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거듭나야 할 사람(들) 4

본문: 요한복음 3장 1-21절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선포하심으로서 니고데모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만 함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니고데모에게는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억울하기도 한 말씀이셨을지 모른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실제로 전혀 없음을 알고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바리새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니고데모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고 어쩌면 이해가 되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방탕한 삶, 탐욕적인 삶, 누가봐도 죄인인 삶을 산 사람, 자기 스스로도 자기 삶을 되돌리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기가 하나님처럼 거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는 나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그동안 노력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결국 어느 쪽이든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으시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야 살 수 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어떤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았을 때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인은 살 수 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후로 니고데모가 등장하지 않고 예수님도 니고데모를 특정해서 말씀하시지는 않기 때문에, 오늘 본문인 16-21절의 말씀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성령님께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요한을 통해 기록하신 말씀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본문의 중요도를 다르게 만들지는 않는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14-15절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더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고 오늘 본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도 발견할 수 있다.

거듭남의 결과: 왜 거듭나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거듭남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셔서 ‘왜 거듭나야만 하는지’ 다시 한번 니고데모에게 도전하셨다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거듭남의 결과는 1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

사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명제에서 “거듭남”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셔서 말씀하셨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따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없으시다. 즉 거듭남의 결과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니고데모에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 되었을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도, 뭐 적당히 괜찮은 곳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확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큰 일이 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천국에는 뭔가 정말 괜찮은 상위권의 사람들이 갈 것 같고, 지옥은 정말 악한 사람들이 갈 것 같다. 그리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그 중간 어디쯤에 갈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꼭 어디서 그렇다고 들었거나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막연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굳이 고민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내세가 없어도 별로 손해볼게 없고, 혹시 내세가 있더라도 최악은 면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도 이런 모호하고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도 계시고, 천국과 지옥도 있다고 말은 하는데, 정작 천국에 갈 기쁨의 확신도 없고 지옥에 갈 것이란 두려움의 절망도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세보다 그냥 지금이 더 중요하다. 이 땅에서의 삶이 중요하다. 어쨌든 교회도 잘 나오고 하라는 것들은 다 했으니, 내세에 대해 보험은 들어놓은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산다.

혹시 이런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의 결과에 주목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간략히 말씀하셨지만 16절에서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니고데모를 비롯한 우리 모든 사람들(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도 각자의 노력에 따라 적당히 괜찮은 곳에서 영원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멸망’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삶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정확히 둘로 나뉘고 그 결과도 둘로 나뉜다. 거듭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영생과 멸망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세상에는 넓은 길과 좁은 길 밖에 없다.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고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한다. 우리 모두는 둘 중 한 길에 속해 있고 둘 중 한 끝에 도달하게 된다. 멸망이든 생명이든 둘 중 하나인 것이다. 다른 결과는 없다. 즉,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는 ‘그래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멸망을 향해 하고 있어”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던 서기관이 있었다(막 12:28).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어떤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낫다며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막 12:34).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니! 좋은 말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문 앞에 있든지 거기서 수천 km를 떨어져 있든지 똑같다. 똑같이 멸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서기관은 아직 그 끝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가 바른 지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그의 삶의 끝에 예수님에게서 들을 말이 여전히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면, 그만큼 비참하고 억울한 삶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는 갔지만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면, 영생이 아닌 멸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의 삶을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마감해야했던 범죄자(강도)가 있었다. 그는 함께 못박힌 예수님을 처음에는 욕하고 조롱했지만, 예수님이 의로운 분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알고 예수님께 이렇게 구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 강도는 예수님을 왕이신 메시야로서 영접했던 것이다. 그에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하셨다(눅 23:43).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로 이 강도를 들어오게 하신 것이다. 아마 역사상 가장 편안하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일 것이다. 죽음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영생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거듭나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거듭남의 결과다. 니고데모와 같은 선한 삶과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의 결과가 아니다. 서기관과 같은 바른 지식과 태도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거듭난 사람만이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요한복음 17:3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이 영생이다. ‘겨우 그게 영생이라고?’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게 전부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진리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가 참된 삶을 살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모르고 산다는데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알고 그로 인해 기뻐하는 참된 삶이다.

16절 전반부의 말씀은 이런 결과를 만든 동기와 방법에 대해서 말씀한다.

먼저, 동기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때로 성경은 “세상”을 ‘세상(이 땅, 죄)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할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여기서 세상은 사람들이다. 디도서 3:4은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구원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와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들은 이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천사조차도 이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천사를 구원하기 위해 천사의 모습을 입지 않으셨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을 입으셨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한다.

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다. 타락 이전의 사람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사람들도 사랑하셨다.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셨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부정한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 자들을 사랑하셨다.

따라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 그들을 전부 심판하기로 결정하실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기를 선택하셨다. 사람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사랑하기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사랑하셨다. 민족도 상관없다. 신체 조건도 상관없고 지식이나 인격도 상관없다. 앞서 봤던 서기관과 강도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얼마나 착하고 선하게 살았는지도 상관없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다. 사랑 받은 대상의 수가 이 사랑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랑 받은 대상이 어떤 자인지가 이 사랑의 크기를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단 한 사람만 사랑하셨다고 해도 이 사랑은 크고 위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받은 자들 중 누구도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심판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셨다는 것 외에는 이 사랑에 어떤 이유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시면서 이 사랑의 정도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독생자를 주실” 정도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시고 그 사랑을 나타낼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유일한 분을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무한히 확장한다.

하나님은 어떤 손해나 희생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멀리서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하셨으면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분이 아니신가.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기 원하셨다. 증명하기 원하셨다. 우리가 그 사랑을 보고 알기를 원하셨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와 다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생명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통해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선택하신 방법이다.

17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신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굳이 여기서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는 말씀이 추가된 이유는 그것이 유대인들이 메시야가 해야할 일로서 기대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 예언된 이 말씀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보고 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하지만 2000년 전에 오셨을 때는 아니었다. 그때는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복음이 바로 이것이다.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죄에서 시작한다. 멸망받아야할 우리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로 선택하신 은혜로 이어진다. 또한 그 사랑을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 보이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 앞에 놀라운 하나님의 초청장이 펼쳐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어떤 죄인도 상관없다.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선하게 산 사람이 멸망할 수 있고 도리어 악하게 산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이 아이러니를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공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전히 자기 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영적인 무지와 교만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절대적인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선하게 살지 못했다. 모두가 죄인이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18절을 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절)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사람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보이지만 앞으로 어쨌든 심판을 받을거니까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았다.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이 부류에 속해 있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산다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인 중립 상태에 있지 않다. 이미 죄인이다.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멸망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죄에 대한 결과는 사망임을 하나님은 처음 사람 아담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니고데모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로 이미 심판을 받은 자들이다. 형의 집행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36절에서도 비슷하게 이렇게 말한다.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아들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남아 있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심판이 죄인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그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누구도 중립의 상태에 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렇다. 애초에 넓은 길에 우리가 모두 서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명령하셨지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애초에 우리는 넓은 문에 들어 서서 넓은 길을 따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멸망을 향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14절의 예시를 가져오면 우리는 모두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잘 피하면 불뱀에 물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좀 덜 물리면 괜찮고 그랬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 가고 있고 거기서 우릴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우린 모두 넓은 길을 따라 멸망으로 가고 있고, 거기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따라 가야하는 상황이다.

우린 모두 이미 심판을 받았고 이 심판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고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누구도 억울하게 멸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우쭐대며 영생을 얻지 않는다.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예수님의 표현에서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 예수님은 “믿는 자”를 말씀하실 때 계속해서 ‘현재형’을 사용하셨다는 점이다. 즉, 믿은 자, 믿었던 자와 같은 과거형이나 혹은 믿을 자와 같은 미래형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믿고 구원 받았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구원 받게 하는 ‘믿음’은 과거의 단회적인 결정이 아닌 것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믿음 자체는 계속되어야 한다. 한번 믿었으면 그걸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고 구원 받는 일은 반복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이 또 거듭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믿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그 사람의 특징이 되고 그 삶의 특징이 된다.

19-21절에서 예수님은 그런 차이를 말씀하신다.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19-20절)

여기서 예수님은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차이를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에 온 빛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12). 또한 요한은 1:9에서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빛이시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은 진리의 빛을 비추셔서 사람들의 행위를 드러내신다. 악은 악으로 드러내시고 선은 선으로 드러내신다. 이것이 19절에서 말하는 “정죄”의 의미다. 예수님의 빛을 통해 사람들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빛이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든지 혹은 반대로 예수님께로 나아오든지다.

빛에게서 멀어지려는 자의 마음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악한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음과 동시에 그런 행위는 계속 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행위가 죄로서 드러나길 원하지 않고 그것을 감추고자 한다. 그래서 어둠을 더 사랑한다. 빛을 미워한다. 따라서 빛으로 오지 않는다.

결국 죄인이 원하는 것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죄인들이 언제나 가장 악한 일을 찾아서 그런 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원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리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빛은 거부한다. 부정한다. 어두운 세상을 원한다. 죄가 죄인지 누구도 모르는 그런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거짓을 진리로 말하는 그런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왔고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더 깊은 어둠을 향해, 멸망을 향해 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빛을 비추셔서 눈을 밝게 한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들은 거짓이 아닌 진리를 따른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1절)

이들은 계속해서 진리를 따른다. 그러기 위해 빛으로 나아온다. 요한일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빛 가운데 사는 것이다.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죄를 죄라고 인정한다. 진리를 알기 원하고 거짓을 버리기 원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그에게 빛을 비추셨고,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셔서, 이제는 거듭난 자로서 거듭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이 말씀은 또 한번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어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자신은 죄를 사랑하거나 어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는 예수님은 니고데모도 잘 아셨다. 안타깝지만 거듭나지 않은 그는 어둠에 속해 있고 어둠을 사랑하는 죄인이었다. 그는 거듭나야 했고 예수님은 지금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빛을 비추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결국 니고데모는 빛으로 나아왔다. 진리를 따르는 그의 삶은 그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신 것이다.

이제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아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거듭나야할 사람들인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처음에도 말했던 것처럼, 둘 중의 하나에 우리는 속해 있다. 영생에 속해 있든지 멸망에 속해 있다. 빛에 속해 있지 않다면 어둠에 속해 있는 것이다. 누구도 회색 지대에 있지 않다.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지금의 삶이 괜찮을 수 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없어도, 영생의 소망이 없어도, 딱히 지금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하는데 굳이 거듭나야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 모든 생각의 중심에 ‘지금’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말 지금은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이후의 삶이 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 지금 믿지 않으면 지금 이후의 모든 삶이 결코 괜찮지 않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너는 멸망을 향해 하고 있어”라고 이 말씀을 통해 경고해주고 계신다. 당신에게 빛을 비추고 계신다. 그 빛으로부터 도망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면, 나의 삶은 생명이 없는 죽은 삶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길 바란다.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거듭남의 은혜를, 영생의 선물을 주실 것이다.

이미 거듭남의 은혜를 누리고 영생의 소망을 가졌다면,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빛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성경의 복음을 바르게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만 말하면서 반쪽 자리 잘못된 복음을 전하지 말라. 하나님 믿으면 혹은 교회 다니면 뭐도 잘되고 뭐도 잘된다는 미신을 전하지 말라.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가 시험을 잘 보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힘든 세상에서 위안 좀 얻으면서 살라고 하신 것도 아니다. 더 나은 내가 되고 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도 아니다. 혹은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하신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말로 이런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어쩌면 삶으로 이런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슬퍼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이 모든 일을 하셨다. 그렇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그런 복음을 전하지도 말라. 우리의 차거나 미지근한 삶으로 복음을 흐리게 하거나 가리지 말자.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고 그 영원을 이미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거듭나야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거듭난 사람들이다. 그에 합당한 삶으로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꾼 이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을 주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높이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