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으로 함께 모인 곳에서 우리는 그 모임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행동을 요구합니다.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함께 모인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무례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인 곳에서는 그러한 행동은 규제됩니다. 주일 예배 시간은 교회가 함께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적 모임입니다. 예배를 목적으로 한 모임에 합당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여러 모임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합당한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제시합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문맥을 보면 26절에 언급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가 함께 “모일 때에” 그들이 갖춰야 하는 행동 양식에 대한 일반적인 교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품위 있게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뜻하는 바는 주어진 상황에 알맞게, 적당하게, 정확하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to being appropriate, correctly”, BDAG).
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한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26-33절).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합당한 기준을 세웠습니다(34-38절). 그리고 결론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각각 사모하되 앞서 말한 것처럼 상황에 알맞게, 기준에 합당하게 행동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품위 있는” 행동에 대해 은혜롭고 알맞고 아름다우며 함께 조화를 이루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존 맥아더, 고린도전서 주석).
조금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 상황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찬송시를 낭독하고 부르며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 계시를 나누며 방언과 통역으로 서로에게 유익을 끼칩니다(26절). 무질서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순차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하려면 두 사람이나 세사람만 참여하도록 제한을 주고, 통역을 세웁니다(27절). 통역이 없으면 방언은 공적인 그 모임에서는 규제합니다(28절). 예언 역시 둘이나 셋을 세워 하게 하는데, 예언을 듣는 동안 분별하는 자들이 그것을 분별합니다(29절).
이들의 예배 시간은 조용할 때가 있고, 들을 때가 있고, 함께 부를 때가 있고, 분별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각각의 상황마다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은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 예언할 때 떠들면 안 됩니다. 물론 그 시간에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말하고, 먼저 하던 자들은 잠잠합니다(30절). 이렇게 분명하게 정해진 기준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몇몇의 특수한 은사들(예언, 방언, 계시)은 성경의 완성과 함께 사라졌다고 믿습니다만(고전 13:8-10), 바울의 이 교훈을 통해 우리는 예배의 흐름에 합당하고 조화로운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목적으로 함께 모인 그 시간을 품위있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요구되는 원칙은 바로 “질서”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무질서한 예배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목적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무질서를 잡아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는 질서의 하나님의 특징에 걸맞는 질서가 요구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품격을 높일 수 있을까요? 품위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질서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먼저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능력의 하나님, 권세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모든 능력이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품위와 질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해야 하고 그분의 속성에 알맞아야 합니다.
예배의 내용은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한 예배,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예배(특별히 구원), 죄 많은 우리 인생에 대한 자백과 회개의 예배, 우리에게 죄용서함(관계회복을 위한)과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는 예배,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구하는 예배…
그리고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합니다. 기도를 통해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송영을 드리기도 합니다. 찬송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감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간구의 기도를 드릴 때도 있고, 말씀을 낭독하거나 말씀을 듣는 시간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그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연약함을 회개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기뻐하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 방편들을 인도하는 자는 성경의 진리에 부합하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요 4:23-24). 드려지는 찬양이 합당한 진리를 담고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드려지는 기도가 주의 뜻대로 드려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낭독되는 말씀이 그 말씀의 본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전해지는 말씀이 본문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 방편들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자는 어떻게 “품위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에 합당하게, 알맞게, 조화롭게, 은혜롭고 아름답게 행동하는 것으로 품위 있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하며 그분을 높이는 기도 시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쁨으로 찬양할 때 전심으로 함께 목소리를 높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낭독할 때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며 함께 주님을 적극적으로 묵상하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들려지는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고 주가 주시는 말씀으로 겸손한 마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듣는 것입니다(물론 분별도 필요합니다).
예배시간에 핸드폰을 하지 말라, 잡담 하지 말라, 낙서 하지 말라, 다른 책을 펼쳐 보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이런 말들은 우리의 행동 양식을 규제하는 잔소리 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런 이유나 목적을 말하지 않고 행동만 규제하는 것은 사실 중요한 것들도 잔소리처럼 들리게 만듭니다. 이것은 그저 예배시간에 조용히하라는 가벼운 잔소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명령에 따르면 만일 통역이 없다면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은 분별을 요구했습니다. 여자는 잠잠해야 했고, 모든 것은 질서에 따라 되어져야 했습니다. 전 성도가 합당하고 알맞은 행동 양식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하나가 되야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26절).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소비자처럼 교회에 와서 앞에서 진행되는 것들로 유익을 얻고, 여러 방편들을 자신의 선호에 따라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예배에 대해 평가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정작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가 예배의 적극적인 참여자라는 것을,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 모두의 덕을 세워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자기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품위 있는 예배가 제공되기를 바라는 품위 잃은 예배자가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회중 예배는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회중 예배입니다. 교회 맨 뒷자리에 앉아 있어도 당신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서서 혹은 앉아서 하는 모든 행동 양식들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예배의 품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지, 그 하나님 앞에 당신이 얼마나 죄 많은 인생이었는지, 그 저주 아래 있던 당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놀랍고 위대한 희생으로 구원하셨는지,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롭고 사랑스런 분이신지, 예배 시간 동안 당신이 지키고 있는 품위가 보여주고 있습니까? 당신과 함께 앉아있는 당신의 자녀에게 내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품위 있는 예배의 본을 통해 말해주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