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2

본문: 시편 103편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시편 103편의 처음과 끝에 반복되어 등장하는 “송축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살펴봤다. 송축하라는 명령은 먼저 하나님이 모든 것에 풍요로우신 분이심을 인정하며 우리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여 예배하라는 명령이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냈다거나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선포해야한다. 내 감정이, 내 생각이, 내 의지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먼저는 자신에게 크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는 것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을 머리로 기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그들이 누리는 것들에 대해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그 모든 것들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살게 하셨는데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었다(대하 32:25). 그것이 하나님의 은택을 잊은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서 그들을 구해내셨고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는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잘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낫게 하셨는지를 물으면 잘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택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9명의 나병환자도 감사를 잊었고 그로 인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다. 잊지 않은 자는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을 예배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잊는 것이고, 하나님을 잊으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은 곧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합당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과도 같다. 그리고 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이 실제로 이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송축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내용은 크게 보면 2인칭 단수 대명사인 “네”가 등장하는 3-5절과 1인칭 복수 대명사인 “우리”가 등장하는 6-14절, 그리고 좀 더 보편적인 “인생(인간)”이 등장하는 15-18절로 나눠볼 수 있다.

개인적 송축(3-5절)

3-5절에서는 계속해서 “네”가 등장하는데, 1-2절의 맥락에서 보면 여기서 말하는 “네”는 “내 영혼”이다. 즉, 다윗은 여전히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자신이 잊지 말아야할 하나님의 모든 은택 중 일부를 지금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103:3–5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가만히 보면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아니다. 그래서 시제도 과거형으로 되어 있지 않다.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하셨고 저런 일도 하셔서 감사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이 이 시편의 기초에 있겠지만, 시편 기자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알게 된 (확신하게 된)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도 “그는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분이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며 …”와 같은 식으로 하는 것이 더 본래의 의도를 반영하는 번역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보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이 찬양은 그저 같은 찬양의 의미 없는 반복은 아니지만, 동시에 좀 더 일반화된 표현을 통해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같은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다윗이 여기서 언급한 은택들이 다윗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윗이 자신만이 경험했던 것을 기록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던 하나님, 오랜 시간 도망자로서 살아갈 때에 그를 보호하셨던 하나님,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특별히 언약을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 등 자신만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들에 대해서 언급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이 “그의 모든 은택”을 생각할 때 생각나는 것들이었겠지만, 특정해서 언급하지는 않음으로써 이 시편이 공적인 예배의 상황에서 합당하게 드려질 수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우리는 혼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함께 예배한다. 그렇게 함께 예배하는 것을 넓은 의미에서는 공예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 특히 그런 상황에서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상황, 즉 어떤 식으로든 예배를 인도하는 상황이라면 방금 전에 살펴봤던 그런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예배를 드리는 자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해 예배할 수 있지만, 예배를 인도하는 자로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공통 분모를 찾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족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자리라면 회사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꽤나 구체적으로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 들었던 생각이나 감정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부 간에서만 할 수 있는 얘기를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구역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도 좀 더 자신을 오픈해서 나눌 수 있는 얘기들이 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구역으로 나눠서 예배하는 시간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 할 수 없는 얘기들도 있다.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뭔가를 숨기는 것이거나 솔직하지 못한 것이거나 진심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함께 드리는 예배는 ‘함께’를 항상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다. 솔직함을 이유로 해서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얘기를 하거나 혹은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얘기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 전체가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도 그렇다. 그런 자리에서는 나 개인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함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셨고 그래서 내가 감사하니 당신들도 같이 감사하라는 식으로 예배가 드려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공감할 수 없는 감사는 때로 하나님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셨다가 아니라 내가 이런 것을 이루어냈다는 자기 자랑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표현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은택을 잊은 것이 된다. 나의 감사를 통해 ‘함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에게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모두가 더 알게 되고, 그런 하나님을 ‘함께’ 찬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예배 시간에 공적으로 입을 열어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다.

다시 다윗이 언급한 은택들을 보면, 여기 언급된 것들은 다윗에게 특정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공감하며 예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이런 은택은 아무나 누리지는 못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소수만이 누리는 혜택인 것이다. 13, 17, 18절이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들이 이런 은택을 누릴 수 있다. 즉,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은택을 지금 기억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죄 사함’이다(3절).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죄’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죄 사함’은 모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다. 다른 모든 하나님의 은택을 받는다해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서 전혀 아프지도 않고 아무 고생도 하지 않다가 편안하게 삶을 마감한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면, 그래도 고통 없는 삶을 살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집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원하는만큼의 재물도 있어서 일년에 몇번씩 해외 여행을 다니면서 맛있는 것들도 많이 먹고 정말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그런 삶을 산다고 해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사람들의 육신의 필요를 돌보셨다. 그들을 먹이셨고 그들을 고치셨다. 하지만 그 무엇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천명을 먹이신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반기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육신의 필요를 돌보셨던 이유는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시고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이 땅의 왕이 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다(눅 19:10). 그렇게 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마 20:28). 우리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려고 이 땅에 뛰어드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평안한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눅 9:58).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을 따르는 자도 그런 것들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그런 평안과 안락함, 이 땅에서의 형통함을 약속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혼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셨지만, 세상에서는 오히려 미움을 받고 핍박과 환난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 했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큰 필요, 바로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오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드리셨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얻는다.

요일 2:1–2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의로우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다시 정죄하지 않으신다.

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확신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린다. 사실, 다윗은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라고 말했지만, 십자가 이후를 사는 우리처럼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죄를 사하시는 분이심을 알았고 분명히 경험했지만 (아마도 병 고침의 은혜를 통해, 그리고 밧세바 사건을 통해),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질 온전한 죄 사함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이 “모든 죄악(어떤 죄든)”을 사하시는 분임은 알았다. 뒤에서 밝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 아니라 긍휼이 많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도 그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12절).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것이기도 하고 대속죄일에 하나님께서 두 염소를 통해 보여주신 그림이기도 하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한 마리의 염소는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그 염소의 머리에 두어 광야로 보내야 했다(레 16장). 그러면 그 염소는 백성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까지 가서 그곳에서 놓여졌다. 그렇게 백성들의 죄가 멀어졌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더 이상 그 죄와 우리가 관계 없다고 선포하신다.

그래서 실제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처럼 최악의 상황에서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자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택을 경험했다. 그에 대해 감사한 내용이 시편 32편에 기록되어 있다.

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32: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다윗은 죄 사함의 은택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즐거워할 수 있었다. 메시아를 통한 온전한 속죄에 대해서 그는 다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시기에 언제든 그렇게 죄 용서의 은택을 누릴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 큰 확신 가운데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구원 받은 자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 이것이 히브리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단번에, 영원히, 온전히, 이루어진 죄 사함이다.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26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죄 사함을 위해 우리는 물론 하나님께서도 더 해야할 무언가는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온전히 이루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완성된 일이다. 우리는 이 은택을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매주 행하는 주의 만찬이 좋은 수단이다. 예수님도 그래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면서 이 예식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해 계속해서 죄 사함의 은택을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그 은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죄 사함에는 관계적인 측면도 있다. 법적인 문제만 없으면 모든 관계가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다. 구원 받은 후에 범하는 죄도 당연히 법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사함을 받은 죄다. 그것 때문에 다시 심판을 받는 일은 없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 되신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심판을 받으셨는데, 우리에게 또 다시 심판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하나의 죄에 대해 두 번 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이 사실을 오해 혹은 악용해서 ‘그러니까 구원 받은 이후에 죄를 짓는 것은 실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며 죄악된 삶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법적인 문제 뿐 아니라 관계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인 우리의 관계의 친밀함에 죄는 치명적이다. 이것이 요한일서 1장에서 분명히 말하는 진리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한다.

요일 1:5–7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는 자다. 그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죄는 이 정상적인 친밀한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는 말이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구원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죄의 유무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인정에서 드러난다. 즉,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죄로 인정하고 자백하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자백하는 자를 항상 용서하신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죄를 자백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또 다른 죄 사함의 은택이다. 우리는 이런 관계적 측면에서의 죄 사함도 잊지 않고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때로 우리는 죄 사함에 대해 과거의 일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미 지난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이 불필요한 반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은 단 한 번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애초에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은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택을 생각할 때, 만약 죄 사함이나 구원이 아니라 다른 것들만 생각난다면, 예를 들어 건강하게 해주신 것, 지금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해주신 것,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자라게 해주신 것, 직장에서 좋은 상사를 만난 것과 같은 것들만 생각난다면, 그렇다면 나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일 수 있다.

지금 언급한 것이 하나님의 은택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그의 모든 은택”이라면 그 사람은 죄 사함의 은택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죄 사함의 은택을 경험한 사람은 절대 그 사실을 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 중의 최고가 바로 죄 사함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죄 사함이고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바로 죄 사함이다. 혹 영적 치매가 있더라도 죄 사함은 절대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이것만 가진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주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셨다. 이것이 나의 주된 그리고 궁극적인 감사가 아니라면, 나는 그 은택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닌데도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다. 죄 사함에 대한 오해가 있을 때 그럴 수 있다.

하나는 법적인 측면에서의 죄 사함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데, 거기에 마치 내가 무언가 기여해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다. 자신의 죄와 죄악됨을 보면서 계속해서 마치 용서받지 못한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하시는데, “아니 제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면서 하나님께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율법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마치 그래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산다. 말로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를 가진 사람은 언듯보면 굉장히 겸손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무언가 순종하려는 열심도 있지만, 항상 벽에 부딪히고 넘어진다. 결국 자기가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로 죄 사함을 받는다. 내가 그 사실을 믿는다면 그렇게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과 기쁨을 누려야 한다. 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단번에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우리는 이 은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죄 사함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관계적 측면에서 온다. 앞서 짧게 언급한 것처럼, 죄 사함과 관련해서 법적인 측면만 생각하고 관계적 측면을 생각하지 않아서 지금 자기 삶의 죄를 가볍게 보는 경우 결국 죄 사함의 은택을 누릴 수 없다. 실제하는 죄의 문제를 ‘어차피 용서 받은 거니까’라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그냥 넘어가기만 하면, 그 죄의 영향을 계속해서 받게 되는 것이다. 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른 여러 은택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는 삶을 살면서 ‘그래도 나는 구원 받고 죄 사함 받았어’라고 주장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죄를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오해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구원 받지 않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성령님께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 오해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은 죄를 사하고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 삶은 죄와의 싸움이며, 우리의 예배는 그 싸움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싸움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하나님을 힘입어 승리하고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드릴 마땅한 예배다. 우리 각자가 또한 우리가 함께 모든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