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행하는 능력: 나를 교훈하고 내 삶을 의로 교육하여 새 사람을 입게 하는 능력

성령은 내 영혼을 공격하는 악의 영향력과 싸울 뿐 아니라 충만한 능력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성경은 성령이 맺는 열매를 소개하는데 이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다(갈 5:22-23). 복음의 능력은 직장에서 일하는 내가 죄를 이기게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도록 돕는다. 직장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이와 같은 선을 행하도록 일하고 계시는가? 나는 어떻게 성령이 나를 교훈하고 내 삶을 의로 교육할 때 순종함으로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을까?

사랑과 희락

사랑은 참 포괄적인 개념이다. 예수님은 613개나 되는 율법의 조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성령의 열매 대부분이 사랑의 커다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은 기쁨을 주고 사랑은 평안을 가져오며 사랑하기 때문에 온유함으로 양선과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기 때문에 충성하고 절제한다. 사랑은 또한 구원받은 자의 증거이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요일 4:7). 하나님을 알면 사랑한다. 

현대 사회는 사랑의 감정적, 정서적 요소를 극대화 시켰다. 사랑은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정의하는 사랑은 모두 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은 의지적이고 헌신적인 행동이다. 느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느끼는 것이다.

희락은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기쁨은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전 2:26)

사랑과 희락은 구원받은 자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직장생활 가운데 어떻게 사랑과 희락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사랑하기에 사회는 너무 경쟁 구도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고 기뻐하기엔 염려할 일이 너무 많다.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어떻게 사랑할까?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없을 때 어떻게 희락을 맺을 수 있나?

복음의 능력은 불가능해 보이는 그 순간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위의 말씀에서 각각 주어진 명령 앞에 붙은 조건을 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주 안에서”. 우리에겐 사랑할 이유가 충분하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다. 주 안에서 희락이 넘치기 때문이다.

가령 회사에서 나를 괴롭히는 상사를 떠올려 보라. 도저히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서 피하고 있고 미워하지 않는 것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헤아리게 한다. 그리스도가 언제 나를 사랑하셨나? 내가 원수 되었을 때, 아직 악할 때, 죄인 되었을 때가 아닌가? (롬 5:6-10). 그리스도가 어떻게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나?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지 않았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욕을 욕으로 되갚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 앞에서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나? (벧전 2:23-24).

그 사랑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를 아는 자는 사랑할 수 있다(엡 3:19). 용서할 수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품을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의 연약함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한계에 부딪힐 수 있고 상대방이 가진 죄가 너무 커서 사랑하기 힘들 수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온 세상의 죄를 덮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에 능력이 없거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아직 그 사랑의 진짜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남들이 다 승진하는데 나는 제자리다. 봉급이 깎이거나 시골구석으로 좌천되었다. 회사에서 잘릴 위기에 처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가?

복음의 능력은 희락을 능히 맺을 수 있다. “주 안에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잠시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기 위해 다니는 회사에서 떨어져 나가도 나에겐 나의 필요를 아시고 성실하게 공급하실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 아버지는 나에게 영원한 하늘나라 기업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봉급도 깎이지 않고 해고될 위기도 전혀 없는 영원한 기업이 나의 것으로 보장되어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할 이유는 이 땅의 그 어떤 이유로도 사라지지 않는다(벧전 1:4).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과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 성령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썩어질 것에 의해 기쁨을 잃거나 사랑할 힘을 잃어버려도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우리는 “주 안에서” 언제나 사랑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

 

화평과 오래 참음

화평은 내 마음속에 주어지는 평안이기도 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누리는 화목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참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오래 참음은 사랑의 속성 중 하나로(고전 13) 하나님의 속성에서 비롯된다(출 34:6; 민 14:18). 그리스도는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이 오래 참음의 본이 되셨다.

그러내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직장 생활 가운데 어떻게 하면 이 화평과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어떤 것도 나에게 불안을 가져오거나 내 안에서 염려가 피어오르지 않도록 막을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평안을 깨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의 화목한 관계에 담이 세워지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까?

복음의 능력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 나를 위해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 나의 구원을 하늘에 간직하시고 지금 나를 보호하고 계시는 성부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세상도, 마귀도,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직장에서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장애물이 생기거나 외부 환경의 변화를 만나면 평안을 잃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나를 붙들고 계신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아무리 내가 흔들린다 하더라도 평안을 잃어버릴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안전하다. 그 어떤 장애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떠져 내 뒤에 내 앞에 내 위에 계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윗처럼 담대하게 골리앗 앞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직장에서 인내할 수 있을까? 직장 동료의 비방, 상사의 괴롭힘, 멸시, 조롱, 불합리한 직장의 환경, 불공정한 처사에 어떻게 오래 참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온 우주의 유일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하나님에게 사각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겐 밤도 없다. 가장 공의롭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판결하실 것이다. 심판하실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고 있다(계 22:12).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고유 권리인 심판의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요구하신 오래 참음과 사랑의 자리를 택하는 것으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래 참으라. 무조건 아무런 조건 없이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우리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오래 참으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약 1:4).

 

자비와 양선 그리고 온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그분을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고후 1:3). 만일 하나님이 자비롭지 않으셨다면 죄인인 우리를 위해 선을 베풀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말할 때 성경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을 함께 이야기 한다(엡 2:7). 다윗은 죄 용서함을 구하면서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구한다(시 51:1).

자비는 구원받은 우리가 풍성히 맛본 하나님의 성품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아버지를 닮은 자비를 내시기 원하신다. 우리의 직장 생활 가운데 그 신성이 드러나기 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겸손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존 맥아더는 자비(gentleness/kindness)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한 자상한 배려로 주가 모든 신자를 대하시듯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싶은 갈망”이라고 말한다(스터디바이블, 1382p). 우리는 주가 입으신 자비의 옷을 입어야 한다. 사랑받는 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자비를 맛본 자처럼 말해야 한다.

양선이라는 말은 조금 어렵다. 오늘날 잘 쓰지 않는 단어다. 영어로는 goodness인데 이는 이타적인 사랑을 말한다. ESV스터디 바이블에서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유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2307p). 어떤 면에서 양선은 자비와 닮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자상한 배려는 보통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표현된다.

여기에 온유함은 필수적이다. 온유는 겸손에서 시작하는 개념인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존 맥아더는 “모든 불쾌한 상황에서도 복수나 보복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전혀 품지 않고 오히려 참을성을 가지고 순종하는 겸손하고 양순한 태도”라고 정의한다(스터디바이블, 1382p). 오래 참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양식이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에는 겸손이 자리 잡는다. 온유란 겸손에서 뿌리내려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다. 자비와 양선 그리고 온유는 이렇게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진 열매다. 겸손히 사랑하는 자는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요소와 관계없이 이타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배려와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직장에서 어떻게 이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자비와 온유를 옷 입을 수 있을까? 세상의 법은 참 냉철하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과 손해가 되는 사람으로 나누고 이득이 될 때만 잘해주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한다. 손해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권한다. 자기의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것 세상도 인정한다. 하지만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건 유약한 모습이고 굳이 겸손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기를 펴야 인정받는 사회다. 이 모든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자비와 온유와 양선을 피울 수 있을까?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복음을 기억나게 하신다. 주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린 자비의 풍성하심을 헤아리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희생적으로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는지 되새기게 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우리 안에 시작된 사랑은 먼저 그가 보여주신 그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요일 4:19).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배우라고 하신다.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신다(마 11:29). 온 세상의 창조주요 주인 되신 그분이 우리와 같은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보이신 삶을 떠올려 보라. 말 구유에 나신 온유하신 주는 겸손히 나귀를 타셨고 죄인과 같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분께 배우자. 그분을 따르자. 바울처럼 내가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충성과 절제

게으름과 나태함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어리석음에서 튀어나온 죄라면 충성과 절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에게서 발견되는 성령의 열매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는 충성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일을 맡기신 분은 직장 상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종들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 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5-7)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을 발견한다. 종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은 육체의 상전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우리의 밥줄을 쥐고 있을 수 있고 사회적인 규율 아래 어떤 억압이나 압력을 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두려움과 떨림”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다. 주님은 육체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뿐만 아니라 영혼도 영원한 지옥에 던질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몸과 영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 주인이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주인이 맡겨주신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거기서 충성과 절제가 시작된다.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다(마 25). 비유의 핵심은 주인과 주인의 일을 맡아 일하는 청지기의 관계에 있었다. 주인은 종들이 어떻게 일했는지 계수하면서 잘한 종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했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가 말하는 핵심을 잘 파악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충성하는데 절제는 반드시 요구된다. 절제 없이 어떤 일에 충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일을 목표로 충성스럽게 훈련을 할 때 그 과정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충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군인이 나라를 충성스럽게 지켰다고 말할 때 그는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사욕을 절제하면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충성스럽게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우리는 충성을 다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할 수 있다. 눈가림만 해서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쉽다. 기쁜 마음으로 일하지 않고 사적으로 시간을 사용하고 회사의 물건들을 사용하면서 괜찮은 직장인처럼 평가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상사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다 아신다.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직장에서 어떻게 절제하고 있는지 얼마나 충성스럽게 일하고 있는지 아신다. 거꾸로 말해서 육체의 상전은 몰라줄지라도 하나님은 아신다.

충성과 절제는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겁에 질려 나오는 열매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과 희생에 감격한 우리가 그분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보이는 충절이다. 요한복음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말씀하고 순종하며 죽는 것을 택하시는 철저한 순종의 삶을 보라. 그리스도의 절제는 어떠한가?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삶을 사셨다. 누리지 않고 가지지 않고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이셨다. 사도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소개한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종이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종은 주인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충성과 절제는 우리가 반드시 삶으로 맺어야 하는 고귀한 열매다. 당신의 직장 생활 가운데 어떻게 그 열매를 맺을 것인가?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은 충성스러운가? 당신의 일터에서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종으로 일하기 위해 무엇을 절제하고 있는가?

 

결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상생활 가운데 무엇이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특히 일터에서 어떻게 믿는 자처럼 살 수 있는지 알지 못하여 의문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장 동료에게 전하는 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대화할 기회를 찾지 못하면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말로 전하는 것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면서 그분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죄를 이기며 선을 행하는 삶을 통해 보인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짠맛, 성화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이뤄진다. 

성령께서 당신의 삶 가운데 이와 같은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 직장생활 가운데 당신을 통해 사랑과 희락을 맺기 원하신다. 주변 환경이나 사람에 좌지우지되는 사랑과 기쁨이 아닌 주 안에서 누리는 변치 않는 사랑과 기쁨이다. 

당신의 일터에서 성령님은 화평과 오래 참음을 맺기 원하신다.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 없는 평안, 그러나 당신은 주 안에서 풍성히 누리는 그 평안을 베풀기 원하신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권자를 아버지로 모신 당신의 삶에서 오래 참음을 보기 원하신다.

성령은 또한 당신의 직장에서 당신이 자비롭고 온유하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자비와 온유의 옷을 입고 일하기 원하신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당신이 충성스러운 일꾼이기를 원하신다. 사람 앞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절제하며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종이 되기를 권면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일을 위해 당신을 구원하셨고 아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이 일을 당신 안에서 이루고 계신다. 당신은 어찌하겠는가? 당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당신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복음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가? 당신이 일하는 그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