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들은, 그리고 우리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1

본문: 시편 106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4권의 마지막 4편의 시는 공통적으로 예배의 시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03-105편은 구원하시는 하나님, 창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예배로서 매우 적절하게 느껴진다. 106편도 그 시작과 끝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언급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명하기 때문에 예배의 시편으로서 합당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중간의 주된 내용은 죄에 대한 고백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예배에 적절하지 않은 내용처럼 느껴진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어야하는데, 죄에 대한 고백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받은 죄사함을 강조하는 예배가 익숙한 경우 더 그렇다. 시편 103편처럼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3절)나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2절)와 같이 고백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106편처럼 현재나 과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어색하다. 사실 더 나아가서 어색한 것 이상으로 이미 해결된 죄를 예배 시간에 언급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와 같은 피조물들의 올바른 반응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는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감사한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듣는다. 이것이 설교 시간도 단순히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예배 시간인 이유다. 또한 같은 이유로 단순히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삶을 산다. 이것이 우리 삶도 예배인 이유다. 하나님께 올바르게(합당하게) 반응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 그것이 예배다.

이런 면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예배의 행위가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자연스럽게 나의 죄악됨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전에 가득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이사야의 첫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였다. 그리고 그의 이어지는 말을 보면 왜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가 되는지를 알 수 있다.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는 그저 형식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말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았을 때 망할 수 밖에 없는 자임을 알았다. 그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자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자신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 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사야의 죄에 대한 고백은 왕이신 하나님을 더욱 높이는 예배였다.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압도된 자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가나안 정탐꾼들이 그 땅의 사람들을 보고 스스로 메뚜기 같았다고 표현했던 것과 유사하다. 광활한 우주 앞에서, 거대한 산이나 협곡, 바다 앞에서 우리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 나오는 감탄의 말들과도 유사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이나 심지어 우주와도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죄에 대한 고백도 깊어질 것이다.

“성경에서 죄는 크든 작든 단순히 도덕적 실패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부르시는지와 실제 우리 모습 사이의 ‘차이’다.” – Robert Davidson, The Vitality of Worship, 347

따라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이 차이를 인정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한 고백은 예배에 있어서, 특히 예배의 시작에 있어서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여러 예배에서도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고, 교회가 시작된 후로 예배가 형식을 갖출 때, 죄에 대한 고백은 항상 한 자리를 차지했다.

아무리 죄사함을 받은 자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스스로 ‘완벽한 의인’인 것처럼, 마치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설 수는 없는 것이다. 법적으로, 신분적으로는 의인이라는 것을 알아도 내 삶이 그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예배자는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탕자의 심정으로 예배의 자리로 온다. 참회하고 통회하는 심정이지만 동시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다. ‘용서받은 죄인,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고 다시 한번 죄용서의 확신을 얻는다. 이것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등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편 106편이 바로 그런 예배의 시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의 시작과 끝이 동일하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자신들의 조상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또한 자신들의 현재를 돌아보며 죄를 고백한다.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그 모든 죄악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를 묵상하는 것이다.

시편 105편은 ‘하나님의 기억하심’으로, 즉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심으로 그 백성이 약속의 땅에 살게 되었음을 묵상하며 힘을 얻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편이었다. 반면, 106편은 ‘백성의 기억하지 않음’으로, 즉 백성들이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지 않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사실을 묵상한다. 특히 47절의 기도는 이 시편의 배경이 바벨론 포로기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면에서 시편 106편은 아삽의 시편인 78편과 유사하다. 다만 78편은 궁극적으로 백성들을 경고하고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면, 106편은 그보다는 여전히 예배에 그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책망보다는 회개로, 또한 찬양과 감사로, 그리고 현재의 간구로 그 내용이 이어진다. 따라서 이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 속에서 나의 실패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경각심을 가질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여전히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48절로 구성된 긴 시편이고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6-46절이 바로 자신들의 죄에 대한 묵상이자 고백이다. 먼저 이 부분의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고,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인 찬양, 교훈, 간구의 내용을 나머지 구절들을 통해 살펴보자.

고백

시편 기자는 먼저 이어질 모든 역사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요약했다.

106:6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이 시편을 기록한 저자는 지금부터 기록할 역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의 역사나 지금 자신들의 역사나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조상들처럼”이라고 번역되었지만,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의 조상들과 함께”다. 각 세대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하나의 큰 공동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구원하신 것이 곧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기도 한 것처럼, 조상들의 죄도 곧 우리의 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도 그들과 같은 죄를 우리도 짓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그들’의 죄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런 죄의 원인은 ‘기억하지 않은 것’이다. 7절은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13절은 그가 행하신 일들을 곧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21절은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곧 죄의 시작이다.

그럼 그런 죄의 결과는 무엇일까? 7절부터 시편 기자는 출애굽기에서 시작해서 사사기까지 있었던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기록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애굽, 광야, 호렙(시내산), 가나안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단락으로 보면 총 8종류의 죄가 언급되어 있고, 그런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죄에 관계 없이 구원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징계하기도 하시고, 심판하기도 하셨다. 오래 참기도 하셨다. 4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죄에 대해서도 인자하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애굽에서(7-12절)

#1 두려움(7-12절)

106:7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건은 출애굽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 큰 이적을 행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다. 10개의 재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에게 분명히 드러냈다. 하나님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보다 강하신 분이셨다. 애굽 사람들이 신이라고 믿고 섬겼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은 강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 재앙 속에서도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별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있는지도 분명히 알게 하셨다.

그렇게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바로의 군대가 그들을 쫓아왔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하나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 두려운 상황까지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을 믿고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께서 그동안 그들에게 하신 일들을 다 부정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이 되어 버렸다. 지금 눈 앞의 상황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어려움을 만나면, 단순히 현재의 상황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을 넘어서 그 두려움 때문에 그동안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푸셨던 모든 은혜를 다 잊고 부정하는 것이다. 애초에 하나님을 몰랐으면 더 좋았겠다거나,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의미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두려움의 죄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106:8–11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9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10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11그들의 대적들은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와 관계 없이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리고 이 말대로 되었다. 시편 106:8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다.

14:17–18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뒤쫓아온 애굽의 군대를 멸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 모두가 하나님이 참된 신이신 줄 알게 되었다.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106:12 이에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

같은 내용을 모세는 이렇게 기록했다.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그리고 15장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른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능력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찬양했던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믿음이 경험보다 먼저 오지 못했다는데 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과 그들에게 베푸셨던 인자를 기억하고, 평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믿음과 경험의 올바른 순서다.

그렇기 때문에 홍해를 건넌직후 백성들이 보인 믿음과 찬양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참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기적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다. 그 즉시는 기쁨으로 반응하지만 뿌리가 없어서 또 다른 환난이나 박해가 있을 때는 넘어진다. 그 믿음 없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후 모습을 보면 전체적으로는 이런 모습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환난이나 박해가 있을 때 넘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받지 않은 증거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경험은 그 믿음을 더 곤고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지, 경험이 믿음을 만들어내면 안된다. 믿는 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내가 이렇게 할게요’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이런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역사는 궁극적으로는 같은 죄의 반복이기도 하다. 즉, 불신의 죄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로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일들이 ‘불신’으로 인해서 의미 없는 일들이 되어 버렸다는 의미인 것이다.

광야에서 호렙까지(13-23절)

#2 욕심(13-15절)

여기서는 욕심의 죄가 언급되어 있다.

106:13–14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구체적으로 사건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의 여러 사건이 여기서 말하는 죄에 포함될 수 있지만, ‘욕심’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민수기 11장에 기록된 메추라기 사건이 그 배경일 것이다.

11:4–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하나님은 때에 따라 물을 주기도 하셨고 매일 만나를 내려서 먹이기도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며 불평했다. 애굽에서는 훨씬 잘 먹었다며 원망했다. 13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행하셨는지를 너무나 빠르게 잊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이런 죄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원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할 때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원망과 불평으로 나온다. 욕심의 죄는 우리의 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106: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기를 주셨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징계에 더 가까웠다. 하나님은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하셨을 뿐 아니라, 재앙으로 그들을 치셨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은 “기브롯 핫다아와”가 되었는데, 이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하였다고 기록했다(민 11:34).

하나님을 잊은 자들을 때로 하나님은 이렇게 징계하셨다. 죄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목적도 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기도 하신다.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려고 징계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사건을 통해 욕심이 죄라는 것을 배워야 했고,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하나님의 시간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도 죄의 문제다.

#3 질투(16-18절)

106:16 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

여기서 언급하는 사건은 민수기 16-17장에 기록된 고라가 주도한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한 도전이다.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고라를 비롯한 반역 세력은 마치 모세와 아론만 특권을 누려서는 안되고 모든 회중이 동등해야할 것을 주장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바로 그 모세와 아론의 자리에 앉고 싶었을 뿐이다.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질투심이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력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106:17–18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고 18불이 그들의 당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들을 살랐도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주동자 중 고라는 언급하지 않고 다단과 아비람만을 언급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후에는 고라 자손이 예배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알 수 없다. 사실 여기서 뺀다고 해도 이미 성경의 다른 부분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반역자들을 즉각 심판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력에 대한 도전을 하나님은 심각한 죄로 보셨던 것이다. 그 죄 자체가 악한 것도 있지만 그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매우 크고 심각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렇기 때문에 ‘주의 종’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판의 말을 하거나 그 말에 반대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고라의 경우, 실제로 모세나 아론에게 어떤 죄의 문제가 있고 그것을 사랑으로 지적한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면책특권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자신이 책망 받을만한 일이 없는지 스스로 살펴야 한다.

고라 무리는 질투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무너뜨리려고 했었고 그것이 죄였다. 그저 그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죄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죄였고, 하나님은 즉각적인 심판으로 그 죄를 제거하셨다.

어쩌면 앞에 언급한 두 죄악에 비해 질투의 죄에 대해서는 좀 자유롭다고 느껴질 수 있다. 교회에서 리더의 자리를 질투하거나 하는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질투의 죄는 매우 흔하다. 그리고 질투는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당을 짓게 만들어서 결국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온다. 작게는 몇 명의 친구 사이에 편이 생기는 것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교회를 나누는 죄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이 질투이고 그 죄를 하나님은 결코 가볍게 보지 않으심을 알아야 한다.

 

중간 정리

우리는 남의 죄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자기 죄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길 좋아한다.

하지만 오늘 시편은 정확히 그 반대의 일을 한다. 시편 기자는 남의 죄라고 할 수 있는 조상들의 죄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그저 남의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죄가 곧 자신의 죄이며 우리의 죄라고 말한다. 그래서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감이 아니라, 절대적인 도덕적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태도는 뒤의 말씀을 통해서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세상의 죄, 우리 주변의 죄를 보는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바리새인처럼 “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약 세리의 죄가 보인다면, 나에게도 그런 죄가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아마 꽤 높은 확률은 같은 죄가 나에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빌라도에 의해 해를 당한 갈릴리 사람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의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경고하셨다(눅 13:1-5). 남을 판단할 때가 아니고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먼저는 나의 죄를 봐야 하고 나의 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질투에서 시작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받아 땅에 삼켜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욕심으로 하나님을 시험했던, 그래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과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도 그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이 도덕적 무력감이 참된 예배의 시작이다. 그것이 곧 성경이 말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셔서 의인이라고 선포하신 것이지 의인인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죄인인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옷 입혀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크시다고 우리가 자랑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선포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고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남의 죄가 아니라 내 죄에 대해서 말하고, 그런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라. 그것이 용서받은 죄인인 우리가 드리는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