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3편
주제: 하나님 안의 참된 평안
설교자: 최종혁

 

시편 1편과 2편에 이어 오늘은 시편 3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3편은 1,2편과는 다르게 시작합니다.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하고, 2편에서 “어찌하여”로 시작한다고 해서 3편이 “여호와여”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3편의 시작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입니다. 이것은 표제라고 부르는데 성경에서 시편에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목이기 때문에 본문과 구별을 짓기 위해 일반적으로 작은 글씨로 적혀있습니다. 시편이 아닌 다른 성경에도 이런 제목들이 붙어있지만 그것은 번역하는 사람들이 본문 내용의 핵심을 담아 붙여놓은 제목이므로 시편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이 아닌 성경의 제목은 혹 잘못될 수도 있지만 시편의 제목은 잘못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을 읽을 때 이 표제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3편의 표제를 통해 우리는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쓰여졌던 상황이 압살롬을 피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피난 중에 도망하면서 쓴 시입니다. 그 상황을 고려하면서 눈여겨 볼 것은 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 이 말은 밤에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 때문에 시편 3편을 ‘아침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당시 다윗의 상황 때문입니다. 전쟁 중에 피난하던 다윗이 어떻게 편안하게 누워 자고 깰 수 있었을까요?

통계상 우리나라 국민의 4명 중 1명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피곤해 하고 쉬고 싶다고 말하는데 왜 그들은 잠을 자지 못할까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잠자리가 바뀌었거나 온도가 잘 맞지 않아서, 너무 시끄러워서 등 환경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몸이 좋지 않아서 잠을 못잘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요인은 요즘 들어 문제가 되는 것들인데 바로 좋지 않은 습관들 때문입니다. 뇌를 자극하는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거나 자기 전에 카페인을 복용하는 것이 잠을 못 자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치료 가능한 것들인데 이보다 더 심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원인은 바로 고민, 걱정, 염려, 분노와 같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입니다. 갈등과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오늘날 불면증이 증가하는 가장 큰 원인이 스트레스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마음의 짐들입니다. 전쟁 중에 도망하고 있던 다윗, 그가 가진 걱정, 고민, 염려는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그가 어떻게 5절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먼저 다윗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하에 등장합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삼하13:1).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로 외모가 준수하고 흠잡을 떼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누이 다말이 있었는데 압살롬의 이복형제 암논이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암논의 사랑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 다말을 겁탈하고 맙니다. 그 일 때문에 압살롬은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가 그를 죽이고 도망하게 됩니다. 아버지 다윗은 그런 아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끓는 마음이 있었고 그와 함께 하고 싶어했습니다.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13:37).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14:1). 군대장관인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알고 압살롬을 데려오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윗과 압살롬은 화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다윗 왕과 화해한 후에 자신의 군대를 조직하여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15:1).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에게 나아가면 성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그들의 사연을 듣고 자신이 해결해주겠다며 백성들의 마음을 훔칩니다.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15:6). 압살롬이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15:12). 어느 정도 세력이 모였을 때 그는 헤브론으로 내려가서 반역을 시작하고 점점 많은 이들이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15:13,14). 다윗은 결국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도망하기로 결정합니다. 자신이 총애하던 아들이 배역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고 자신을 치러 오는 상황입니다. 아들이 반역을 한 것보다, 쫓기는 신세가 된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이 모든 일이 다윗의 죄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12:10,11). 이 말씀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의 집에 칼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고 아내를 이웃이 범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집에 살인이 일어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여 일어났습니다. 압살롬이 옥상에 텐트를 치고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고통스러운 이런 상황에서 시편 3편을 쓴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1). 다윗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반역자들이 많아지면서 압살롬을 지지하는 백성들도 많아졌습니다. 전령은 모든 백성이 다 압살롬에게 붙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이 상황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에 압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상황은 우리들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전쟁을 겪고 있지는 않지만 삶에서 많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피로와 질병으로, 직장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사와 이해할 수 없는 후배 때문에 힘듭니다. 내 편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던 남편, 또는 아내, 자녀들이 나를 실망시키고 나를 힘들게 해서 원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닙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2).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많은 이들이 나를 대적하고 나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할 때 자신에게 닥친 문제의 해답을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말합니다.

“나의 방패”의 방패는 작은 손방패가 아닌 몸 전체를 다 가릴 수 있는 방패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보호하는 방패시라는 것입니다. 많은 대적들이 다윗을 공격할 때 하나님은 그를 둘러싸는 방패, 즉 ‘보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은 왕좌를 내려놓고 예루살렘 성을 떠나 도망하고 있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이 치욕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는 진정한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15:30). 다윗이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어가며 슬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슬픈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신 것을, 참 기쁨이 되시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에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에 주목했습니다. 대적에게 공격을 받는 치욕스러운 상황, 슬픈 상황이었지만 다윗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보호와 영광, 기쁨이 되신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속성에 “나의”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다윗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친밀한 관계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보호하시고 영광이 되시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 그저 멀리 있는 하나님이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격적 존재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기초해서 그는 4절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4). 그는 하나님께 구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의 고백은 달라졌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 그는 이제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지하여 편하게 자고 깰 수 있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 그를 대적하던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이제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두려움, 걱정, 염려, 근심이 더할 나위 없이 많은 상황이었지만 그는 평안히 눕고 자고 깰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7). 이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도우심을 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해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편히 자고 깨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지만 편안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기에 가능했던 일일까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8).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만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만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 개개인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우리의 상황은 염려할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기도할 상황도 됩니다. 하루하루의 걱정과 염려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을 줄 압니다. 그 속에 갇혀서 어찌해야 할 지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보다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 처한 상황이 너무나 암울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어찌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한 사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윗의 하나님은 다윗의 방패가 되시고, 영광이 되시며, 그의 머리를 드시는 분, 다윗과 친밀한 관계 속에 들어와 계신 분이었습니다. 다윗이 편히 잘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시고 여러분 각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직장 상사가 대적합니다’, ‘나의 아내가 나를 대적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어려운 환경이 나를 대적합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질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에 대한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그 어떤 존재,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