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선한 진실로 이웃을 돌보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16절

설교자 : 최종혁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명령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큰 두 계명이고 십계명도 그렇게 구분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이 1-4계명이고 5-10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이다. 이 중 5계명이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접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 사회 질서와 도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6계명부터는 실제 이웃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계명이 언급되어 있다. 이 계명들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죄들을 금하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지켜야할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이 계명들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표면적으로 드러난 행위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그 계명이 지키려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살인은 생명이라는 가치를 소중히 하지 않는 극단적인 죄다. 따라서 사람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리는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보호해야 한다. 간음은 결혼이라는 가치를 소중히 하지 않는 극단적인 죄다. 따라서 바람만 안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소중히 여겨서 보호해야 한다. 도둑질은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가치를 소중히 하지 않는 극단적인 죄다. 남의 것을 훔치지만 않으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충성된 청지기로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도 마찬가지다. 이 명령도 거짓으로 이웃을 해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위증의 죄를 금하는 것으로서 진실로 이웃을 보호하고 돌봐야한다는 가치를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있다.

의미

말과 관련된 죄인 ‘거짓말’은 그동안 살펴봤던 살인, 간음, 도둑질과는 약간 느껴지는 것이 다를 것이다. 기본적으로 살인, 간음, 도둑질과 더불어 거짓말도 죄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다른 죄들은 우리와 멀게 느껴진다면 거짓말은 정말 가깝게 느껴진다. 삶의 일부로까지 느껴진다. 주일학교에서 죄에 대해서 가르칠 때 아마 가장 쉽게 예로 드는 것 이 친구와 싸운 것과 함께 거짓말일 것이다. 그만큼 거짓말은 우리와 가깝다. 나이에 상관없이 그렇다. 죄라는 인식은 있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는 용납하는 죄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재미를 위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니까 등의 이유로 우리는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거짓말을 해야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하얀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 같은 것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좀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자신에게는 일어나지도 않을,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를 만들고, 그것을 거짓말이라는 전체의 죄를 정당화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거짓말을 그냥 나와 공존하는 죄로 인정하고 싶을 때, 하나님께서 거짓말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해야한다.

잠 6:16-19 16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잠 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시 5:5-6 5 …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하나님은 왜 거짓말을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실까?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빛이신 하나님께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거짓이라는 어둠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서는 안된다. 선한 살인이 있을 수 없고, 선한 간음이 있을 수 없고, 선한 도둑질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선한 거짓말도 없다. 거짓말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다.

제 9계명은 넓게 적용하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거짓말을 막는 것이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웃 즉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거짓말이다. 9계명을 보면, 앞의 계명들의 패턴을 따라 짧게 “거짓말 하지 말라”라고도 할 수 있었겠지만, 조금 다른 형태로 주어졌음을 볼 수 있다.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 : 앞의 계명들도 당연히 이웃 간이 관계에 대한 것이었지만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네 이웃”을 분명히 강조한다.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네 이웃”은 같은 언약의 공동체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신 것처럼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웃이다. 삶에서 만나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 일반적으로 “거짓말하지 말라”가 아니라 특히 재판 중에 거짓 증언하는 것을 금한다. 즉, 위증의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면서 법정에서 증언을 할 일이 많지 않은데, 왜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계명이 있을까 조금은 의아할 수도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하다.

사람들이 함께 살다보면 시시비비를 가려야할 때가 많다. 부부만 함께 살아도 둘 사이에 갈등이 있고 상황에 대한 이해가 달라 언쟁이 될 때가 있다. 어떻게든 합의를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그렇게 되지 않아 제 3자의 중재가 필요할 때도 있다. 아이들을 둘 이상 키우면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부모는 재판장이 되어 주어야 할 때가 많다. 그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공의다. 그리고 공의로운 판단의 근간이 되는 것이 “사실”, 즉 팩트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실에 대한 판단은 증언에 기초할 때가 대부분이다.

사회가 커질수록 그런 일들이 더 많이 생기고, 그 일은 장난감을 누가 먼저 가지고 노느냐나 누가 주스를 엎질렀느냐와 같은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생사를 가르고 삶을 바꾸는 중대한 문제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야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부터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재판을 했다. 그리고 거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로움이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공의를 내세운다고 해도 고대의 재판은 그렇게 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일방적으로 고소를 당해도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했다. 사회적으로 가진 힘이 곧 재판의 결과를 좌우하기도 했다.

여튼, 공의로운 판결을 위해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증언일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처럼 CCTV도 없고 녹음도 할 수 없고, 지문, DNA 검사 등의 과학적 수사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증인들의 증언이 재판에서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때로는 원고가 곧 증인이고, 그의 증언 하나로 피고가 유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악용되었다. 거짓 증언을 통해서다. 거짓 증언을 잘 하면 이웃을 살인자로, 간음한 자로, 도둑질한 자로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최소한 3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신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첫째는 한 사람이 아니라 최소한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일치할 때에만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신 19:16-19 16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둘째는 만약 위증으로 판명되면 피고에게 내려질 죄의 형벌을 증인이 받아야 했다. 즉, 만약 살인죄로 기소가 되었고 증인이 증언을 했는데 그 증언이 거짓임이 밝혀진다면 증인이 사형을 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냥 “아니면 말고”식의 증언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신 17:6-7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여기서는 우상숭배한 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경우인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두 세 사람의 증언이 일치해야했고, 또 실제로 형을 집행할 때 그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했다. 즉, 자신의 증언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이다. 만약 무고한 자를 자신의 증언으로 죽게 만든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죽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함을 공식적으로 보여주게 하는 규범이었다. 이런 율법의 의도는 분명하다. 누구도 증언 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실된 증언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장치들이 있었어도 근본적으로 위증을 막을 수는 없다. 특히 이미 힘의 차이가 있으면 재판은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근본적으로 각 사람이 진실되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거짓 증언”으로 이웃에게 가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9계명의 의미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키고 그 구성원인 이웃을 돌봐야한다는 가치를 지키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할 수 있다. 거짓은 파괴하는 것이고 진실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다. 선한 진실로 이웃을 돌보라는 것이 이 명령의 의미다.

중대함

다른 계명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볍게 보이는 9계명이 중대한 이유는 이것이 “말”로 가능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잠언 성경 개관 시간에 배운 것처럼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침투성과 확장성으로 인한 파괴력이 굉장하다. 그래서 잠언은 이렇게까지 단언한다.

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정말로 우리는 말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다. 가장 극명한 예가 열왕기상 21장에 기록된 나봇의 포도원과 관련된 사건이다.

아합은 왕궁 가까이에 있었던 나봇의 포도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포도원을 사고자 했는데, 나봇이 거절했다. 이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근심했는데,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주었다.

왕상 21:8-10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이 일은 그대로 진행되어 나봇은 죽었고 아합은 그의 포도원을 기쁘게 차지했다.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기까지 아합은 무슨 일을 했는가? 딱히 한게 없다. 그냥 그 아내가 하는 악한 일을 방관했을 뿐이다. 그 아내 이세벨은 무엇을 했을까? 그저 편지를 써서 왕의 이름으로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말의 힘이다.

사울이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했는데, 그 신하들이 별로 협조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했던 적이 있다. 그때 도엑이라는 사람이 입을 열어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갔었다는 사실을 말했는데, 그 결과로 그곳의 제사장 수십명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이것이 말의 힘이다.

야고보가 말의 힘에 대해서 묘사한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약 3:5-8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말이 가진 힘이 이렇고, 악한 말은 더욱 그렇다. 그리 어렵지 않은 거짓 증언을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었고, 그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무고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고, 순결한 사람을 부도덕한 자로 만들 수 있다. 어린 아이들도 할 수 있는 몇 마디 말이면 그것이 가능하다.

한 사람에게 이런 해를 가하는 것만으로도 거짓 증언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했지만, 사실 그 영향력은 개인을 훨씬 넘어선다. 거짓 증언은 사회를 지탱하는 사법 체계 자체를 무너뜨린다. 재판관이 아무리 공의로와도 그가 얻을 수 있는 사실, 이 경우는 증언이 공의롭지 못하면 판결은 공의로울 수 없다. 공의롭지 못한 판결이 계속된다면 누구도 재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패자가 되고 강자가 곧 질서이자 공의가 되는 사회가 된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거짓 증언은 꼭 재판의 상황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거짓 증언으로 이웃을 해하는 것은 잠시 후에 다루겠지만 일상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상의 거짓 증언이 법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충분히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거짓 증언은 서로를 깎아 내리고 믿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보다 쉽고 가까운 “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계명보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계명이 바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이다. 선한 진실로 이웃을 돌봐야한다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적용

그렇다면, 이제 이 명령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까? 크게 세 영역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재판과 관련된 영역, 둘째는 일상과 관련된 영역, 셋째는 인터넷과 관련된 영역이다.

먼저는 가장 직접적으로 어떤 종류의 재판에서든 거짓 증언하지 말아야한다. 자신에게 유리하게로 혹은 누군가를 불리하게 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알고 있는 사실을 숨겨서도 안된다.

레 5:1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재판에서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자신이 피고가 된 경우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죄가 있을 경우 죄를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백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법정 다툼이 단순히 진실만을 밝히는 것이라면 괜찮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뉴스에 오르내리는 법정 다툼들을 봐도 그렇다. 분명 진실이 있고, 누군가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마치 게임을 하듯 서로가 자신이 옳다는 주장만을 한다. 결국 재판을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거나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돈이 되었던 명예가 되었든, 형량을 낮추는 것이든 반대로 높이는 것이든, 뭔가를 더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법적 싸움을 길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 솔직함은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특히 나에게 불리한 증언이나 자백을 하는 것은 정말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게 우리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식 재판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아마 차 사고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요즘은 그나마 블랙박스를 많이 달고 다녀서 사실 확인을 좀 더 객관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당사자들의 증언도 중요하다. 그럴 때 내 과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을 9계명은 금지한다. 모든 책임을 다 져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추지 말고 증언해야하고 그에 따르는 손해나 책임은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고를 목격했는데, 좀 더 가해자에 가까운 사람이 나의 가족이거나 혹은 유평의 성도라고 해도 목격한 사실을 그대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이나 성도에게 악한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시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그런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상식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명백한 내 잘못이 있어서 책임을 져야할 때, 나를 감싸주며 거짓말을 해주는 사람이 내 편이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자식이 도둑질을 했을 때 그것을 무조건 감싸고 부인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잘못을 알고 책임지게 하여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인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지만, 거짓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리 안에서 함께 짐을 지는 것이 사랑이다.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서 사고를 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보지 못했고 발각될 염려가 없더라도, 선한 진실로 이웃을 돌봐야 한다. 사고 사실을 알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사적인 재판도 있다. 다른 사람과 사실 관계를 두고 논쟁을 하거나 할 때, 나에게 유리한 정보만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숨기고 싶을 때가 있다. 혹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다툼에서 증인이 되기도 하고 재판관이 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더 편을 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레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이런 말씀에 순종할 때, 내가 손해를 보는 것도 감당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된다고 생각할 때 더 그런 면도 있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들도 중요한 순간에 진리보다 거짓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난 거짓을 선택하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처럼 들릴 수 있지만, 참된 사랑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떠나 존재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고,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통해 사랑한다. 우리도 그렇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일상과 관련된 영역에서 거짓으로 이웃에게 해를 가하는 험담이다. 험담은 그 사람 앞에서 하지 못할 말을 뒤에서 하는 것인데, 비슷한 단어로는 비방, 중상, 모략, 뒷담화 등이 있다. 대부분 대상을 깎아 내리려는 목적으로 대상의 좋지 않은 면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거나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한다. 했던 말을 문맥에 관계 없이 가져와서 그 사람의 의도를 훼손하기도 한다. 사실을 부풀리거나 왜곡한다. 말의 의도를 그냥 넘겨짚으면서 그것이 기정 사실인양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거짓으로 이웃을 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험담은 제 9계명을 어기는 죄고 따라서 율법은 이것도 금지한다.

레 19: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

정말 악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경우를 뉴스를 통해서 많이 본다. 특히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들의 경우 이런 거짓 증언은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을 보면 자신을 향한 거짓 증언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답답해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험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쏘는 화살과 같아서 당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 심지어 거짓 증언인 것이 후에 밝혀지더라도 이미 맞은 험담의 화살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기 어렵다. 인터넷 기사들을 보라. 누군가에게 어떤 의혹이 제기될 때는 기사들이 넘쳐나지만, 의혹이 그냥 의혹으로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넘어간다. 해명 기사, 후속 기사 같은 것은 있어도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혹을 그냥 사실로 믿고 있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의혹을 제기할 때는 마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말하고 열심히 기사를 퍼나르고 공유하지만, 막상 진실을 알아내면 관심에서 멀어진다. 그저 남 얘기 하는 것, 험담이 재미있어서 그렇게 했던 것 뿐이다. 혹은 어떻게든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을 뿐, 정의의 사도는 없다.

인터넷 기사만 그런가? 우리도 실제 삶에서 그런 일들을 많이 한다. 두 사람이 모이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재밌다. 특히 무슨 어려움이 있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 얘기를 많이 한다. 때론 자기 어려움을 좀 들어달라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남에 대한 안좋은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너만 알고 있어”라고 하며 비밀을 공유하고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문제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그런 비방과 험담이라는 거짓으로 친밀해진 친구들이 사슬처럼 엮여있다는 것이다. A와 B는 C에 대한 험담으로 묶여 있고, B와 C는 A에 대한 험담으로 묶여 있고, A와 C는 B에 대한 험담으로 묶여 있다. 때로는 이 사슬이 더 복잡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해서 전체 관계가 폭파되기도 한다.

잠 16:28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나에게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남에게 나의 말 하기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뭔가 둘만의 비밀을 공유해서 내 편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지만, 결국은 정말 중요한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 거짓에 기초한 이런 관계는 드라마로 보면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는 존재하지 말아야할 관계다.

험담은 최소한 두 사람이 모여야 가능하다. 혼자서 다른 사람 욕을 할 수는 있겠지만 험담은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험담을 하는 것 뿐 아니라 듣는 것도 같은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없다면 말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다른 성도의 이름을 거짓으로 모욕하는 험담은 해서도 안되고 들어서도 안된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처음부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면 그 대화를 멈춰야 한다. 성도와 교제할 때, 그 자리에 없는 성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성도를 돕고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깍아 내리고 험담을 하는 쪽으로 흘러간다면 듣는 사람도 선한 진실로 이웃을 돌보기 위해 대화를 멈추자고 해야 한다.

필립 라이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그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책임일 때이다.”

진실된 마음으로 죄 중에 있는 형제나 자매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허물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아무리 잘 포장해도 험담이다. 험담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별식처럼 너무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질 수 있다. 자꾸 먹고 싶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남 얘기 하는게 아니면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어차피 둘만의 비밀이라 그 대상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험담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앞서 말한 사슬 관계를 타고 소문이 되기도 한다. 그 거짓 증언을 모든 사람이 사실로 알고 있을 때도 있다. 결국 그런 거짓이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를 무너뜨린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리로 하나되기를 기도하셨다. 거짓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무너뜨림을 잊지 말아야 한다. 험담은 일상화되어서 우리의 이웃을 해하는 거짓 증언이다.

마지막으로 거짓 증언와 관련하여 지금 시대에 우리가 더 신경써야할 것이 있다. 바로 인터넷을 통해 확장된 세계 안에서 제 9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먼저 인터넷, 특히 SNS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거짓 증언이나 험담을 손가락으로도 하지 말아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인터넷은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항상 만나고 부딪히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이런 죄가 더 쉽게 느껴질 것이다. 즉, 현실의 사람에게 말로 거짓 증언을 하거나 험담하는 것보다 인터넷 상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가 쉬워지면 그 죄를 범하기도 쉬워진다.

이런 경향성은 댓글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뉴스 기사, 어느 동영상의 댓글을 봐도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있는 곳이 없다. 남에 대한 험담이 아무렇지 않고 거짓 증언도 넘쳐난다. 실제로 만나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서로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인터넷에서 많이 발생하는 여론 재판도 주의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었던 유명인들에 대한 의혹 제기 같은 경우 쉽게 여론 재판으로 흘러간다. 언제나 의혹을 제기하는 쪽이 먼저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여론의 힘을 얻게 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우리는 잠언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잠 18:17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쉽게 어느 한쪽의 정보만을 옳다고 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특히나 인터넷에는 잘못된 정보들도 정말 많다. 나와 결론이 같다고 해서 그 관련 정보들도 다 사실이라고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 확증편향되어 거짓 증언을 나도 모르게 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충분한 정보를 검토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혹, 그런 일이 아니라면 굳이 그런 여론 재판에 동조하며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왜 의혹 기사는 많고 해명 기사는 적을까? 간단하다. 사람들은 의혹 기사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기사를 쓰는 것이 더 돈이 된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의혹 기사들이 넘쳐 난다. 우리가 그런 거짓 증언에 동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모든 의혹 기사들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목적이 대상을 깎아내리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경우들이 많고, 그런 기사들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계속 읽고 하는 것들이 그런 비방에 동조하는 일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는 말 뿐 아니라 우리가 읽는 것, 관심을 가지고 클릭하는 것들이 거짓 증언으로 이웃을 해하는 일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은 많은 유익을 주는 매체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죄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말의 확장성을 비약적으로 확대하여 그 파괴력을 강화시키는 특징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말하는 것, 듣는 것을 조심해야하는 것 이상으로 인터넷에서 쓰는 것, 읽는 것,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인터넷 상에서 거짓으로 이웃을 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참된 진실로 이웃을 돌보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한다.

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상황을 보면 유대인들은 바로 이 제 9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비방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고, 죄인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비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판 과정을 모두 어겨가면서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다. 그 과정에서 거짓 증인들을 데려와서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들었다. 그 중 두 사람이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라는 증언을 했고, 이것을 빌미 삼아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다그쳤고 결국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거짓으로 사람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게 만들었다. 9계명을 어기는 대표적인 죄인 재판에서의 거짓 증언과 험담(중상모략)으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게 되신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그렇게 이웃 사랑의 최고의 본을 보여주셨다.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오늘날 제 9계명 앞에 서있는 우리는 바로 그런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다. 그 은혜 앞에서 우리의 지난 죄가 있다면 회개하고, 다시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신 주님처럼 우리 이웃을 선한 진실로 돌봄으로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 말했듯 제 9계명은 우리와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계명이다. 그 말은 우리가 이 계명에 순종했을 때, 우리의 이웃이 가장 가깝게 우리의 이웃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나를 위해서라면 거짓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이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진실을 말하는 사랑이 우리 교회에 가득하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참된 주님의 증인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