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우리가 알아야할 하나님
본 문: 이사야서 6장 1-5절
설교자: 최 종 혁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합니다. 초월적인, 영적인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극단에서는 모든 것이 신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의 신을 인정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요? 우리나라의 교회를 보면,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 복을 주고,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그런 분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만족과 위로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성경 속에 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고, 말씀을 통해만 자신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1절), ‘거룩한 하나님’(2,3절), ‘공의로우신 하나님’(4,5절)이 그것입니다.
 
1. 왕이신 하나님(1절)
본문 말씀은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1절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언제 있었는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데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연도상으로는 739년쯤이나 그보다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십육 세 된 웃시야를 세워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대하26:1)” 왕으로 세워질 당시 웃시야의 나이가 16세였습니다. “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 간 다스리니라(3절)” 그는 52년간을 다스렸고 이것은 왕으로서 꽤 긴 통치기간이었습니다. 그는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강대하게 만들었던 왕이었습니다. 당시 부상하고 있던 앗수르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했던 왕이고, 경제적으로나 농업적으로 나라를 번성하게 했던 왕입니다. 솔로몬 이후 그와 같이 성공적으로 통치했던 왕이 없었습니다. 과거 솔로몬의 영화를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웃시야는 그 영화를 회복시켰던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고 있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산당을 제하지 않아 백성들이 영적으로 타락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15절)” 하나님께서 웃시야 왕을 도우셨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16절)”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나라가 부강해져갈 때 그의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향단에 분향하는 것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18,19절)” 제사장 아사랴가 이를 말렸지만 웃시야는 제사장에게 화를 냈습니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19절)” 웃시야가 교만하여 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 것입니다. 그는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나병으로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성했던 솔로몬의 시대를 추억하고 있었고 한 왕(웃시야)이 나타나서 나라를 부강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교만하여졌을 때 하나님의 침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많은 혼란과 마음속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한 나라 앗수르를 두려워하고 많은 근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이 말씀의 배경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1)”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5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절에서는 “주”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의 언약적 관계,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는 주권자이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요한복음 12장 41절에 따르면, 여기 등장하는 주님은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사야의 환상 중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보좌’는 왕이 앉는 자리입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시기 위해 왕의 자리에 앉아계신 것입니다. ‘높이 들린’ 보좌는 높은 왕권을 의미합니다. 왕상 10:18-20에서는 솔로몬의 보좌에 대해서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는 자리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서 있으며”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보좌는 층계가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큰 권력, 강한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웃시야는 강성해졌을 때 스스로를 높였지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높으신 분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옷자락”을 보았습니다. 사극을 보면 지체가 높은 사람일수록 여성들은 머리가 화려해지고 무거워집니다. 왕은 옷이 화려하고 길이가 깁니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그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이사야는 왕으로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웃시야라는 인간 왕이 죽었을 때 그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보좌에 앉아서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만유의 왕이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그가 한 고백은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대하6:18)”였습니다. 웃시야가 나병으로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니시고 모든 만물의 왕이십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93:1)” 하나님은 단지 믿는 자들만의 왕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 만물의 왕이 되시는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만 왕으로 계신 분이 아니고, 영원한 왕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시10:16)”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1-2)” 하나님은 한 순간에만 통치하시는 왕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변하지 않는 왕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0-12)” 인간들이 세운 계획은 하나님의 그것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계획하든지 하나님의 계획과 다르다면 잘못될 것입니다. 우리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시2:10-12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 왕들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 길에서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 왕이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은 복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처음 만난 하나님은 왕이신 하나님, 온 만물의 주관자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분들도 이 자리에 계실지 모르나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왕으로서 지금도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2,3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2)” “스랍”이라는 단어는 본문을 제외하고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불타는 존재’입니다. 에스겔1장과 10장에 ‘그룹’이라는 비슷한 존재가 등장하지만 그룹과 스랍은 날개의 개수가 다릅니다(그룹: 4개, 스랍: 6개). 스랍과 가장 비슷한 존재는 계4:8에 등장하는 네 가지 생물입니다. 여섯 날개가 있다는 점과 그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하는 것이 일치합니다.
 
스랍은 천사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놀랍고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성경에서 천사들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본 것처럼 두려워했습니다. 여기 이 스랍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바로 그곳에서 섬기는 자들이었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존재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계셨고 스랍들은 하나님 주변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2)” 모든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도 물건을 집고 장소를 이동하는 목적 하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날개는 왜 만드셨을까요? 날개는 날기 위해 있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여기 스랍들은 위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있고 아래 두 날개로는 다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것, 발을 가린 것은 거룩한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최대한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 스랍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해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세 번일까요? 혹자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여기 말씀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 번의 반복은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렘22:29)”,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겔21:27)”,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반복한 것과 같이 ‘강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렇게 같은 말을 세 번 표현하는 것은 최상급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전적으로’ ‘가장’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어떤 속성에 대해 이렇게 반복해서 언급된 구절은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함’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핵심적인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여러 접시들 중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은 거룩한 그릇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부터 구별된 다른 존재였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면을 포함하지만(죄 없으심) 본질적으로 다른 피조물과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끝도 없으신, 우리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제한이 없으시고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인간으로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다른 어떤 것에도 비유하기 어려운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드러내셨습니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 거룩이 구별된 속성이라면 ‘영광’은 그 거룩이 피조물 중에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온 땅은 모든 만물을 의미하는데 그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19:1-6)” 우리는 하늘과 땅, 밤하늘의 별들을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주를 생각할 때 그 광대함에 압도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과 지구, 태양과 행성 정도는 머리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포함한 은하가 수없이 많다는 것에 이르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느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조차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은 또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하며 절묘합니까? 인간이 로봇이라는 것을 만들지만 그것은 인간의 정교함에 비하면 참 허접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 전 ‘지구에서 산소가 5초간 없어진다면’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산소가 5초간 없어진다면 단지 숨을 5초 동안 참으면 끝날 일이 아닙니다. 동영상에서는 그 결과로 언급한 것이, 사람의 피부가 공기의 보호가 없어 태양빛에 닿자마자 화상을 입는 것입니다. 산소가 빛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니 산소가 없다면 낮의 하늘도 어두운 하늘이 됩니다. 지구에 지각이 부서지고, 압력차에 의해 사람들의 내이가 파열됩니다. 콘크리트가 부서져 이 건물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고, 인간의 모든 세포가 터져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산소로 구성된 바다가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묘하게 만드신 균형이 5초만 깨져버려도 인간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온 땅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거룩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26번이나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강조이자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악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이사야1: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사5:24)”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31:1)”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사37:23)”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조하면서, 1장부터 5장까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1:4),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1:10), 창기, 살인자(1:21)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고, 마음이 교만하여 높아졌으며,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독주에 취해 쾌락을 즐겼고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야 했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죄악과는 전혀 다른,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사야는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와 비슷한 하나님이십니까, 전혀 다른 하나님이십니까? 사단이 처음 하와를 속일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교만이고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같게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니은 우리와 다른 분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와 비슷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이 높고 거룩한 분을 섬기겠습니까?
 
3. 공의로우신 하나님(4,5절)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4)” 천사들이 찬양하는 소리가 있을 때 그곳에서 지진과 연기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자연현상입니다. 특별히 공의와 심판을 나타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19:17-1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계15:8)” 연기는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진과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 특별히 심판 주로서의, 공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때 보입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보았고 천사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지진과 연기가 일어나 하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는 왕이신 하나님과 거룩하신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여지껏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본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 이와 비슷한 반응은 욥이 하나님의 임재를 만났을 때도 나타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베드로도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계1:17)”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은 그 앞에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만물의 주관자이시고 구별되시는 하나님, 그분의 공의의 심판을 안다면, 죄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당당히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친구되시는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도 맞는 말이지만 분명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죄악 중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원해 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 누구도 그를 구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만군의 주,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것이고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6,7)”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낮아진 이사야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선택하시고 먼저 찾아가셔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자격을 주십니다.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왕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님, 공의로우신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로 돌아오신 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높으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시고 그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신 분들은 이사야에게 일어난 이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워진 것은 그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사야는 진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낮추고 죄를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10)” 여전히 육체의 욕심에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성경은 그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 말씀 4절에는 “하지만”이라는 중요한 말이 빠져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낮추십시오. 겸손히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