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리이다

본문: 시편 101편

설교자: 최종혁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자한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 뭐든지 받아주고 항상 위로와 격려를 건내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부담되는 말도 하지 않으신다. 그저 “그래도 이런 것도 있으니 이렇게 해보는게 어떻겠니” 정도의 말을 건낼 뿐이다. 그조차도 “느려도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라는 말을 더해서 최대한 부담을 줄이려고 한다.

하지만 복음서를 통해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렇지만은 않다. 예수님은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시고, 연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어린아이를 사랑하셨지만, 제자들에 삶에 대해서 나약하고 애매하고 미지근한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으셨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너희도 온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노력해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온전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의 뉘앙스를 좀 약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 사랑의 예수님”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셨을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하라’는 말은 성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기준으로 하나님을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이 성숙하려면 결국 온전해져야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말씀의 앞선 말씀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사랑할 만한 사람이든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사랑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모두 내리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기준인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는데 있어 어떤 예외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하면 좋겠지만 너희가 힘드니 이 정도만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것은 율법의 행위(선한 행위)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한 행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다. 구원이 생명을 얻는 것이라면 선한 행위는 그 삶이기 때문이다. 구원이 뿌리라면 행위가 열매다. 구원이 동기라면 행위가 결과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이 설교의 끝에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도, 이 관계에 대해서 애매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열매를 맺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넌 나의 자녀야’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완전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이 땅을 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차피 그러니까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정도 죄는 있어야 인간미가 있는거지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완벽주의자여서가 아니다. 두 마음의 아니라 하나의 마음, 즉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앞서 읽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완전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은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어떤 것은 작은 것이니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어떤 것은 지키기 너무 힘드니 이 정도만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표현을 따르면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사람이다(마 23:24). 그 기준조차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준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은 지나치게 강조하고 내적인 것은 외면했다. 이것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의 문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들 안에 두 마음이 있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의 본심이 잘못된 것을 향해 있었다. 그들의 본심은 하나님을 향해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부의 남은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까지도 취했던 것이다. 이들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범했던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사랑해서 죄를 범했다.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나 혹은 부자 청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전하진 않지만, 나름, 제법, 어느정도, 비교적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마음의 문제다. 그것을 괜찮다고 생각하는 반쪽짜리 마음이 문제다. 그런 마음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인다. 예수님을 온유하고 사랑이신 분으로만 생각하려는 것은 정말로 그런 예수님의 성품을 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내가 죄를 즐기고 싶어서다. 내 죄를 가볍게 만들고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사랑하는 죄를 지을 구실을 찾는 것 뿐이다. 나의 연약함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연약함을 이겨야겠다는데로 생각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데로 생각이 흐른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셨고, 우리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

오늘 시편의 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 행하리이다.” 교만하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완전할 수 있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다윗이 말하는 ‘완전한 마음’은 전혀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죄를 당연한 것처럼, 괜찮은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완벽한 삶을 살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닮은 완벽한 삶을 추구하고 싶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때로 시편에서 비슷한 표현이 다른 대적들이 지적하는 어떤 죄에 대해서 자신의 결백함을 나타날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마음 속에 갈등도 있고 싸움도 있지만, 그래서 실제 삶에서는 승리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하지만, 그 마음의 근원, 본심은 하나님을 향해있는 것, 그것이 다윗이 말하는 완전한 마음이다. 그리고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그런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기를 결심했는지를 기록했다.

일차적으로 이 시편은 다윗 자신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다윗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 가운데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었던 왕이었다. 그래서 이 시편에서도 처음에 “인자와 정의”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와 같이 “인자와 정의”로 설명할 수 있는 통치를 이 땅 가운데 실현하고자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마지막 8절에서도 그 나라 안에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악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이런 통치를 바라고 목적으로 삼아야 했다. 아마 이런 측면에서 시편 101편이 93편부터 100편까지 이어졌던 여호와의 통치에 대한 시편 뒤에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땅의 왕들은 여호와의 통치를 본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편이 특정한 통치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이 소유가 된 백성”이기에 삶의 기준을 낮출 이유가 없다. 구약에는 왕, 선지자, 제사장과 같이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 하향 평준화가 아니라 상향 평준화가 되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이 시편은 ‘통치’ 자체보다는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기 원하는 다윗의 결심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 꼭 왕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의 결심이 우리 모두의 결심이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다윗을 통해 나 자신을 점검해 보고 또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시편은 내용적으로 보면 1절은 서론적 찬양이고 8절은 결론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구절이 왕으로서의 다윗과 좀 더 관계되어 있다. 2-7절은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기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특히 가까이할 것과 멀리할 것이 대조되어서 기록되어 있다. 2-4절은 무엇을 주목할 것인지,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에 관련된 내용이고, 5-7절은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 그 환경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에 관련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론적 찬양(1절)

101:1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시편의 일반적인 시작과 유사하지만, 뒤의 내용을 보면 찬양의 이유와 같은 것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다윗은 찬양시가 아닌 자신의 결심을 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말하면서 특히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한다. 많은 성경 번역이 “인자와 정의” 앞에 “주의”를 덧붙였다. 맥락 상 그냥 인자와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어에는 그냥 인자와 정의라고만 되어 있다.

인자와 정의를 하나님과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는 의미로 봐야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확장된 의미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는 것 이상으로, 내가 그 하나님을 닮은 인자와 정의를 행하겠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인자와 정의가 아니라 자신이 행할 인자와 정의에 대해서 말한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이런 성품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할 때, 같은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 크게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으로 나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반대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한다. 공유적인 속성은 공유하지 않으려고 하고 비공유적 속성은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절대적인 주권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알고 더 잘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 자비, 공의와 같은 속성은 마치 하나님에게만 속한 속성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구나, 나에게 그렇게 해주셨구나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 부분은 잊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도 그럴 때가 많다. 당연히 하나님의 그런 속성을 찬양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에 대해서 노래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입술의 감사와 찬양 뿐 아니라, 그런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의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지를 말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윗은 가까운 곳에서 먼저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봤을 때 마음이 먼저고, 나라를 봤을 땐 자신이 속한 집이 먼저다.

안에서(2-4절)

101:2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길로 행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 길을 주목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하겠다”는 표현은 지혜 문학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 지혜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삶의 지혜는 다른 곳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길에서 온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조금은 갑작스러운 말을 여기에 추가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언약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었든지 아니든지, 다윗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그래야 완전한 길을 알 수 있고 또 그 길로 행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2절 끝에 말하는 것처럼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겉보기로만 괜찮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나누어진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하나의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온전한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멀리할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한다.

101:3–4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4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눈 앞에 두지 않을 것, 미워할 것, 붙들지 않을 것, 떠나갈 것, 알지 못할 것이라는 다양한 표현을 다윗은 사용했다. 이것은 의도가 분명한 행동들이다. 그냥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다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지적으로 그렇게 되게 만들겠다는 말인 것이다.

비천한 것은 가치없는 것을 말한다. 무익한 것을 말한다. 그런 것이 눈 앞에 있으면 그 자체는 악이 아니고 죄가 아니더라도 유혹이 될 수 있다. 다윗은 그런 것들은 눈 앞에 두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한다. 후에 그가 정확히 여기서 실패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배교자는 이 맥락에서는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드러낸다. 왕궁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람일 것이다. 다윗은 그것을 붙들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그냥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끝으로 4절에서는 사악한 마음이 언급된다. 이는 이어지는 악한 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한 마음이 아니라 굽어 있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을 아니라고하는 마음이다. 다윗은 그런 것들은 알지도 않겠다고 확실한 선을 긋는다.

다윗은 완전한 길에 주목해서 이런 것들에서 멀어지고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앞서 말한 그런 가치없는 것을 눈 앞에서 치우고 있는가, 아니면 눈 앞에 가져오고 있는가. 내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인터넷 사용 기록을 한 번 보라.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OTT의 시청 기록을 한 번 보라. 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보라. 내가 보는 뉴스 기사가 무엇인지, 책은 무엇인지, 듣는 음악은 무엇인지 한 번 점검해보라. 그것들이 내가 지금 내 눈 앞에 가져오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인가, 가치 없는 것인가. 나를 영적으로 더 살찌게 하는 것들인가, 아니면 빈곤하게 만드는 것들인가.

나는 입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삶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의 행위를 미워하는가, 아니면 동경하는가.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고, 천국이 없으면 큰 일 난다고 노래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더 큰 집을 원하고 천국이 없어도 별 일 없을 듯이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그런 성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삶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삶인지, 아니면 성경이 경고하는 배교자의 삶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것이 틀리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이고, 내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4절이 말하는 ‘사악한 마음’, ‘굽은 마음’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항상 “네”가 아니라 “왜”가 먼저 나온다면, 그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떠나 보내야 한다.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2-4절에서 또 하나 주목할 표현은 “내 집 안에서”다. 왕이었던 다윗에게 “내 집 안”은 상당히 큰 개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와 자녀 뿐 아니라, 하인들, 신하들 등이 모두 포함된 개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 원리는 동일하다. 다윗은 “내 집 안”, 즉 가장 자신과 가까운 공동체에서 먼저 자신이 앞서 말했던 그런 완전한 마음으로 행할 것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별에는 겉보기 등급이라는 것이 있다. 별이 실제로 얼마나 밝은지에 관계없이 우리 눈에 얼마나 밝게 보이느냐를 가지고 등급을 나눈 것이다. 태양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이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밝지만 우주에는 태양보다 밝은 별들이 수없이 많다.

신앙에도 겉보기 등급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등급은 별과는 다르게 거리가 멀수록 더 밝게 측정된다. 만약 나를 책으로만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만 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교회에서도 강단에 선 모습만 보는 사람과 직접 어떤 일을 함께 해본 사람이 느끼는 것은 다를 것이다. 그럼, 집에서는 어떨까? 우리 신앙의 등급은 겉보기 등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 등급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절대 등급에 가장 가깝게 내가 보여지는 곳이 바로 집 안이다. 다윗은 바로 그 집 안에서 완전한 마음으로 행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그 마음과 삶의 간극을 줄이겠다는 말이다. 위선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때로는 위선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 오해를 가지고 죄악된 말과 행동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내 완전한 마음에 맞게 그렇게 살겠다는 결의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닮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있다면, 계속해서 그 마음에 맞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라도 가치 없는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않고, 위선적인 삶을 미워하며,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을 나도 옳게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5-7절)

2-4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을 말했다면, 이어지는 5-7절은 자신이 처한 상황,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 환경에서 다윗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함께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을 나눈다.

101:5–7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6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7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다윗은 어떤 사람은 멸하고 용납하지 않고 그의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고 그의 눈 앞에 서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와 함께 살 것에 대해서 말한다. 앞에서 그 마음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그 행동에 적극성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멸할 사람은 자기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사람이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은 은근히 진행되지만 결국은 그 공동체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를 비방하는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다윗의 경우는 그 비방이 나라의 분열로도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다윗은 그런 자들을 “멸하겠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했다. 지난 용서와 회복 설교 시리즈의 마지막에서 다루었던 바울의 용서에 대한 말씀도 그 근본에 있었던 것은 비방의 죄였다.

다른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 참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비방의 죄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 특히 주변이 계속해서 그렇게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그를 멸할 수는 없다면, 멀어져야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비방하는 자는 멸하게 될 것이다. 비방은 하지도 말아야 하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용납하지 않을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스러운 사람, 항상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 그래서 남들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결국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다윗은 그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견딜 수 없다는 의미다. 어쩔 수 없이 견뎌야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런 삶의 방식은 그 사람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도 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7절에서 다윗은 거짓을 행하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며 그런 자들이 절대 그의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6절에서는 반대로 그와 함께 살 사람으로 그 땅의 충성된 자를 말한다. 충성된 자는 곧 다윗과 같이 완전한 길을 주목하여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그런 사람을 세워서 하나님의 통치를 그의 나라에서 실천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8절은 그렇게 할 것에 대한 선언이다.

결론적 선언(8절)

101:8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아침은 왕이 보좌에 앉아서 재판을 하는 시간이다. 다윗은 그런 자리를 하나님께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듯이 악인을 멸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끊어버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그 땅 가운데 나타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그의 완전한 마음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다윗이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사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은, 내가 선택한 결과는 아닌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일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자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어 결국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정의 구성원이 모두 믿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함께 이 작은 가정을 이 땅의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 섬김을 받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는 것인 것처럼, 가정에서도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나 자신을 먼저 돌보고 서로를 돌본다면, 각자가 완전한 마음으로 집 안에서 행한다면, 그야말로 우리 가정을 지상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대로 믿지 않는 구성원을 쫓아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의 왕궁에서 사람을 쫓아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가정 안에 있는 아직 믿지 않는 자의 죄를 우리는 바로 잡기도 하고 때로는 견뎌내기도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과 가장 가까운 자들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보여주는 것이다. 내 집 안에서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다윗은 적극적으로 이렇게 했다. 그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지켰던 것처럼 주변의 환경, 특히 사람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행했다. 이런 적극성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은근슬쩍 비방을 즐기고 교만을 즐기고 거짓을 즐기면 안된다. 그런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죄를 분명히 인지하고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욱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도전

이 시편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해마다 왕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다짐을 하는 시편으로서 이 시편이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다. 사실 어느 쪽이든 관계없이 이 시편에서 다짐하는 것처럼 완전한 마음으로 완전한 길로만 행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우리가 잘 알듯이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그가 다짐한 것처럼 눈 앞에 악한 것을 두지 않는데 실패했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그럼 어떻게 할까? 한번의 실패는 결국 ‘완전함’을 깨뜨린 것이니, 어차피 망친거 이제는 막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완전한 마음은 처음부터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가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완벽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향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마음은 그런 것이다. 실패를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해도 하나님을 보고 다시 완전한 길을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괜찮다고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그런 죄를 우리가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큰 죄가 있지 않고 작은 죄가 있지 않다. 어떤 죄에 대해서든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내 마음을 지키고 내 환경을 지켜야 한다. 나를 넘어뜨릴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멀어져야 하고 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 가까워져야 한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 받을 만한 것, 칭찬 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해야 한다(빌 4:8-9). 완전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완전함에 이르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완전한 마음으로 행할 때, 우리는 그 끝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하실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날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