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1: 기도는 관계다

본문 :  마태복음 6장 5~15절

설교자 : 조정의

 

시리즈 제목은 사무엘의 퇴임사에서 가져왔다(삼상 12:23). 우리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안다(살전 5:17-18). 영생을 풍성히 누리는 비결이 기도라는 것도 배웠다(요일 5:14-21). 그런데 왜 기도가 의무를 넘어 특권이 되지 않는 걸까? 짐이 아니라 선물이 되기 힘든 걸까?

기도의 완벽한 본이시자 신적 권위가 담긴 기도 강의를 하신 예수님을 통해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원한다. 이를 통해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기초하며, 그 안에서 우리가 풍성히 누리는 축복이자 특권임을 바로 알기 원한다. 그래서 기도는 하면 좋고 안 하면 조금 손해 보는 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친밀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호흡과 같음을 알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결단하기 원한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의 형태 두 가지(5-8절)

1.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의 형태(1): 외식하는 기도(5-6절)

예수님의 기도 강의를 듣는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는데(마 4:25), 그들은 겉으로 볼 때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는 자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아침, 오후 3시, 저녁) 기도하였고(단 6:10; 행 3:1; 10:3), 특별히 성전에서 매일 오후 제사 때 나팔을 불면(2절), 그 자리에 멈춰서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좋은 유대인은 식전, 식중, 식후 이렇게 세 번 18가지 축사를 드렸고, 쉐마(신 6) 기도를 하루 두 번 드렸다. 

만일 이렇게 규칙적으로 자주 기도하는 성도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기도의 모델로 삼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자주 또 규칙적으로 많이 해도 유익이 없다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향한 기도 곧 외식하는 기도였기 때문이다.

5절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여기서 외식하는 자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배우’를 의미하는데,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가면을 쓰고 연기하듯 기도한다는 것이다. 어떤 연기를 펼쳤는가?

5절…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기도의 장소로 회당큰 거리 어귀가 등장한다. 회당은 유대인의 예배가 이루어지는 공적인 장소이자, 유대인이 서로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회당은 궁극적으로 ‘기도하는 집’이다(마 21:13). 큰 거리 어귀는 넓은 길이 교차하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아주 많은 장소를 가리킨다. 유대인은 때로 성전에서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이곳에 멈춰 서서 기도하기도 했다. 회당, 큰 거리 어귀 모두 기도의 장소로서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면 외식하는 자의 기도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5절에 보면 “서서”라고 되어 있다. 회당에서 대표 기도를 할 경우 서서 하였고, 거리에서 걷다가 멈춰 기도할 때 역시 서서 기도하였다. 기도의 자세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기반으로 소통하는 것인데, 외식하는 자는 엉뚱한 대상인 사람을 향해 기도하기를 즐거워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는 아무 유익이 없다.’ 

5절…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진실이지만,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그만큼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는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그것으로 자기 상 곧 기도의 응답이나 열매를 이미 다 받은 것이다. 잘못된 대상을 향해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쇼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충실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기초로(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를 “(그러나) 너는”으로 시작하는 6절 말씀으로 강조하신다. 

6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 말씀하신 예수님도 동산, 들판, 바닷가, 회당, 성전 어디서든 기도하셨다. 왜 골방(옷장, 창고), 그것도 문을 닫은 밀실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만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은 들으신다. 왜?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전지), 은밀한 중에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편재). 

하나님은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신다(대상 28:9).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했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대하 6:30). 다윗도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시 139:2). 시편 기자도 이렇게 기도했다.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1; 참고. 행 1:24; 15:8).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다. 무리를 대표하여 기도할 수도 있고, 기도를 통해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수도 있지만,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향한다. 

2.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기도의 형태(2): 주문하는 기도(7-8절)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기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형태의 기도 곧 주문하는 기도다. 

7절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첫 번째 반면교사가 외식하는 자였다면, 두 번째 반면교사는 이방인이다. 그들의 기도 대상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빚어 만든 가짜 신, 우상이다. 이방인의 기도방식을 예수님은 중언부언이라고 요약하셨다. ‘중언부언’을 가르키는 헬라어 단어는 아람어에 영향을 받은 의성어인데, 완곡하게 우리말로 비교하자면 ‘중얼중얼’, ‘나불나불’ 정도가 될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이방인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예시를 찾을 수 있는데, 첫째로 갈멜산에서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길게 주문한 바알 선지자들(왕상 18:26), 그리고 에베소에서 두 시간 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한소리로 외쳐 기도한 무리다(행 19:34). 이방인이 오랜 시간 같은 말을 반복하여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주문하는 것, 그래서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이방인 기도의 특징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8절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왜 그런가? 그들이 기도로 관계 맺고 있는 하나님이 우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상은 주문처럼 의미 없는 말을 오래 길게 반복하여 요청하면 기도를 들어주는 신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8절…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다(사 65:24). 예수님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눅 12:30)(인자, 긍휼, 자비).

길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 6:12). 반복하여 간절히 요청하는 기도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비유로 재판장에게 자주 가서 계속 번거롭게 요청하는 과부의 기도를 말씀하셨다(눅 18:1-8).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기도를 세 번 반복하여 드리셨다(마 26:39-44).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나아가느냐에 있다. 계속해서 조르고 떼쓰고 닦달하면 그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마지못해서 주는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나의 필요를 아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아버지로 보느냐. 예수님은 5절부터 8절까지 계속해서 우리 기도의 대상을 “네 아버지,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우리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고 그분의 자녀로서 기도로 아버지께 나아간다.

3. 적용: 당신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예수님의 기도 강의는 사람의 타고난 죄성을 깨부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죄인은 지극히 사람 중심적이다.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보다 더 신경 쓴다. 죄인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마치 계속해서 누르면 원하는 걸 토해내는 자판기처럼 취급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와 정욕을 못박으셨을 때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뀌었을 때 기도가 바뀐 것이다. 우리는 참된 관계를 회복한 후 마침내 참된 기도를 할수 있게 되었다. 당신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평가할 수 있는 두 가지 적용 거리를 살펴보자.

첫째, 당신의 은밀한 기도를 평가해보라. 시리즈 제목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이다. 기도하는 것을 쉬는 것이 왜 죄인가? 기도가 관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윌킨스는 “모든 기도의 중심인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친밀함에 그(기도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라고 말했다(NIVAC, 308p). 식사기도, 대표기도, 공기도를 종종 혹은 자주 드리고 있더라도 당신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기도하고 있는지,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평가해보라. 당신의 기도 밀도가 곧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의 친밀도를 말해준다. 혹시 당신은 외식하는 자의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 당신의 기도 내용을 평가해보라. 만일 당신이 소리 혹은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모두 적어서 책으로 낸다면, 어떤 책이 되겠는가? 그 기도문을 통해 분명히 알수 있는 건 당신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이다. 

수많은 미사여구가 당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반복해서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 주문처럼 방언으로 길게 쏟아낸 내용은 당신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는지 알려주는데 무용지물이다. 진정 당신의 기도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어주어 자녀로 삼으신 사랑의 아버지, 모든 필요를 아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아버지라는 믿음과 신뢰, 철저한 의존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게 되길 바란다(시 19:14). 

<죠지뮬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청교도인의 기도문> 등 기도의 사람들에게선 언제나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고 싶은 갈망과 열정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 사랑이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멈추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