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

본문: 시편 103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4권의 마지막 4편의 시는 공통적으로 감사와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편들의 시작과 끝을 보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03편과 104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표현이 동일하게 시작과 끝에 있어서 하나의 쌍을 이루고, 105편과 106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와 “할렐루야”라는 명령이 동일하게 등장해서 하나의 쌍을 이룬다.

내용적으로 보면 103편은 하나님의 재창조라 할 수 있는 죄사함의 구원에 초점이 있고,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에 초점이 있다. 103편은 구원자 하나님을, 104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105편과 106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105편은 하나님께서 그 관계 안에서 어떻게 주권적으로 능력을 나타내셨는지를 강조하고, 106편은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셨음을 강조한다. 105편은 주권자 하나님을, 106편은 신실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감사와 찬양의 시편을 앞으로 하나씩 살펴보며 우리와 나의 감사와 찬양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시편 103편은 아마도 시편 23편 다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시편일 것이다. 그만큼 시편 103편을 바탕으로한 찬양도 많이 만들어졌고 불려져왔다. 다윗의 시로서는 드물게 어떤 고난이나 핍박, 대적에 대한 내용이 드러나지 않고 순수한 감사와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3절에서 병 고침이 언급되고 14-16절에서는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에 대한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어떤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후에 기록한 시편이 아닐까하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질병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렇게 죄와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한다.

이 시편은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명령으로 시작(1-2절)하여 같은 명령으로 끝난다(19-22절). 그 중간의 말씀은 명령의 이유들을 언급하는데, 그 핵심은 “죄사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꿰뚫는 중요한 키워드는 “기억”이다.

103:13–14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그런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긍휼함을 입은 자인 우리가 할 일이다.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하나님을 자꾸 잊으려고 하는 우리에게 절대로 잊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도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실 우리가 모두 알 수도 없고 그래서 모두 기억할 수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그 모든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을 기억하고 계속해서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꼭 배워야할 교훈이다. 그럼 먼저 송축하라는 명령부터 살펴보자.

송축하라(1-2절)

103:1–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송축하라”는 동사는 본래 ‘축복하다, 복을 주다’로 번역되는 동사로서 일반적으로 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하는 행위다. 그 행위의 결과는 복, 즉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풍요로운 삶, 풍성한 삶이 축복의 결과다.

“축복하다”은 본래 복을 빈다는 뜻이지만 오늘날은 복을 내린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된다. 그래서 본래는 ‘하나님의 축복’은 틀린 말이지만, 오늘날은 통념상 인정되는 표현이다. 엄밀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혼용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튼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런 좋은 일을 우리 삶에 행하셔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일한 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여호와께 축복하라’도 아니고 ‘여호와여, 축복해주소서’도 아닌, “여호와를 송축하라(축복하라)”는 명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다. 먼저, 사람을 축복하듯이 하나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보다 더 큰 어떤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일한 복의 근원이시기에 누군가가 하나님께 복을 주기를 구할 수는 없다.

그럼, ‘복을 주다’라는 의미로서 ‘여호와께 복을 드리라’는 명령은 가능할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드릴 수 있을까? 앞서 말한 축복의 결과가 풍요로운 삶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역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삶이 더 풍요롭게 변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 신들은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유일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다 이런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지만(마 6:9), 우리는 이미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조금도 더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영광스럽게 하라’고 명하지만, 이미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우리는 조금도 더 영광스럽게 할 수 없다. 그럼 왜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라고 명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셔서 그렇게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먼저는 우리가 그분을 그렇게 인정하고 다음으로는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을 그렇게 드러내라는 의미다. 사실 이것이 예배의 의미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송축하라는 명령도 같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무언가 부족해서 복을 받으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만 하나님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 바울은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를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17:24–25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언제든 풍요롭지 못한 상태에 있지 않으시다. 오히려 풍요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심을 우리가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 한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으로서 세상 가운데 드러나신다. 이렇게 하는 것을 한글 성경에서는 “송축하다”라고 번역하기도 했고, 결국은 그것이 찬양이기 때문에 “찬양하라”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더 넓의 의미에서는 예배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다만 다른 예배와 관련된 명령에 비해 “송축하라”는 명령에서 중요한 것은 풍요로우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은택)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송축하라”는 명령의 끝에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 주어져있다. 즉, 정리하면 “송축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여,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심을 드러내라는 명령인 것이다.

이 명령이 시의 시작인 1-2절에서 반복되어 강조되었고 시의 끝인 19-22절에서도 다시 반복되어 강조된다. 이 반복되어 강조된 명령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가지를 살펴보자.

“내 영혼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명령의 대상이 “내 영혼”이라는 점이다. 이 표현은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으로 더 구체화되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구분하려는 의도가 없다. 즉, 자기 몸으로는 무엇을 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자기 영혼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시편은 공적으로 예배드리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몸은 당연히 예배의 자리에 있다. 예배자의 태도를 보이고 있고 그 입으로 찬양도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겉으로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 즉,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같은 것들, 그의 모든 진심이 하나님을 예배하길 바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비슷한 의미로 영으로 예배하는 자를 말씀하셨었다.

공적인 예배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너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거나 “우리가 함께 여호와를 송축하자”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윗은 “내 영혼아”라고 함으로서 다수가 함께 드리는 예배의 자리라고 해도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느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로 함께 찬양할 때,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 시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몸은 예배당에 와있지만 그 마음은 어제 본 영화나 축구 중계에 가 있을 수 있다. 혹은 주일 오후에 할 다른 일들에, 혹은 더 먼 미래의 일에 마음이 가 있을 수 있다.

혹은 아주 굳은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와있을 수도 있다. 절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앉아있는 것이다. 마치 뻔히 아는 광고 전화를 받을 때처럼 귀로는 듣고 있지만 그 마음은 굳게 닫아두고 전화 끊을 타이밍만 노리는 것처럼, 그렇게 예배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도 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그 마음은 먼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다윗처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라고 나 자신을 부르면서 다그칠 필요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재밌는 표현이다. 마치 자신과 자신의 영혼이 구별된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편을 보면 이렇제 자신에게 말하는 경우들이 있다. 시편 42편에서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고 묻는 말이 있다. 시편 62편에서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말하기도 한다. 116:7에서는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라며 평안할 것을 명하기도 한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서 한걸음 멀어져서 자신과 그 상황을 바라봐야할 때가 있다. 자기 객관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자신에게 알게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옳은 것”보다는 “좋은 것”만 따르려고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냉정하지만 자신에게는 한없이 따뜻하다. 죄는 이기심, 즉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충고할 때는 옳고 그름이 분명한데, 같은 일을 내가 겪을 때가 그렇게 판단하지 못할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되지’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같은 일을 했을 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옳은 것보다 좋은 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예배하지 않으려고 할 때, 감사하지 않으려고 할 때, 찬양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다윗처럼 혼잣말을 해야할 때다. 자기 개관화를 통해 자신에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나를 밖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보고 무엇이 정말 옳은지를 나 자신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언제든 옳다. 그러니 그 옳은 것을 나 자신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내 감정이 예배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내 생각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내 의지가 연약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이렇게 강력하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물론 이 한 마디로 마음이 바로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그냥 흘러가게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은 아름다운 시의 한 구절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자의 기합 소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할 때 자신을 다그치기도 하듯, 때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노력해야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들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송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배 시간 중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에도 그렇게 예배자로서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의 모든 은택”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그의 모든 은택”이다. 이 은택들이 무엇인지는 다음 시간에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서 자세하게 볼 것이다. 이 시간에는 이 은택의 특징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이런 문맥에서 우리에게 더 익숙한 단어는 은택보다는 은혜다. 그래서 다른 번역들은 은혜라고 주로 번역했는데, 개정개역 성경은 은택이라는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했다.

“은택”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은혜와 덕택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고 이와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혜택’이다. 히브리어 단어도 정확히 혜택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benefit으로 많이 번역했다. 이익, 유익인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내는 보상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혹은 아예 그와 관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런 은택이다. 1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삶에 가능해진 일들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은택이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해줄 수도 없는 일이다. 오직 모든 복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신 모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들만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 잘 하고, 자녀가 잘 되고, 교통 사고가 났는데 나만 멀쩡하고, 그런 것들만 은택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며 사는 것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택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된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시편 103편은 다윗이 늦은 나이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하나님의 은택을 알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나이가 들면 좋을게 하나 없겠지만, 예배자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더 경험하게 되고 그만큼 더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그의 모든 은택을 기억할 때 가능하다.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아야 한다. 은택은 나와 관계 없이 내 삶에 주어진 것으로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심을 잊지 말고 나이가 몇이든 모든 일에 대해서 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

“잊지 말지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잊지 말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그 기억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 여기서는 하나님을 송축할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집에서 나갈 때 불 끄는 것 잊지 말라고 말하면, 그것이 단순히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불을 끄고 나가라는 의미인 것과 동일하다. 1단계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고 2단계는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택에 대해서 이 둘 다를 잘 하지 못한다. 은택을 쉽게 잊고 기억하더라도 그에 대해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아주 쉽게 잊는다. 신기하게도 나쁜 것은 잘 기억하는데 좋은 것은 잘 잊는다. 아마도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잘 해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잘못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누가 나에게 잘 해준 것은 그런가보다 하면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말을 하면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꺼내서 그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인관 관계에 대해서 “항상 잘해주면 안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잘해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면 한번 잘못하면 그걸로 정말 나쁜 사람이 되지만, 잘안해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면 한번 잘하면 그걸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죄의 소원이 있어도 우리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항상 은혜는 잊고 원수는 갚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정반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택을, 그 모든 은택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말한다. 아무리 우리의 성향에 반대되는 것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나에게 있는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명기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 것을 계속해서 당부하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경고한다.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크고 견고한 성읍도 아니고 거대한 용사들도 아니었다. 그 땅에 잘 적응할지도 아니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분의 은택을 잊는 것이었다.

8:11–20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노력했고 그 결과로 이 모든 좋은 것들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셨던 적이 있다(눅 17:11-19).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 자체는 어떤 면에서 보면 그리 특별하지 않다. 1명이 아니라 10명이라고 해도 그렇다.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한 주된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10명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데 있지 않고, 그 나병환자 10명이 그런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강조하려는데 있다.

10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절)라며 병고침을 구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명하셨다. 그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던 나병환자들은 모두 깨끗함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일했다. 차이가 생긴 때는 그들이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은 직후였다. 10명 중 단 한 사람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다(16절).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상황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17:17–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보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먼저 언급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사하며 예배한 사람을 칭찬하시기 보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만큼 예배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로마서 1장은 인류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우리가 그 영원히 찬송 받으실 하나님께 올바르게 반응하지 않는 것, 즉 예배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예수님도, 돌아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린 옛나병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구원은 육체의 질병이 낫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미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은 육신의 치유는 경험했지만 영혼의 치유는 경험하지 못했다. 오직 영혼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만이 참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영원한 찬송을 받으셔야하며 우리가 그렇게 해야한다. 그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 무엇도 내 손으로 이루었고 쟁취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을 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것이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