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목마른 사람(들) 2

본문: 요한복음 3장 1-21절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찾아가 만나셔서 나누신 대화의 앞부분을 살펴봤다. 사마리아인이면서 여자였고, 또한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 여인은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절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3장의 니고데모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그런 것에 달려 있지 않음을 우리는 이 두 사건을 나란히 보면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먼저 찾아왔든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가셨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두 사람에게 달랐을 뿐이지, 그것이 두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모두 거듭나야 하는 죄인들이었고, 생수가 필요한 목마른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필요했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셨고 그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실제 구원은 다르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행위’를 강조한다. 니고데모도 종교적인 사람으로서 그런 행위에만 관심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심으로서 모든 행위가 구원 받는데 있어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했던 구원은 아마도 일차적으로는 더 나은 이 땅에서의 삶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삶이 괴로웠기 때문에 메시야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지금 생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구하라고 하셨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운명만 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참된 삶의 시작이며 그것을 구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여러모로 많이 가진 사람이든 사마리아 여인처럼 결핍이 많은 사람이든,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목마름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무엇으로든 채우려고 한다. 예레미야 2:13에서 말하는 “터진 웅덩이들”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적어서 문제라고 생각하고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것 저것 사람들이 ‘만족’을 위해서라며 추구하는 것들은 사실 하나님의 빈 자리를 어떻게든 메우려는 헛된 노력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좋아서’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우상들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사람은 예배자이다. 단지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참된 것을 참되게 예배한다면 참된 예배자인 것이고, 거짓 것을 거짓되게 예배한다면 거짓 예배자, 우상 숭배자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상 숭배자다.

따라서 구원은 우상 숭배자가 참된 예배자가 되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예수님과 구원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사마리아 여인은 오늘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이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한다. 물론 앞서 말한 구원과 예배의 관계를 염두에 둔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참된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녀도 참된 예배자가 되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자신의 죄악된 삶을 먼저 직면해야 했다. 우상 숭배자로서의 삶이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5절의 말을 끝으로 어쩌면 여자는 우물을 떠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우물에서 유대인 남자와 길게 대화를 할 이유도 없었고, 예수님은 뭔가 알쏭달쏭한 얘기를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15절의 말은 비꼬는 말이었든 아니면 체념의 말이었든 대화를 끝내려는 말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물이 없으니 지금 내가 여기 물을 길으러 온 것이 아니냐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은 할 얘기가 남아 있으셨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 여자는 마음으로 흠칫 놀랐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피해서 정오의 뜨거운 시간을 물을 길으러 왔던 이유가 바로 남편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는 순간 많은 생각이 오고갔을 것이다. ‘이 사람이 왜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할까? 혹시 나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이 그냥 한 말일 뿐인걸까?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여러 생각 끝에 그녀가 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절)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여자의 말에 “아, 죄송합니다. 당연히 결혼하신 줄 알았어요.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와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

예수님은 여자의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여자가 진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도 분명히 드러내셨다. 진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여자 자신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 죄의 문제를 이렇게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죄 때문에 여자를 비난하지는 않으셨다. 그래도 대놓고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녀의 정직함을 인정해 주셨다. 하지만 동시에 죄를 분명히 드러내기도 하셨다. 태도에서도 그렇고 목적에서도 그렇고 예수님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여인이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빛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고 계신 것이다.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 다섯명의 남편과 모두 사별을 했을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다. 현재 남편이 아닌 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간음이 원인이 되어서 반복적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것의 그녀의 삶의 패턴이었다. 그녀의 삶을 주관하는 반복되는 음란의 죄가 있었던 것이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답한 여자의 말은 전형적인 죄인의 말이다.

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여자는 죄를 감추고 싶어 했다. 어느 정도의 죄책감은 있었겠지만 죄를 해결하기보다는 감추고 싶어 했다. 그렇게 덮어두고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그런 것이라면 굳이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진리를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굳이 죄를 드러내서 여자를 불편하게 하고 이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저 그 여자의 고달픈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건내셨을 것이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셨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이 여자가 나름 힘을 얻고 삶을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다. 그것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다. 그것 역시 또 다른 터진 웅덩이가 될 뿐이다. 예수님은 그런 웅덩이를 주시려고 이 여자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을 주시려고 이 여자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어둠 가운데 두고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드러내어 그녀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셔야 했다.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을 통해 그녀의 죄를 직면하셨고 또한 여자가 말하지 않은 사실을 먼저 말하심으로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 바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메시야이신 자신을 그녀에게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 여자는 다시 한번 놀랐을 것이다. 분명 처음 본 사람인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여러 생각이 오고 갔을 것이다.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있었고 반대로 자신의 죄 문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지적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의외의 말을 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19-20절)

갑자기 예수님을 ‘선지자’라면서 예배의 장소에 대한 질문을 한다. 마치 여자가 떠나고 이 장면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이 와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다.

먼저 예수님에 대한 여자의 관점이 바뀐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는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절)라고 물었었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지하고 있다.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지금 보여주신 모습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여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사람 중에 괜찮은 사람, 더 나은 사람,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은 아닌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귀신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사실의 인정이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지식과 감정도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무관심이나 배타적인 것보다는 분명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한 사마리아 여자는 왜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물어 봤을까? 정말 단순히 그 문제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오래된 신학적 논쟁이었기 때문에 궁금해서 그랬을 수 있다.

12: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이 명령에 따라서 그들은 예배의 장소를 찾았는데, 유대인들은 다윗이 성전을 지을 장소로 선정하고 솔로몬이 그 장소에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 임재를 나타내셨던 ‘예루살렘’이 바로 예배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신명기 12:5에서 “택하신 곳”을 개정개역 성경은 과거형으로 번역했는데, 다른 번역본을 보면 “택하실 곳”이라는 미래형으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본들을 비교해보면 본래는 미래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따라서 이 부분을 과거형인 “택하신 곳”으로 바꾸어서 예루살렘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택하신 곳이 있다고 주장했고 그 장소를 모세오경에서 찾았다. 그렇게 그들이 찾은 장소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 복을 선포했었던 ‘그리심 산’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논쟁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상호배타적인 관계 때문에 끝이 날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도 없었고 설득되어서도 안됐기 때문이다. 다만 이 여자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논쟁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었고, 그래서 이 여자가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예수님께 물어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했다면 오히려 앞에서 하셨던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자의 말이 조금 생략되었을 수도 있다. 즉, 여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리고 싶은데 대체 어디서 드리는 것이 맞느냐고 물어본 것일 수도 있다.

이 상황들이 다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마리아 여자가 불편한 대화를 피하고 싶어서 널리 알려진 논쟁을 언급했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지극히 사적이고 불편한 이야기를 낯선 사람과 하는 것보다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삶을 다루는 이야기보다 이론적인 이야기가 더 쉬운 법이다.

실제로 전도를 하다보면 이런 상황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죄에 대한 얘기 혹은 모든 영적인 얘기들에 반박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그런 얘기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서 자주 화제를 바꾼다. 지옥에 대한 얘기를 하면 영화 <신과 함께>와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식이다. 구원에 대한 얘기를 하면 자기가 요즘 얼마나 힘든지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이 역시 요한복음 3:19-20에서 묘사한 죄인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든 빛으로 나아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노련하고 지혜로운 전도자시다. 예수님은 여자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이제는 생수가 아닌 예배의 관점에서 말씀하신다. 평생을 헛된 물웅덩이를 통해 갈급함을 채우려 했던 여자에게 참된 음료, 생수가 필요했다. 평생을 헛된 예배로 살아온 여자에게 참된 예배가 필요했다. 이제 예수님은 그녀를 참된 예배로 초대하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21절)

예수님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여자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을 호소하셨다. 예수님께서 진실을 말씀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이것이다.

21 …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1-24절)

먼저 여자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 예수님은 21절에서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심 산의 예배든 예루살렘의 예배든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마인에 의해 두 곳의 예배가 모두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그렇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서 의도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되기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누구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참된 예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예배가 장소의 문제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도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책망하셨던 것처럼 타락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예배해야하는지 알고는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권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구원을 베푸시기에 그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았고 참된 예배에 대해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예배에는 마음이 없는 형식만이 남아 있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셨다. 차라리 누가 성전 문을 닫아서 아무도 예배하지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다른 면에서 잘못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을지 모른다. 열심은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거절했고 따라서 그들은 알지 못하면서 열심히만 예배하는, 다른 우상 숭배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예배를 책망하셨듯,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를 책망하셨다.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리로 인해 불편해 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다.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하는 것보다 진실을 알게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예배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23-24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 참된 예배자가 어떠한지를 말씀하신다.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진심만 있다고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만 있다고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영”은 성령보다는 사람의 영, 사람의 진심, 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렇게 참되게 예배하는 영은 요한복음 3장에서 봤던 것처럼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영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할 수는 없다. 결국 참된 예배는 거듭남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로 예배한다. 그것이 참된 예배다.

그 이유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영이신데 장소와 같이 눈으로 보이는 것이 예배에 있어 본질적인 것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주신 진리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새생명을 주신 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참된 예배에는 참된 마음과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둘은 따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진심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참된 예배고,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들을 찾으셔서 구원하셔서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그 일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셨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다시 한번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직면해야할 때가 찾아왔다. 예수님은 그동안 그녀가 드려왔던 예배가 무지 가운데 드렸던 헛된 예배이며 그렇기에 영과 진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런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이 시점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구해야 했다. “저는 그런 예배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구해야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여인은 한걸음 물러선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절)

이 말은 분명 22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반박일 것이다. 여기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표현인 “메시야”를 말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아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그 선지자를 ‘타헵’이라고 지칭했다. 여자는 유대인인 예수님을 위해 일부러 메시야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시야의 역할에 대해서는 사마리아인의 기대를 그대로 표현했다. 유대인에게 메시야는 국가적 구원자였지만, 사마리아인에게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녀는 메시야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알지 못할 수 있지만, 메시야가 오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자신들도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알고 예배하게 될 것이라면서, 또 다시 자기 자신을 대면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일반화하고 이론화하여 말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절)

메시야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다. 계속해서 어둠 가운데 숨으려고 하던 죄인에게 밝히 빛을 비추신 것이다. 아마 이 순간 여자는 지금까지의 이해하기 힘들었던 상황과 말이 퍼즐처럼 맞아들어가며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고 물을 달라고 했는지가 이해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그녀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생수를 구하라고 했는지, 왜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하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지가 이해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야곱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셨다. 육신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우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을 끝낼 수 있는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셨고, 그녀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야기하지도 않은 남편과 관련된 일을 알고 계셨는지도 이해가 됐을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께서 장소에 관계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는지도 이해가 됐을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살 길을 여실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된 메시야가 찾아와서 말한 것이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물 좀 달라 하는 이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구하는 것 뿐이다.

여인은 구했을까? 그래서 생수를 얻었을까? 참된 예배자가 되었을까?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27절)

이 중요한 순간에 불청객(?)이 들이 닥쳤다. 바로 제자들이다. 제자들로 인해서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는 멈췄다. 하지만 다행히 요한은 여자에게 일어난 이후의 일을 기록했다.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28-30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절)

여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삶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요한은 특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순간 그녀의 온 관심이 그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모습일 것이다.

그녀는 물동이에 육신의 갈증을 채울 물을 길어 집으로 갈 생각으로 우물로 왔었지만, 그 자신의 영혼을 갈증을 끝내고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위해 서둘러 동네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 진다면, 감독은 아마 마지막에 남겨진 이 물동이를 중심으로 줌 아웃을 하며 영화를 마무리할 것이다. 목마른 자가 이제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음을 남겨진 물동이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그 삶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고 또한 어느 정도의 성취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가. 정말 지금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은가.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는가.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그것으로 괜찮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육신의 갈증을,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하신다. 당신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 진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나의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 세상에서 먹고 사는게 중요하고 그래서 그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일로 바쁘다고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진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늦는다.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공허함이 있다면, 세상에서 무언가를 더 가지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참된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오라.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나의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은 육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오직 영혼의 목자이며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채우신다.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이미 예수님을 만났다면 오늘 본문에서 꼭 한가지를 기억하기 바란다. 당신은 생수를 가진 자고 하나님께서 찾으신 예배자다.

그러니 목 마른 자처럼 살지 말라. 여전히 목 마른 사람처럼 세상의 웅덩이를 기웃거리지 말라.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누구도 예수님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상의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영원한 것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할 뿐, 그것에 매여있지 말라.

또한, 더 이상 이전의 헛된 우상을 섬길 때처럼 살지 말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예배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는 진심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마음만 있는 예배는 그 순간에는 열광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공허하다. 진리가 없이 마음만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그 시간에는 눈물과 감동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예배가 삶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점에 있다. 최악의 상태에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고 거기서 어떻게든 뭔가를 얻어가지만, 예배의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 반대로 지식만 있는 예배도 문제다. 지식만 있는 예배는 쉽게 남에 대한 정죄와 판단으로 이어진다. 나만 옳다는 교만에 빠진다. 그러면서 예배는 형식만 강조된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예배가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자비도 없었고 관용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예배만 드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삶의 모습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배자로 다시 세우신 것은 이런 예배자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우리의 온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 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예배자의 삶이고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신 자의 삶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와서 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참된 예배자가 참된 증인이 될 수 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인으로서의 삶, 전도에 대해서 말씀을 더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