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잘 알듯이 야고보서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의 증거로 행함을 보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옆에 베드로가 있었다면 그는 그 모든 행함의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야고보 역시 그것을 전제로 야고보서를 쓴 것입니다. 시험 중에 기쁘게 여기는 것도, 성도들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도, 혀를 통제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행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에 대한 마땅한 반응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이 어떻게 형제 자매들에게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거짓 없는 형제 사랑’입니다.

본문 말씀은 ‘거짓 없는 형제 사랑’에 대해 세 가지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근거이고, 둘째는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명령이며, 셋째는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동기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대부분 거짓된 사랑입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랑,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한 사랑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위선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거짓 없는”이라는 말은 가식이나 위선이 없는 것으로,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주로 사랑과 함께 쓰였는데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롬 12:9), “거짓 없는 사랑과”(고후 6:6),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외식적이지 않고 진실한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한국에 잠깐 머물기 위해 당신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가 “당신 집에 며칠 묵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낯선 사람의 요청에 아마 당황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그를 집에 데려와 머물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와 자매는 난생 처음 보았다 하더라도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을 향해서는 어떤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이 그 마음에 형제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근거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언제 생겨났을까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22절). 이러한 사랑은 태어날 때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복음)에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함을 얻었을 때 생긴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고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1:2).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이 예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영혼을 깨끗이 하는 일과 형제에 대한 거짓 없는 사랑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자신에게 형제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구원받은 사실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반대로 형제 자매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존재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거듭난 사람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딛 2:14). 우리를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 성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1-2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하게 소망을 붙들 수 있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흥미롭게도 신약성경에서는 거짓 없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안에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살 4:9)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명령

그렇다면 거짓 없는 형제 사랑에 대해 어떤 명령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모습입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절). 이 말씀에는 짧지만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으로 사랑하라’입니다.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은 새롭게 변화된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하나님은 새 영, 새 마음을 넣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새 마음에서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진실하고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랑, 외식적인 사랑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손익을 계산해서 유익이 될 때 사랑을 베풀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하며 사랑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순수한 마음, 그의 유익을 위하고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인 것입니다.

또한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명령은, “뜨겁게 사랑하라”입니다. 여기서 “뜨겁게”는 ‘열렬하고 격렬하게’라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단어는 성경에 총 3번 나오는데 한 번은 사도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데서 사용했습니다. 또 한 번은 누가복음 22:44에서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의 “간절히”가 이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간절하게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처럼, 성도가 옥에 갇혔을 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간절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최소한의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대한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경로 중에, 하나님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것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듯이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사랑하기 위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 많은 비방을 당합니다. 게다가 사단은 밤낮으로 형제 자매를 참소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형제 자매 사이에 미지근하고 게으른 사랑만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은 세상의 사랑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사랑보다 열렬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썼습니다. 예전 우리 성도님들도 밭에서 나오는 것을 성도들과 나누고 수시로 방문하며 삶을 다 해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열렬하고 격렬하며 뜨거운 사랑을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향한 첫사랑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큰 문제는 저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 ‘왜 나를 초대하지 않느냐’라며 저마다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말합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욱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랑해야 할 책임이 인도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자가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명령은 인도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인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모든 성도가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하나님 집에서의 삶’이라는 책에서는 ‘모든 교회의 지체는 사실상 전임사역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주일에 잠깐 만나 얘기하고 떠나는 곳이라면 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 모습입니까. 교회는 그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책임지고 사랑해야 할 성도가 존재합니다. 여러분 현재 어떤 성도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어떤 가정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시며, 어떤 가정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주일마다 사랑하고 섬기기로 정한 가정이 있습니까? 만일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 명령에 순종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동기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의 명령은, “마음으로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순종입니다. 저 역시 이런 사랑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입니다. 내 유익을 먼저 생각하지, 성도를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힘이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을 할 수 있는 이유와 동기는 어디에 있을까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23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썩지 않을 것, 영원한 것,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씨앗은 심으면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썩고 사라지게 됩니다. 아무리 나무가 크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24,25절). 우리의 구원과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24,25절 말씀은 이사야 40장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강한 앗수르 제국의 막대한 군사력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지만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 40:1,2). 포로 생활로 고통받고 앗수르의 억압을 받고 있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위로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고 너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것은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는 것은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며 힘 있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말하고 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합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 40:12,13),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8),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사 40:25). 앗수르 제국이 강해보이지만 그들은 풀처럼 마르고 꽃처럼 시들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27-31). 크고 전능하시고 항상 살아계신 분, 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사야서의 이 구절을 인용했을까요? 당시 소아시아 성도들도 여러 시험과 부당한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영원할 것 같고 그 권세가 끝이 없을 것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을 유익이 없다며 비웃습니다. 그들의 비방이 괴로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옳은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거짓 없이 사랑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여전히 어둠을 주관하는 마귀의 영향력 하에 있지만,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세상도 언젠가는 마르고 시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앗수르도 로마 제국도 결국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형제를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성도들 간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을 인도자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하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서 형제 자매를 뜨겁게 열렬하게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