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혜와 지식에서 자란다는 것

본문: 베드로후서 3장 17-18절

설교자: 조정의

죄인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다시 태어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됐을 때, 주님 안에서 잘 자라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육신의 성장에 성장장애가 있듯, 영혼의 성장에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 성장통은 누구나 겪지만, 때론 발육이 멈춘 것 같은 성도, 발달이 너무 더딘 사람이 있다. 최악의 경우 거듭나지 않은 상태인지 의심스럽다. 영적 성장판이 닫혔나? 그럴 리 없다.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능력의 한계가 없으시다(고전 3:7).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까지 우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멈추지 않는다(롬 8:29).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 방해꾼, 원수가 문제다. 마귀는 하나님 자녀인 우리의 신분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최선을 다해 애쓰는 건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서 우리를 최대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믿음에 관하여 파선(고후 11:25). 어린 아이, 초보(히 5:12-14),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약 5:19), 맹인, 실족(벧후 1장), 떨어지다(벧후 3장)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 우리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주요 속임수를 ‘①경계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은혜와 지식에서 ‘②자라가라’고 명령한다. 이 두 가지 명령을 제대로 알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당신을 퇴보하게 만드는 미혹된 길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택하고 부르신 새 삶에서 힘있게 자라나길 바란다.

1. 경계하라: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거짓을(17절)

17절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러므로는 편지의 결론을 알리는 접속사다. 베드로는 주께서 사랑하신 성도들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앞서 한 모든 말의 결론을 이 두 구절에 요약했다(17-18절). 각 구절마다 하나씩 총 두 개의 명령을 했는데, 첫 번째 명령인 “삼가라”의 대상은 베드로가 2장에서 내내 ‘경계하라’고 부르짖은 ‘거짓 선지자들’, ‘거짓 선생들’이다(2:1).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들을 가리켜 무법한 자들이라고 했는데(3:17), 2장에선 “범죄한 천사들”(4, 창 6장), 노아 시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5), 소돔과 고모라의 “무법한 자들”(7)의 뒤를 이어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로 묘사된다(6). 그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해 왔다.

이들의 삶은 “호색”(2), “탐심”(3), “음란”(7), “불법”(8), “불의”(9),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주권자 하나님) 멸시”(10)하는 특징을 보인다. 자기들만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한다(14).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18). 이들을 소수의 별종 흉악한 범죄자로 여기지 말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다(롬 1장, 갈 5장, 고전 6:9-10).

왜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사는가? 거짓 때문이다. 베드로는 2장 1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특히 베드로가 주목한 이단은 임박한 심판에 관한 하나님 약속을 부정하는 거짓이다(2:3, 4, 5, 6, 9, 10, 12, 16, 17, 19). 3장 3-4절에 그들이 믿는 거짓이 분명히 나와 있다.

3절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절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들은 종말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는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이단이 그들의 현재 삶을 정욕으로, 영원한 삶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약한 믿음으로 겨우 잘못된 삶만 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똑같은 거짓된 삶으로 미혹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것을 주목하여 생각하라. 당신이 육체를 따라 정욕대로 살도록 허용하고 있는 모든 죄의 배후엔 항상 거짓이 깔려 있다. 그 거짓은 종말에 약속된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으며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는 이단과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당신을 끌어당긴다.

우리는 거짓 종말을 가르치는 신천지, 동방 번개,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단에 빠지는 것을 우습게 여긴다. ‘어떻게 저런 엉터리 거짓에 속을 수 있나?’ 하지만 지금 우리를 미혹하는 대표적인 이단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지 않을 일, 하나님 약속하신 그대로 심판하시고 보상하시는 걸 믿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 영원한 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면 추구하지 않을 삶을 살게 하는 이단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왜 그런가? 이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3:1-2). 우리가 이미 듣고 가르침을 받은 이것 곧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의 말씀이 세상의 거짓을 경계할 수 있는 진리이다(3:7-13).

이 진리를 알고 믿는 성도가 어떻게 이 진리를 모르고 무시하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 수 있는가? 그러므로 경계하라. 오늘 밤에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종말의 약속을 이행하신다면, 당장 후회할 일들을 삶에서 지금 몰아내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워할 것인가? 주님이 대면하여 결산하실 때까지 삶을 절제하지 않고 방종할 것인가? 주님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나를 보시며 직접 물어보실 때까지 ‘그 죄’를 허용하고 방치할 것인가? 보초를 서는 병사는 경계를 미루지 않는다. 매일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을 품고 항상 감시하라(현재형).

2. 자라가라: 성장을 일으키는 예수님 안에서(18절)

18절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헤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오직은 17절과 18절이 한 쌍을 이룬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거짓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성장을 일으키는 예수님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두 번째 명령은 그래서 자라 가라이다.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거짓을 경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장을 일으키는 원동력, 예수님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지 일반적, 추상적 의미가 아니다.
17장이 2장과 연결된 것처럼, 18절은 1장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자라가라”는 명령의 구체적인 사항을 발견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주 곧 구주라고 불렀다(1:11). 이는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주권과 능력,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주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3).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4). 경건에 이르도록 자라나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생명력, 약속을 주님이 주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10). 주님은 우리로 썩어질 세상에서 정욕대로 사는 것을 피하게 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우리 행위를 보시고서가 아니라 하신 약속에 근거하여(4).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 맺는 믿음,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 자라나게 하는 믿음을 은혜로 공급하신다. 그래서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신다(5-7). 은혜가 실제로 우리를 자라게 한다.

② 예수님을 아는 지식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는 그분을 아는 지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인사말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축복했는데 그 앞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말했다(2절). 주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주셨는가?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3절).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는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가능하다(8). 요컨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동력으로 자라가는데, 그 은혜를 알게 하는 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주관적인 경험보다(변화산 체험) 더 확실한 예언, 곧 성경 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다(12-21절).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말하며 사모하라고 명령했다(벧전 2:2). 우리의 성장엔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앞서 “경계하라”에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약속하신 종말에 관한 진리를 근거로 모든 육체를 따르는 정욕을 끊어내라고 배웠다. 우린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순종할 힘이 없어서 성장하지 못할 때가 많다. 가령 미워하는 사람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진정으로 사랑할 힘이 자기 안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맞다. 그 힘은 우리 안에 없다. 우리 밖에 있다. 우리 안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매일 충전하지 않으면 방전되는 전자기기처럼 우리는 날마다 성장을 위한 동력을 주님 안에서 얻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제한한다. 만찬에서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됐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날마다 새롭고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보다, 오래되고 한정된 은혜를 계속 우리고 또 우려 마시는 것 같다. 하나님 은혜에 문제가 있나? 우리에게 문제가 있나?

데인 오틀런드는 <우리가 몰랐던 예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과 내가 그리스도의 교제에 관해서 얕은 물에 겨우 발가락 하나를 담그고서 드넓은 바다를 경험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 안에서 경험해야 할 것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은 아닐까?”(194p).

그리스도의 은혜의 특징은 ‘풍성함’에 있다. 차고 넘친다는 의미다. 그냥 풍성한 것도 아니고 “지극히 풍성”하다(엡 2:7). 오는 여러 세대 다른 말로 영원히 나타내도 끝없이 차고 넘치는 그 은혜의 풍성한 능력을 당신은 얼마나 알고 믿고 경험하는가? 

매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은혜를 채워라. 은혜가 필요할 때, 성경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적용하라: 낮추기와 높이기. 

1) 낮추기(겸손, 회개): 우리는 틈만 나면 자신을 높인다. 지옥, 저주, 멸망, 심판밖에 합당한 것이 없었던 우리가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닌가? 계속해서 자신을 낮춰라. 

2) 높이기(경외 ,예배): 우리는 쉴 새 없이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낮춘다.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받으시는 것뿐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그분의 위치까지 높여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절b).

은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낮고 천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려고 높은 하늘 보좌에서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신 놀라운 사랑의 크기를 보여 준다. 성경을 통해 우리를 지극히 낮추고,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일수록 우리는 지극히 풍성한 은혜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충전엔 충분한 시간이 요구된다. 주님의 은혜에 압도되고 감동하고 감사할 때까지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라.

도대체 언제 크나 싶은 아이가 시간이 지나 장성한 성인이 되는 것처럼 성장은 더디지만 매일 조금씩 이루어진다. 육신의 성장도 영적 성장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화의 역사에 동참하는 방법이 있다. 오늘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장을 가로막는 거짓을 날마다 경계하고, 성장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 더디지만 매일 조금씩 자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