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문제
본 문: 마태복음 5장 38-42절
설교자: 조 정 의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그동안 주일설교를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또 지난 주일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났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거듭난 사람의 증거가 필요하고,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저는 두 달 전에 여러분 앞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마7장).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알아도, 그동안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했든지 상관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전했을 때 어떤 분들은 ‘너무 극단적인 말씀이 아니냐, 우리는 구원받았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때로 실패하지는 않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전체를 통해서, 특히 마태복음과 주님이 하신 말씀들을 통해서 이것이 얼마나 확실한 기준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직혀 불에 던져지느니라(7:19)”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12:33)”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예수님의 기준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반복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열매가 삶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말씀이기 보다는, 무겁고 주저하게 만드는 말씀인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분명한 기준에 비춰 삶을 돌아보면 스스로에게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바로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죄의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면 이 예수님의 기준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뒤에도 죄의 문제를 계속해서 겪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오늘은 요일2:1-6에서 ‘그리스도인과 죄’라는 제목으로, 죄에 대한 세 가지 진리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몇 가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죄와 사람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만드셨다는 오해입니다. 현재 나에게 있는 죄의 문제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통해 배울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다는 등의 오해입니다. 또 다른 입장은, 십자가의 사역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어서 영생을 얻었지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했을 당시에도 있었던 영지주의자들 주장인데, 나는 구원받은 순간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거룩하니 지금 내가 짓는 죄는 죄가 아니다, 죄는 육체가 짓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또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자’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습니다. 그의 나이 100세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편지를 쓸 때 일반적으로 쓴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한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자로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명령들에 대해 아버지의 마음으로 전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아마 영적인 아버지로서 성도들의 순종을 기대하면서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너희에게 씀은”이라는 말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이 서신서 전체를 가리킴과 동시에 구체적으로 5-10절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썩어질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라고 인정하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싸워 이기겠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죄를 지으면서 많은 핑계와 변명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여자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죄를 지으면서 자신의 회사 상사 때문이라고, 아내 때문이라고, 어떤 사람이나 환경, 조건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 낙심하고 변명하며 무언가에 핑계 댈 것이 아니라, 마땅히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죄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데려왔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고 그들이 모두 떠나자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비와 은혜를 베푼 것만 주로 기억하고 있는데 주님은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5:3)”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빌3:2)” 자신이 스스로 죄의 이름도 부르지 않을 뿐아니라, 다른 죄를 짓는 사람들도 삼가고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공부한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죄들을 하나하나 다루고 있는 서신서로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없애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한 서신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범하지 말고 죄와 맞서 싸우고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싸우고 대적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6,7)”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맺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8,9절에서는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자백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릴 치유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군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말하면서 진리의 띠,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을 갖춘 자는 누가 봐도 군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 중에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이 어둔 세상의 주관자, 악한 영들입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고 죄와 싸우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어’라는 자세는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환경과 다른 사람을 핑계 대는 것도 군사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무기를 잘 다듬어 이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죄악들, 시기, 질투, 분노 등과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1)” 사도 요한은 죄에 대항해서 싸우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완벽하게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항해서 싸우지만 죄에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는 이 죄에 대한 해결방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지은 죄는 예수님께서 다 해결해주셨다고 생각하는데, 구원받은 이후의 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의 죄의 문제의 해결방법도 역시 그리스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는 오늘날의 변호사와 같습니다. 법정에는 죄인과 검사, 변호사, 재판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재판관은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의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유일한 아버지, 오직 한분 밖에 없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이 되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재판장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할 때 그를 고발하는 자는 사단입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계12:10)” ‘참소’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이라는 뜻입니다. 사단은 아마도 하나님께 “당신이 거룩하다고 한 이 백성들을 보십시오. 이런 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의로운 사람입니까?”라고 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던 욥을 시험코자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변호사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예수님께서 대언자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고 계시고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범죄할 때도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의로우셔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값이 치러지지 않았다면 의로운 자의 변호만으로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2)”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우신 변호사이자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2:5)”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2:18)”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셨을 때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부터 죽을 때까지 지을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단이 우리를 참소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내가 이미 죄값을 치렀다고 변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하셨지만, 매순간 하늘에서 사단이 참소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그 은혜를 그리스도께서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9)” 우리는 죄를 짓는 순간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과거로부터 미래의 죄까지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면 죄를 마음껏 지으면서 살아도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5,16)”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이제는 죄에 순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한 그리스도인은 이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3-10)” 이것은 마태복음 7장에서 언급한 ‘천국에 들어가는 자’,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을 아는 자’이고 지키는 자가 아니면 거짓말하는 자, 진리가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고 죄를 범했을 때도 주님을 의지해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주를 영접한 자,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아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또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5)” 사랑이 없이 계명만 지킨다면 그것은 ‘외식’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는데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사랑인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분명한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계시록 2장에서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진 사람으로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6)” 이것은 분명한 순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5:1)” 진정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님의 본을 따라 살아갑니다. 여기서 “행하다”의 표현은 걸어가는 것(walk), 동행의 의미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만찬을 드실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대었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면 그 품에 기대었을까요. 그는 또한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46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신다면 죄를 범하지 말고 죄와 싸우고 그것을 제어하기 힘쓰기 바랍니다. 죄를 짓더라도 주님께 나아와서 회개하시고 용서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