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거짓믿음의 증거
본문 : 야고보서 4장 1절-10절
설교자 : 최 종 혁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서는 우리가 잘 알듯이 야고보가 ‘흩어져있는 열두 지파’에게 쓴 편지입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섞여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라지’라고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에 따르면,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지만 경건의 모습이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 믿음에 따르는 행함은 없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가르치려고 하고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니라 땅의 것, 정욕의 것, 귀신의 것인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서의 핵심은 너희가 참된 믿음에 있는지 시험해보고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는 방식에 있어서 지금까지는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것을 통해 너희 자신을 돌아봐라’라고 했다면, 이제부터 전개되는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즉, ‘이것이 거짓믿음이다. 너희가 이런 거짓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봐라’라며 부정적인 말들을 합니다. 어조에 있어서도 그동안 “내 형제들아”라고 했다면, 이제는 그런 표현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간음한 여인들아”, “죄인들아”,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편지의 대상은 거짓 믿음을 분명히 보이는 사람들, 곧 “죄인들”입니다. 6-10절에서 그들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믿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서는 그들의 죄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거짓 믿음의 증거(1-3절)

1-3절은 거짓 믿음의 증거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1-3절). 거짓 믿음의 확실한 증거는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은 인간들 사이에 있는 모든 갈등, 분쟁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그 모든 갈등의 근원은 어디에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너희들 중에” 이런 일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런 싸움과 다툼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면서 원하셨던 것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교회가 하나되는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하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어디서나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중심적 성향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면서 기도하신 것은 교회가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과 다툼은 육에 속해있다는 증거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싸움과 다툼은 싸우는 정욕에서 나옵니다. “싸우는 정욕”이라는 것은 나의 만족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 나의 욕구를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서 성공적으로 심어준 생각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려던 사람을 자기중심적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빼내고 자기 자신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우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 모든 갈등의 원인이 우리 안에 있는 나 중심적인 사고, 이기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정욕이 우리 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정욕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정욕의 지배를 받는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세상에 속해있다,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2절). 무엇인가를 원하는 마음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죄가 됩니다. 내가 뭔가를 원하는 것은 기대가 되고 그것을 마땅히 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대는 늘 충족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살해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일 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할 때가 그러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욕심을 가지고 살인하기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에 속해있다는 증거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2,3절). 내가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사람은 스스로 얻을 수 있다, 또는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령 구하더라도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합니다. 마음속의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도 그렇고 하나님께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된 인간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일입니다. 싸움과 다툼이라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나 중심적인 사고, 즉 하나님이 아닌 내가 주인이 된 마음의 상태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삶과 성품이 이러한 싸움과 다툼,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특징지어진다면 그것은 그의 거짓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짓 믿음의 모순(4-5절)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4절). 이들은 스스로 믿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맡아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특징짓는 것이 다툼과 싸움이라면 야고보는 이런 자들은 “간음한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간음은 일단 결혼의 관계를 전제로 그 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구약에서 이방인들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와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길 때 그들을 ‘간음한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간음한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는 교회에 잘 참석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세상을 추구하고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과는 원수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과 세상이 양 극단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을 추구하고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면 그는 하나님과는 멀리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 된다’는 것은 세상에 애정과 호의를 가지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과 하나님이 있는데 세상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중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이것이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믿는 자는 세상에서 택하여 낸 사람, 세상과 분리된 사람입니다. 자기들 중에 하나가 아니므로 세상 역시 믿는 자를 미워합니다. 세상에서 믿는 자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내가 세상을 못 박았을 뿐 아니라 세상이 나를 못 박은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이 믿는 자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여러분이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만족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면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입술의 고백과 상관없이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람입니다.

제 친구 중 하나가 여자 친구가 둘인데 둘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5절).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배타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이 온전한 헌신이라면, 부분적인 헌신은 헌신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라면 부분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자와 같이 세속적인 삶,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야고보는 “너희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거짓 믿음의 희망(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6절). 죄인들의 희망은 그들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것은 문제일 뿐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듣지 않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더욱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십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나의 만족과 세상을 쫓아 하나님과 멀어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일이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5).

모든 죄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절). 그 은혜는 겸손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시 66:2-4).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만족을 택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주신다,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며 하나님께 떠는 자들입니다.

 

거짓 믿음의 회개(7-10절)

이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절). 하나님의 권위 아래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순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옛 주인인 사탄을 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가까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8절). 마치 집 나간 탕자를 기다렸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절).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것이 바로 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시 24:3-6). 이렇게 회개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을까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절). 회개는 죄에 대한 인식에서 옵니다. ‘내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죄인이구나’ 생각할 때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의 문제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절). 그것은 주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때 가능합니다. 내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고 회복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때 이 말씀은 현실이 됩니다. 슬픔과 애통, 근심이 즐거움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로운 자라고 선포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죄의 문제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어디에 계십니까? 몸은 교회에 나와 계시지만 영적으로는 어디에 서 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살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데서 즐거워한다면, 그래서 싸움과 다툼을 만들어 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자신에게 거짓 믿음의 증거가 나타난다면 속히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한편으로는 구원받은 자가 죄악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은 ‘난 그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일 뿐 하늘나라에는 가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 가운데 그저 머물러 있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믿는 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힘을 주시는데, 그저 이대로 죄악 중에 살겠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시고 자신을 낮추시며,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께 나오십시오.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죄에 빠져도 이렇게 다시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