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비방하지 말라
본문 : 야고보서 4장 11절-12절
설교자 : 조 정 의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야고보서를 공부하면서 시험을 기쁘게 여기는 것, 온전한 혀, 차별하지 않는 것 등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비방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는 남 얘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남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소한 이야기를 폭로하는 것을 좋아하고 약점이나 예전의 실수를 들춰내서 그 사람을 당혹하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선거철이라 뉴스나 토론방송을 보면 저마다 자신의 공약을 소개하기보다는 상대의 잘못한 것을 밝히기에 바쁩니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웹상의 댓글들을 보면 누군가를 험담하고 깎아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은 이렇듯 남의 이야기를 하고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

야고보는 본문 말씀 11절에서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있어서도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비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서 큰 적대심과 악의를 가지고 심하게 말하는 것이 비방이라고 생각합니다. 험담, 뒷담화, 뒷공론, 명예훼손, 모독, 중상모략 등 상대를 공격하고 해를 끼치기 위해 하는 말들만이 비방일까요? ‘비방’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항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악의와 적대심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 속에 악의가 분명히 있는데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인격과 평판에 해를 끼칠 목적을 가지고 말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 추측해서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정작 그 사람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습니다. 또는 사실을 과장하거나 불필요하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것에 대해 쓸데없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과장해서 몇 번 그런 것을 항상 그렇다고 정의내립니다. 그것도 비방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할 때, 비방이라는 것은 당사자가 내 앞에 있다면 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당사자가 내 앞에 있으면 왜 말하지 못할까요? 분명 그 형제가 기분 나빠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악의와 적대심이 크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비방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뒷공론의 죄만큼 성경에서 용서 없이 비난하고 있는 죄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 그러한 비방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비방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어떤 여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 해도, 그것이 사실에 입각해서 말한 것이라 해도, 나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라고 여겨져도, 야고보는 예외 없이 비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명령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야고보서에 제시한 것들 외에 다른 이유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방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롬 1:30; 딤전1:13; 엡4:31; 벧 2:1; 딤후3:2). 이것은 죄의 특성이고 구원받기 전의 상태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이러한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러한 죄에 거한다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비방은 교회의 하나됨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를 비방을 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형제들 간의 사이는 갈라지게 됩니다. 비방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던 형제 자매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가 그 말 때문에 선입견이 생겨서 역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혈로 하나되게 하는 교회를 나누고 갈라놓는 것이 비방입니다. 또한 비방은 성도를 실족시킵니다. 주님은 성도를 실족시키는(죄를 짓게 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7). 누군가를 비방할 때 그 자리에 있는 형제 자매는 그 대상자에 대해 판단과 정죄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또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역시 형제를 미워하고 분노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한 사람의 비방으로 인해 많은 다른 형제들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비방은 다름이 아닌 사탄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밤낮 하나님 앞에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들이 사단이 아닙니까(계 12:10).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면 사단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 가운데 행하신 모든 일을 역행하는 것이 바로 이 비방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셨는데, 그래서 다시 죄의 노예가 되게 하지 않고 선한 일에 힘쓰며 하나되게 하셨는데, 그러한 성도를 죄 짓게 하고 교회를 나뉘게 하며 사탄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모든 일을 역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보다 더 심각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다른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율법 그 자체를 판단하거나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형제’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따라 말도 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형제 자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비방한다면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 자체를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늦은 밤, 빨간 신호에 멈춰 서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크게 경적을 울려댄다면, 그는 멈춰서 있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신호체계 자체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형제 자매를 비방하는 것은 말씀 자체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형제 자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사람이지 그것을 정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준수해야 하는 자인 것입니다. 모든 형제 자매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마땅히 순종하고 지키는 자여야 하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고 형제 자매를 비방한다는 것은 그 법을 내가 스스로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잘 아는 형제 자매에 대해서는 지키지만, 내가 싫어하는 형제 자매에게는 지키지 않겠다고 하는 것, 이것은 율법의 준행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준행자는 오직 법을 지키는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준행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입법자와 재판관이 하는 일입니다. 입법자는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고, 재판관은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사람인데 그런 일을 하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입법자와 재판관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비방한다면, 우리 스스로 재판하거나 법을 세운다면, 곧 입법자와 재판관이 위치를 넘보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형제 자매에 대해서 비방을 시작한다면, 그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율법의 준행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리에 앉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죄의 모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반역하여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 생각하고 말씀에 거역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비방이라는 죄도 이러한 죄의 패턴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탐내고 하나님만 취하실 수 있는 자리를 내가 취하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 비방의 죄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 자매에 대한 비방하는 말이 쉽게 들립니다. 대상이 눈 앞에 없으면 쉽게 말하고 그가 바로 근처에 있어도 비방합니다. 이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그들이 여기에서(성전)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6절).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데려다 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조금씩 떠나가서 나중에는 완전히 떠나갑니다. 하나님은 계시록 2장에서 교회들에게 훈계하시면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만 찬양과 경배,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비방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마지막 질문을 기억하십시오. “네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1-25). 많은 사람들이 비방하는 이유가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억울하셨던 분이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죄를 범치 않으시고 거짓도 위협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조롱과 핍박, 모진 고난을 당하셨지만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어떤 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는 입법자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고 형제 자매를 비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순종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비방하지 않으며, 오직 유일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