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이기는 능력: 내 생각을 책망하고 삶을 바르게 하여 옛 사람을 벗게 하는 능력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원인이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직장에서 우리는 ‘이 모든 악한’ 옛사람의 습성이 삶에 배어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크게 다섯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는 교만이다.

교만(Pride)

우리는 ‘자부심’이나 ‘자신감’ 같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교만을 포장하려고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습성을 보인다. 직장에서 교만의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모든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태도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이나 분명히 드러난 잘못에 대해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 잘못에 대해서는 다른 이를 탓하고 교만이 말로 표현되어 비방으로 열매 맺기도 한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 엄히 경고한다. 특히 잠언은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말한다(잠 18:12). 교만하면서 잘 될 수는 없다. 자신을 높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성경에서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고를 하고도 자신을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바울이다(고전 15:9). 그가 그렇게 자신을 교만에서 멀리 떨어뜨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은 지금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자신을 하나님이 선교지로 이동시키고 회당을 찾아다니도록 만들며 담대히 복음을 외치도록 조종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수고하였으나 그 모든 힘과 지혜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위치를 제대로 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많은 것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모든 지혜와 총명을 내리시는 분이다(엡 1:8). 모든 능력이 그에게 있다(골 1:11). 우리의 체력과 건강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사 38:16). 물질을 얻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요삼 2),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전 2:24). 마지막으로 매순간 우리가 뱉고 마시는 호흡도 하나님이 주신다(사 42:5).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은 마치 플러그만 떼면 생명의 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죽게 될 사람이 스스로 생명의 근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그렇게 대단한 착각 속에 살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을 아는 자는 그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른 우리는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잠 3:6). 자만이라는 죄는 직장에서 사사건건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려고 부단히 애쓰고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야 하는 감사와 찬양을 자신에게 돌리도록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한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직장에서 사람들이 나를 높이려고 할 때, 내가 자신을 높이고 찬양하려 할 때, 높아지기 위해 독단적인 행동을 하거나 다른 이를 비방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복음을 다시 되새김질하라. 복음의 정수가 무엇인가? 낮아짐이다. 그리스도가 품으신 마음은 다름아닌 겸손의 마음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스스로 그 권리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형태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그분이 겸손의 길을 걸으셨다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이겠는가? 직장에서 먼지처럼 조그마한 교만도 우리가 품어야 할 겸손의 마음에 내려앉지 않도록 하라. 그 작은 교만이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한다. 복음에 역행하는 삶을 살게 한다.

 

탐욕(Greed)

탐욕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이다. 연봉이나 복리후생을 계산하는 것은 지혜로우나 물질주의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다. 때론 탐욕 때문에 도둑질을 할 수도 있다. 회사물건을 집으로 가져오거나 다른 이의 업적과 평판을 빼앗으려 한다. 더 많이 가진 자를 질투하여 비방하거나 더 가지지 못해서 불평한다. 어떻게 하면 더 가질 수 있을까 더 누릴 수 있을까? 더 편할 수 있을까? 염려한다. 우리는 목숨을 위하여 돈을 벌지만, 돈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때도 있다. 삶을 위해 일하나 일에 삶이 잠식된다. 탐욕이 그렇게 만든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더러운 것 중에 탐욕은 헬라어로 ‘플레오넥시아’이다. 정확히 그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탐심(플레오넥시아)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우리의 삶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그것에 달린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배고프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이 아니고 부하고 넉넉하다고 언제나 행복한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중요하고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나 삶을 형통하고 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물질보다는 하나님에게 부유한 자가 되는 것이 삶의 바른 우선순위이다. 탐심은 이를 위해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데 올바른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썩어질 물질을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과 교체하고(롬1)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물질을 두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명령한다(엡 5:3). 그것이 복음의 능력을 맛본 성도에게 마땅한 바다. 바울은 또한 탐욕이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 위에서 이미 끝이 난 옛 습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우리는 일하면서 더 가지기 위해 일할 수 있다. 물질주의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눈에 보이고 세상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재물에 따라 우리의 삶을 재단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명령을 덜 가치 있게 여기면서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눅 12:34). 직장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찰스 스윈돌은 이렇게 말했다.

돈과 세상의 모든 자원을 하나님의 위대한 천국 사업에 쏟아 부으라(신약인사이트시리즈: 누가복음, 413p)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이렇게 권면한다.

세상 것들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얻으십시오. 나중에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으려거든 버리고 싶지 않더라도 지금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십시오. 그대의 재물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교부들의 성경주해: 루카 복음서, 321p)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말한다. 너무 풍족하게 벌어서 여유가 넘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아무리 많이 벌어도 모자라고 하고 싶고 사고 싶은 것도 많다. 재물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갈급함과 배고픔을 준다. 그리고 삶을 썩어버리고 가치를 잃을 것들로 채우게 한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우리는 더는 썩을 것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된다. 썩지 아니할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다. 우리 아버지는 공중을 나는 하찮은 새 한 마리와 오늘 피었다 지는 이름 모를 들풀도 먹이고 입히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하물며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지 않겠냐”고 물으시면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롬 8:32).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 때만 필요한 재물에 전전긍긍하고 그것을 탐할 이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짐 엘리엇이 한 이 말을 기억하자.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음란과 간음(fornification, adulteries)

음란은 오늘날 포르노라는 말의 어원인 포르네이아를 가리킨다.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함을 말한다. 간음은 결혼관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적관계로서 헬라어로는 모이케아라고 한다. 직장 내에서 이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대답은 ‘그렇다’이다. 직장 내에 이러한 죄의 유혹이 만연하다. 남자직원이나 여자직원과 대화하는 내용 속에 성적인 내용이 섞일 수 있다. 남자들이 많은 사무실에서는 대화의 주제가 성적인 내용이 될 때가 적지 않다. 직장 동료를 사적으로 만나는 것은 더 깊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심지어 오피스와이프나 오피스허즈번드라는 말이 유행을 타기도 했다. 한국의 회식문화는 성적인 문제와 많은 연결고리를 갖는다. 직장에서 음란과 간음의 죄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현재 한국은 간통죄도 폐지한 상태다. 형법으로는 간음이 죄로 처벌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확고하다.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한다(살전 4:3-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포르네이아)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대할 줄 알라(간음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것이 우리를 불러내어 구원하신 목적과 관계있는가?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라(살전 4:7-8)

실로 우리는 많은 성적유혹에 노출되어 살면서 옛사람의 성적 욕망과 힘겹게 싸우고 있지만, 그 싸움은 우리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모하여 그분을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주셨다. 그 소원을 두고 하나님은 그렇게 살도록 행하신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롬 8:37).

히브리서 기자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외친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니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 강력한 성적 유혹을 이기라. 직장 내 모든 성적 유혹의 채널을 차단하라. 자리를 피하고 기회를 주지 말라. 욕망을 굶겨 죽이라. 하지만 빈방을 깨끗하게 하는 것만으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그 빈방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사모하라. 우리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시기 위해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치를 헤아려 보라.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우리 마음은 음란함이 침투할 수 없을 것이다.

 

분노, 살인-형제를 미워하는 것(요일 3:15)

화가 나는 일이 참 많다. 직장 내에서 우리가 분노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상사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라. 후임이 일하는 방식, 후임 때문에 내가 더 해야 하는 업무, 직장 내 나와 원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대립관계를 갖는 부서, 경쟁사, 거래처, 고객과의 마찰, 회사의 비상식적인 방침이나 결정…분노의 원인은 셀 수 없다. 억울하고 화가 난다. 나의 분노를 쏟아낼 곳을 찾는다. 내 속에서 타오르는 불을 어딘가에 번지게 하고 싶다. 세상은 그렇게 다 풀어내야 살 수 있다고 격려한다. 성격을 한 번 보여줘야 사람들이 쉽게 보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의 권면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길에서 바른길로 인도함을 얻을 수 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이를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이 그러하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어떻게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을 보이실 수 있는가? 해답은 주가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를 신뢰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눈앞에 두고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알지 못하거나 다 헤아릴 수 없는 억울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상 가장 억울한(죄가 전혀 없는 분의 사형) 일도 하나님의 전지하심 속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분의 공의와 정의대로 세상을 심판하신다 약속하셨다. 그러니 유일한 입법자이자 재판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화를 내며 다른 이를 정죄하고 판단하려 할 수 있겠는가?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에게 반대의 것을 하라고 명하신다. 선으로 원수를 회개하도록 만들라고 하신다. 분노하기보다는 선을 베푸는 것이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숯불을 쌓아 놓는 행위는 이집트에서 속죄하는 풍습을 묘사한다. 머리에 숯불을 담은 그릇을 올려두는 행위인데, 원수에게 선을 베풀 때 그 선에 의해 원수가 죄책감을 절실히 느끼고 회개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그 악이 사람이든 기관이든 회사에서 일어나는 환경이든 우리는 분노가 아닌 선을 행하는 것으로 반응해야 한다. 분노할 만한 일이 생길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기억하자(마 18).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얼마나 많은 죄를 탕감받았는지 기억하자.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똑같은 선행과 용서를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이 마땅하지 않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 물음에 ‘아니오’라고 당돌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능력은 용서의 힘을 준다. 분노를 쉬게 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한다. 우리가 맛본 선의 크기에 압도되어 우리가 누리는 용서의 깊이를 헤아리게 될 때 넉넉히 분노를 이길 수 있다.

 

어리석음, 속임, 악독함

이 세 가지 악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음의 근본이다(시 14:1; 53:1). 사람을 속이는 행위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재판관을 무시할 때 하는 일이다. 악독함은 하나님과 상반되고 구별되는 영역의 일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악독은 어둠이다. 극명히 갈리는 영역에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을 말하는데 악독함과 깊은 연결고리를 갖는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직장생활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음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성실하지 못한 직장생활을 알고 계시지만 사람들은 모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실질적 무신론자에 가깝다. 성경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고 명령한다(골 3:23). 사람을 속이면서 좋은 평판과 명성를 얻으려는 태도도 옳지 않다. 또한, 직장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각이나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자리를 두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에서 이러한 자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치밀한 계획과 지혜로운 결정을 하지만 그들의 사업구상 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지적한다(약 4:15).

복음은 절대적으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다.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른척하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복음의 반대편에 서 있다(요 17:3). 우리의 죄는 나 중심적인 삶을 살게 한다. 하나님을 주변으로 몰아내는 세속주의를 가져온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우리를 계속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나오게 한다. 끊임없이 나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코람데오라고도 부른다)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직장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범사에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진 것처럼 우리의 삶이 라이브 생중계로 그분 눈앞에 보여지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불필요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불러일으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능력이 그렇게 만든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하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경건이고 그것이 바로 복음의 목적을 이루는 길이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한다. 모두를 속일 수 있어도 정직하게 일한다. 더러운 이를 추구하지 않고 청렴결백하게 일한다. 회사에게 고용된 사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일한다.

 

결론

교만, 탐욕, 음란, 분노, 우매함 등 많은 죄가 옛사람의 강력한 습성처럼 우리의 삶에 달라 붙어있다. 바로 이를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우리는 그 보혈의 공로와 능력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교만을 뿌리 뽑고,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음란을 버리게 하고, 분노를 용서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어리석음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의 근본으로 바꾸신다. 성령이 내주하여 역사하는 그 능력으로 내가 넉넉히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에 순종할 수 있다.

당신은 직장에서 어떤 유혹을 받는가? 어떤 옛사람의 습성에 매여 있는가?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 능력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당신을 부르신 그분이, 당신을 의롭다 하신 그분이, 당신을 거룩하게 하신다. 복음의 능력으로 직장 내에서 당신이 싸우고 있는 모든 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것이 죄를 이기는 복음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