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옛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 살라, 더불어 함께

본문: 에베소서 4장 25-32절

설교자: 최종혁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의 특징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에베소서에서 지금까지 배운 것처럼 믿는 자들의 상태는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 칭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살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이 변화된 삶은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전에는 없었던 정말 새로운 삶이긴 하지만, 성경의 서사를 보면 창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회복된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면서, 인격체로서 사랑의 하나님을 이 땅에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로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서로 사랑하여 하나님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낸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아름다운 창조의 질서를 깬 것이 ‘죄’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깨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자신’이 자리 잡았고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서로를 사랑하라고 주신 다양성은 각자의 힘이 되어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는 수단이 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관계에는 자연스럽게 분리와 분열이 생겨나게 됐다.

약 4: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 중심의 사랑은 하나되게 하고 나 중심의 죄는 싸우게 한다. 하나되는 것은 사랑의 특징이고 다투고 분열하는 것은 죄의 특징이다. 따라서 인간사가 분열, 다툼, 갈등으로 가득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죄인인 우리가 만드는 역사의 특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죄에서 구원 받은 자들은 죄의 특징이 아닌 사랑의 특징을 나타낸다. 즉, 사랑으로 하나된다.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세우실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기도하셨던 것 내용 중 핵심이 ‘사랑으로 하나됨’이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요 17:21–23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구원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신다는 증거가 바로 믿는 자들의 하나됨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변화가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세상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5:22-23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도 가만히 보면 하나됨의 열매라고 할 수 있고,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믿는 자는 죄의 특징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이제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갈 5:24-26). 죄의 특징인 다툼과 분열을 버리는 것이 곧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에베소서에서도 4장부터 신분에 맞는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면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이것이었다.

엡 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됨에 대한 명령이다. 특히 바울은 먼저 교회가 어떻게 하나되어서 일해야 하는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17절부터는 좀 더 실제 삶에서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하는데, 간단히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원리에 대한 몇가지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5개의 구체적인 “벗고 입으라”의 예를 보게 되는데, 이는 모두 공통적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것들이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분열시키는 죄의 특징을 벗어 버리고 하나되게 하는 사랑의 특징을 입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즉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새 사람이 되었지만 옛 세상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할까? 어차피 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 성도들하고만 하나되어 잘 살면 되는걸까?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셨다. 새 사람으로서 새 사람이 된 사람들하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옛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치관이 전혀 다른 이 세상과 교회가 하나될 수는 없지만, 교회는 분열을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살아야 한다. 옛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죄의 특징을 드러내는 세상에서 사랑의 특징을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다. 이것이 어려운 일임은 당연하다. 하지만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마땅한 삶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1. 거짓을 말하는 세상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25절)
옛 세상에서 새 사람이 보여야할 특징 첫째는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9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이고 스가랴 8:16의 인용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바울은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여 이것이 관계의 문제임을 밝히고 있고, 그 이유로 제시한 것도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로서 마찬가지로 관계를 강조한다. 믿는 자들은 정직한 사람,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 지체인 교회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 속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거래를 한다면 누가 이득을 볼까? 당연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이득을 본다.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는 물건을 ‘사실상 새 것’이라고 속여서 팔면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나’를 중심에 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특징이다.

언제 거짓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나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 간증을 하면서도 상황을 더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양념을 친다. 나의 잘못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도 많이 한다. 나는 그런 줄 몰랐다.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거다와 같은 말들이 그렇다. 물건을 팔면서 거짓말하고 사면서도 거짓말을 한다.

사실과 다른 말만 거짓말인 것도 아니다. 오해를 할 수 있는 애매한 말이나 일부만 맞는 말을 하면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라고 생각한다. 어떤 교회들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한다. 교회만 나오면 모든 것이 잘될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는 그런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 내가 어떤 거짓말을 잘 하는지, 자주하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물론 참된 것을 싫어하는 세상이 그런 우리를 싫어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참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손해보는 일도 겪을 수 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처세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으로, 그런 면에서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2. 분노하는 세상에서 분노의 죄를 짓지 않는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26-27절)
옛 세상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새 사람의 특징 둘째는 분노와 관련되어 있다. 앞과 뒤에 주어진 명령의 형식과는 조금 다르지만 의미 상으로는 여전히 벗어야 할 것과 입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명령은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분을 내어라, 하지만 죄를 짓지 말라”가 된다. 악한(불의한) 분노를 버리고 선한(의로운) 분노를 입으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 명령에서의 강조점은 악한 분노에 있다.

먼저 선한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선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표현하셨던 분노도 의로운 분노였다.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나의 죄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생명을 죽이는 낙태의 문제, 하나님의 남녀에 대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오늘날의 모든 성에 대한 가치관, 보호 받아야할 약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범죄 등에 대해 무관심하고 아무런 느낌이 없거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분노하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선한 분노는 나를 위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분노다. 그런 분노는 허용될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매우 강력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즉, 감정에 사로 잡히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의 분노는 대부분이 죄악된 분노이고 죄악된 분노가 된다. 즉, 그 시작에서부터 이기적인 악한 분노이거나, 선한 분노로 시작한 것이 악한 분노가 된다. 그런 분노는 버려야 한다.

사람마다 거짓말을 하게 되는 상황이 다른 것처럼 분노도 그렇다. 개인마다 분노를 일으키는 발작 버튼이 있다. 스스로 ‘나 지금 화내고 싶어. 화 낼거야’라고 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남에 의해 그 버튼이 눌려서 화를 내게 된다. 무시 당하는 느낌 때문에 분노하는 사람도 많다. 어떤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서 분노하는 사람도 많다.

대부분 분노의 결정적 원인은 내가 아닌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발작 버튼) 나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를 봐야 한다. 애초에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와 생각 때문에 분노하는 것은 모두 죄악된 분노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선한 분노가 악한 분노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한 분노가 결국은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죄를 죄로 갚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덧붙인 것이다. 분노의 마음을 오래 품고 있을수록 마귀가 공격할 수 있는 틈이 생기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해가 지도록”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표현은 아니다. 해가 긴 여름에는 좀 더 분노해도 괜찮고 겨울에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백야 현상이 나타나는 극지방 근처에서는 계속 분노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분노의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분노를 가지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대부분 경험이 있어서 알 것이다. 분을 품고 잠자리에 들면 우리는 그 분노를 묵상한다. 계속해서 마음 속에서 곱씹고 되새기며 분노를 키운다. 분노의 대상을 절대 악으로 만들고 나를 선한 피해자로 만든다. 그런 순간에 마귀는 더욱 우리를 자극한다. 분노는 금새 우리를 또 다른 죄로 이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분노한 이유를 생각해 보고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빨리 결정하면서 분노의 감정은 내려 놓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이 세상은 내 것을 얻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 분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분열을 가져온다. 하지만 새 사람이 된 자들은 그런 분노를 버리는 것이 특징이 되어야 한다.

3. 도둑질 하는 세상에서 자기 손으로 수고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절)
새 사람의 특징 셋째는 일과 재물과 관련되어 있다. 도둑질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일하여 선한 일, 즉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새 사람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도둑질’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 나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도둑질을 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한 적은 댓가를 지불하고 무언가를 얻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우리의 성향 자체가 그렇다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법적으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도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들켜도 운이 없어서 들켰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도둑질이다. 그런 도둑질이 이 세상에는 가득하다.

전문적인 도둑은 아니어도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은 많다. 가게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고 물건을 슬쩍 가져오고 그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직장에서 말도 없이 비품을 가져오는 것도 도둑질이다. 경비를 부풀리고, 일한 시간을 부풀리고 하는 것도 도둑질에 해당된다. 반대로 일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하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다. 제대로 수입을 신고하지 않아 세금을 내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다. 디지털 제품을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고 복제하여 사용하는 것도 도둑질이다.

바울은 그런 모든 ‘도둑놈 심보’를 버리고 자기 손으로 정당하게 일하며 살아갈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웃의 것을 빼앗는 것은 분열시키는 죄의 특징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지라도 새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지 않고 오히려 도우면서 사는 특징을 나타낸다.

빼앗으려고 하는 세상에서 나누려고 하는 사람은 당연히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니 그런 면에서 손해 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당연히 더 잘 살 것이다. 다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고 힘을 내야 한다. 다가올 세상이 있기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가장 현명한 투자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 더러운 말을 하는 세상에서 선한 말을 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29-30절)
새 사람의 특징 넷째 영역은 말에 대한 부분이다. 특징 1에서 거짓말과 참된말에 대한 명령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좀 더 일반적인 측면에서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를 말한다.

먼저 버려야할 것은 “더러운 말”이다. 여기 “더러운”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주로 썩은 과일, 부패해서 악취가 나는 생선, 상한 음식 등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그 자체로서 더럽고 또한 먹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따라서 비속어나 욕설, 음담패설, 저속한 말들이 여기에 해당될 뿐 아니라 상대를 조롱하거나 빈정대는 말 등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고 상처를 주려는 말들도 해당된다. 해로운 말이고 뒤에서 언급되는 덕을 세우는 말이 아닌 사람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 말다툼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다툼과 분열을 가져오는 말이다. 따라서 새 사람이 되었다면 더러운 말을 버려야 하고 반대로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소용되는 대로 즉 때에 맞게 해야 한다.

말을 다스리는 것은 성경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로서 지목하는 것이긴 하다(약 3:6-8).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어렵지만 가장 쉽게 그 변화가 보여지는 분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언어를 변화시키는 것은 마음의 변화다. 우리가 수요일에 “당신 입에서 나오는 열매”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계속 배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울 때 우리의 말도 변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말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를 세워줄 수 있다.

바울은 특별히 이 명령을 새 사람이 된 성도들 안에 있는 성령님을 통해 더욱 강조했다. 우리가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이 아니라 파괴적인 더러운 말을 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인을 치신 성령님께서 근심하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떠나지는 않으시지만 근심하시고 따라서 우리 삶에 성령님께서 적극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말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저 말 한마디가 아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에 우리는 부패한 생선 냄새를 맡은 것처럼 구역질 반사를 보여야 한다. 그런 말을 입에 담으려 해서는 안된다. 혹 그런 말 한마디로 상대를 굴복 시킬 수 있다고 해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신에 세워주고 하나되게 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더러운 말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냄새에도 익숙해져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해야 덕이 되고 은혜를 끼치는 말인지 모를 때도 있다. 평소에 이런 면에서 본이 되는 성도와 교제를 자주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들었을 때 기분이 좋고 격려가 되었던 말들은 남이 들어도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런 말들을 기억했다가 비슷한 상황에서 써먹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선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마음의 열매인 언어가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새 사람의 특징이다.

5. 악의 가득한 세상에서 용서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1-32절)
옛 세상에서 새 사람이 보여야할 특징 다섯째는 용서와 관련되어 있다.

옛 세상의 특징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남을 이해하고 용납하면서 내가 손해 본 것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버려야 할 옛 세상의 특징을 여러 단어로 표현했다. “악독”은 반감을 품고 화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노함”은 격렬한 순간적인 분노를, “분냄”은 내적이고 지속적인 분노, 적대심을 나타낸다. “떠드는 것”은 다툼 중에 흥분하여 소리지르는 것(고함, 비명)을 의미하고 “비방하는 것”은 남의 평판을 해치는 험담이다. “악의”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악한 의도와 행동을 의미한다. 미덕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날이 잔뜩 서 있는 상태’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려고 하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그대로 혹은 배로 갚아주겠다는 마음 상태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너그러움이 없고 다른 사람을 위한 여유가 없다. 나는 잘못할 수 있지만 남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 내 잘못은 실수이지만 남의 잘못에는 나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내가 옳고 내가 상식이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내가 맞다고 생각한다. 남은 항상 상식 밖에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항상 저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맨날 용서했는데, 저 사람은 아무 변화도 없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남은 나의 적이다. 이것이 죄의 특징, 악의가 가득한 세상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 사는 새 사람은 다른 특징을 보인다. 바로 ‘용서’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 용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라는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를 구하지 않았을 때 용서해주셨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를 구할 수 없었을 때 용서해주셨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죄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배척한다. 나에게 그런 사람을 위한 자리는 없다. 심지어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분노해야 하고 그런 사람은 비방 받아 마땅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열시키는 죄의 특징이다. 하지만 사랑은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다. 내가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다.

특히 용서는 우리가 구원 받은 사실과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크게 용서 받은 자로서 작은 용서를 늘 힘써야 함을 강조하셨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가 세상과는 다르게 용서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친절하심과 불쌍히 여기심, 그리고 용서를 알게 될 것이다. 새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도전
여기까지 새 세상이 아닌 옛 세상에서, 즉 죄의 특징이 나타나는 세상에서 새람이 된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봤다. 참된 것을 말하고, 분노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고, 선한 말을 하고, 용서하는 것이 새 사람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 속에서 편하고 쉽게 사는 방법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이다.

점점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지키면서 세상에서 좋은 사람들로 남기 어려운 세상에 접어들고 있다. 아무리 동성애자를 혐오하지 않아도 동성애를 죄로 말한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이미 혐오 세력이 되었다. 이런 영역은 이제 점점 늘어날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지키려고 굳게 서는만큼 세상은 우리를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차피 우리의 진정성있는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그저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 세상과 하나될 수는 없겠지만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그 방법은 이렇게 우리를 더 갈라 놓는 죄를 벗어 버리고 하나되게 하는 사랑의 옷을 입는 것이다. 세상의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거룩한 삶은 개인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새 사람’이 된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4:15의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명령은 개인에게도 해당되지만 일차적으로는 교회라는 공동체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나의 죄는 교회의 죄가 된다. 나의 미숙함은 교회의 미숙함이 된다.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고 함께 이 세상에 주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함께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자. 함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자. 함께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자. 함께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하자. 그리고 함께 모든 악의를 버리고 용서하자. 그렇게 함께 옛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서 더불어 살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사실 우리가 염려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핍박 받을 것을 아셨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싸우고 다투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게 하는 사랑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