 그런 장벽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덕적인 장벽도 예수님은 신경쓰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이든 아니든, 복음이 필요한 사람인 것에는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생애 내내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장벽을 뛰어 넘어 먼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셨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실 정도였다(눅 7:34).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자들에게만 그렇게 하셨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이런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니고데모의 경우는 이미 영적인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는 전혀 무관심한 상태였다.

실제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서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자녀들이 그런 경우일 수 있다. 구원 받고 싶어 찾아오는 것이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럴 때는 그냥 교회 데려오면 알아서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어쩌면 그 사람에게는 그 때가 유일한 기회이고 내가 유일한 전도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지나면 세상의 다른 일에 관심을 빼앗기고 더 이상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은사에 관계없이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분명하게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다. 무관심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먼저 다가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지상대명령에서도 “가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이 이웃을 만날 때마다 구원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상대가 듣든 안듣든 “당신은 죄인입니다. 심판 받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에게 무관심한 상태에 있으면 안된다는 의미다. 그냥 옆집에 사는 누구, 같이 일하는 누구, 가끔 만나는 누구 정도로 사람들을 보면 안되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목마른 사람들이고 헛된 우상에 속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시고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먼저 말씀하셨던 것도 다가서기 위한 노력이었다. 특히 이렇게 도움을 먼저 요청하면, 상대도 나에게 도움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된다. 먼저 도움을 주는 것도 좋지만, 이런 작은 도움을 상대가 먼저 베풀 수 있게 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인 것이다.

예수님에게 거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든 먼저 다가가셨다. 우리도 각자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이런 노력들을 해야한다. 먼저 다가가기위한 노력들을 해야 한다. 작게는 인사를 먼저 건네는 것이 그런 노력이 될 수 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그런 노력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있는 벽을 우리가 먼저 넘어야 하고 허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 나이와 같은 장벽은 그래도 많이 무너진 사회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관계에 있어 개인주의라는 벽이 높아진 사회를 살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를 살고 있다. 당연히 우리가 존중해야 할 개인의 영역이 있지만, 우리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그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면, 그들의 삶이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하고 우리가 먼저 그 벽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주 외향적인 분이셔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일까?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오히려 내향적인 성향이 좀 더 있었을 확률이 높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과도 떨어져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길 원하셨던 모습들이 (물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향에 관계없이 먼저 다가선다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그렇게 하셨고, 우리도 그 본을 따라야 한다.

이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예수님의 전도에 대한 또 다른 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을 분명하게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을 분명하게 선포함(10-15절)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일상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영적인 대화로 바꾸셨다. 벽을 넘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세상의 관점에서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어필하지 않으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멋진 유대 남자로서 자신을 나타내고 그렇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외 당한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어서 약간의 위로와 안도감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 영혼의 갈급함을 끝낼 영원한 생수였고, 예수님은 그것을 주기 위해 먼저 다가가셨던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에게 먼저 나가가서 좋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직장 동료가 되고,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도 기억해야 한다. 단지 한명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내가 좋은 평판을 얻고 칭찬을 받는 것도 목적이 아니다. 혹은 그 사람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말로 그들을 사랑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내가 줄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이, 예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그것을 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여기서 주저하거나 불분명한 소리를 내는 경우들이 많다. 먼저 다가가는 것은 한다.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집을 지어주기도 한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자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고 있는 아프리카 등지의 사람들을 찾아가 무료 봉사를 하기도 한다. 정말로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우리 교회도 이런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거기서 그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선물을 얘기는 하는데, 참된 구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모호하게만 말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니 예수님을 믿으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식으로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분명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일”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사업이 잘되는 것, 누군가는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 누군가는 병이 낫는 것, 누군가는 돈을 많이 버는 것, 누군가는 복권에 당첨돼서 놀고 먹는 것, 누군가는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 누군가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세속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교회에 나오면 뭔가 위로 받는 것 같고 마음이 평안하고 한 상태를 구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구원이 그런거라면 굳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누가 나를 사랑하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보라.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3-14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주려고 하시는 것은 다시 목마르게 되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복음 선포도 그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는 자들이 혹시라도 부담스러워하거나 마음을 돌이킬 수도 있으니, 그런 애기들은 굳이 안하는게 더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 믿어도 아플 수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대학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런 것들이 다 잘되게 하실 수도 있으니, 좋게 좋게 얘기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교회를 나오든 일단 나오는게 중요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구원도 받게 되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교회에 나오다가 구원받는 일도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속한 복을 주기도 하신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전해야할 복음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전도의 모습은 아니다. 마치 적당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끼 상품을 던져두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장사꾼처럼 그런 복음을 우리가 전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구원을 기대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구원의 참된 모습인 것처럼 생각하게 해서는 안된다.

지난 시간에도 짧게 언급했었지만, 우리가 전해야할 것은 또 다른 터진 웅덩이가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이다. 이 세상에 속한 무엇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다. 세상의 다른 무엇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구원을 받으면 우리가 이 땅에서 더 잘 살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간 것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다. 우리가 썩을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다. 영원히 멸망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다.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누릴 은혜들이 많다. 하지만 그 은혜는 어떤 환난도 없는 은혜가 아니라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은혜다. 푸른 풀밭만 있는 삶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시면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고후 12:9).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육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들을 때는 전혀 복음같이 들리지 않는 그것이 사실은 복음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은 누군가에게는 미련하고 누군가에게는 거치는 것이 된다. 자기 생각과 기대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으면 집에 우환도 없고 애들도 잘 되고 남편도 잘 되고 죽어서 천국도 가고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런 복음을 전하면 안된다. 모호하게, 오해하게 복음을 전하면 안된다.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문제의 원인을 확실히 알게 해야 한다.

죄를 직면하게 함(16-18절)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이 짧은 말로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하셨다. 여인은 숨기고 싶어했던 그 죄를 예수님은 드러내셨다. 창피를 주고 비방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죄를 직면하게 하셔서 그녀의 문제의 핵심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의도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답하는 여인에게 진실을 숨긴다고 나무라지 않으셨다. 다만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양심에 호소하셨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그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왜 그런 삶을 살아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남편이 아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죄가 문제였다.

우리는 죄를 부정하고 싶어하고 죄를 숨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사탄은 부추긴다. 이대로 괜찮다고 한다. 별 문제 없다고 한다.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죄인이 듣고 싶은 말은 그런 말이다. 그래서 그런 말이 위안이 되기도 하고 평안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이 하는 것처럼 우리의 문제에 대해 눈을 감게 하셔서 그냥 괜찮은 것 같은 느낌만 갖게 하시지 않으신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냥 “괜찮아. 다 잘 될거야. 넌 잘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런 싸구려 위로와 평안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참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다. 하나님께 나아오고 구하게 하신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어렵지만 이 역시 우리가 따라야할 전도자 예수님의 본이다. 구원이 선명해 지려면 어디로부터의 구원인지가 선명해야 한다. 구원은 우리의 죄, 그리고 그 결과인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이 땅에 오셨다(히 2:14). 따라서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고 죽음의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불필요한 구원자가 된다. 내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지 않다면 굳이 수영을 잘하는 구조대가 필요 없는 것과 같다. 내가 불이 난 아파트에 갇혀있지 않다면 소방대원이 필요 없다. 내가 목마르지 않으면 물이 필요 없다. 내가 죄인이 아니고 내가 영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필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거짓에 속으면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죄를 대면하셨다. 스스로 죄를 직면하게 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나는 의인인데 너는 죄인이야”라는 식으로 말해서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도 같은 죄인으로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죄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의 거울을 그 앞에 비춰서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성령님께서 죄를 책망하시는 역사가 영혼 안에서 일어나기를 구해야 한다.

죄가 없다면 심판도 없고,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심판 받지도 않을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심판의 자리에 서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사랑과 지혜로 죄를 드러낼 수 있기를 구하며, 어렵더라도 이 일을 해야한다. 우리가 모두 죄인이어서 어리석다는 것을, 교만하다는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도와야 한다. 그래서 구원자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전도자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되시는 메시야를  사마리아 여인에게 소개하셨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할 일도 바로 이것이다.

메시야를 소개함(19-26절)

예수님은 두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는 전지하심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고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증명했던 것이 예수님의 전지하심, 즉 능력의 나타남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의 간증을 보면 바로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확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적을 통해 그 말씀에 신뢰성을 더하셨고, 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적과 기사가 그들의 말에 신뢰성을 더했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 본을 따를 수 있을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능력이 없고,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이적과 기사도 그 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실 수 있고 또 하기도 하시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 우린 말로만 메시야를 소개할 수 밖에 없을까?

때로는 말로만 메시야를 소개해야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말에 아무 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선포한다면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전도의 모습을 봐도, 언제나 이적과 기사가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지만, 올바른 말씀 해석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바르게 선포되었고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졌다. 우리는 말씀 자체에도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별개로 오늘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이적이 있다. 바로 우리의 삶이다. 베드로는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명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비슷한 맥락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 중에서 선한 삶을 살아야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삶, 즉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삶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도 되지만, 동시에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변화가 우리에게서 보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외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뛰어가서 했던 말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가 전부였다(요 4:29). 물론 다른 말도 더 했겠지만, 핵심은 이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녀가 무슨 대단한 설교를 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특별한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해서 사람들이 그 말을 믿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을 피해 다녔던 사람이 너무나 당당하게 그들을 먼저 찾아와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동이를 가지고 조용히 자기 집으로 가야했을 사람이 물동이는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호기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즉, 우리 눈에는 어쩌면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복음에 합당한 우리의 변화된 삶은 우리가 전하는 말에 힘을 싣는 것이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야가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그렇게 증명되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말도 힘을 잃는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하는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보통의 삶이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 삶이 우리의 선포를 더욱 힘 있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무력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따라야할 전도자 예수님의 본은 그분의 삶과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닮아갈 수는 있다. 그 삶이 우리의 말보다 먼저 잃어버린 자들에게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말은 그 삶의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변화된 삶의 이유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구원자 예수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전도자이신 예수님을 또한 주목하고 그분의 본을 따르기 바란다. 목마른 영혼을 먼저 찾아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알게 해야 한다. 지금 죄의 문제를 직면하게 하고 그 문제의 유일한 해결이 되시는,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말로 그렇게 해야한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특권이자 책임임을 다음 시간에 더 배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