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
본문 : 누가복음 9장 1~9절
설교자 : 최종혁

우리는 그동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초점이 예수님에서 제자들로 바뀝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시기 보다는 제자들,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십니다. 제자들을 통해 사역의 범위를 확장하시고 제자들을 훈련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새롭게 열리게 될 교회 시대, 영적 의미에서의 하늘나라의 기초를 놓을 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훈련하십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기초적인 역할을 할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져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들의 성실한 일의 열매입니다.

1절에서 열두 제자를 모으시고 2절에서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8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기록되었고 9장에서 다시 제자들이 언급됩니다. 제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을 파송하신 이유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역의 확장입니다. 지금 시점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중간을 넘어선 시기입니다. 이제 곧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가실 것입니다. 그전에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의 곳곳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6절).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마지막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0:5~6).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아마 더 중요한 목적은 두 번째일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에 있어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에 빛이 되기보다 이방인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기보다, 종교적 의식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회개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제 일어나 이방인들을 몰아내자’고 하셨다면 그들은 기꺼이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들의 완악함으로 이방인에게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에 영원 전부터 있었습니다. 단지 감추어져 있었을 뿐입니다.

그 감추어진 비밀이 바로 어떤 민족의 구분도 없고, 남녀노소가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 된 한 새 사람이며 하나님의 가족이고 성전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열 두 제자들이 그 놀라운 교회의 터가 될 것입니다(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교회를 건물로 비유한다면, 우리 주님이 모퉁이돌이 되시고, 그분을 기준으로 해서 사도들은 터를 놓았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지금 준비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들이 직접 어떤 가르침을 베풀거나 이적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가르치고 이적을 행한 기록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이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냥 내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능력은 힘이고 권위는 권리입니다. 힘이 있으나 권리가 없는 경우가 있고, 권리는 있으나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과 권리를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든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두 가지 사역과 동일합니다. 두 사역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한 사역의 두 측면입니다. 8장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가 모든 피조 세계에 미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람과 파도, 귀신들, 질병과 심지어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이는 놀랍고 두려운 일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바람과 파도를 이겨보려 했지만 하지 못했고,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눅 8:25)”고 했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많은 귀신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괴롭게 했고 사람들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귀신을 그 사람에게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사람들은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눅 8:34-35)”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인간의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가진 돈을 다 허비하면서 병을 고치려 했지만 어떤 의사도 도움이 되지 않은 채, 12년을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옷 가에 손을 대었을 때 그 병은 즉시 나았습니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눅 8:47)”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게 된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체면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눅 8:56)” 이것은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누가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누가 이런 은혜를 베풀 수 있는가?

오직 능력 많으신 은혜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자들이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가족입니다. 이것이 8장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좀 더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일어나 이 썩어빠진 사회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전하셨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라는 것이 그분이 전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나와 순종했고 어떤 사람은 들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고, 이 모든 사역을 그 동안은 예수님께서 혼자 하셨습니다. 물론 8장 초반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12명의 제자들이 함께 다녔고 여러 여인들이 물질로 섬기는 일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이적을 행하는 일은 예수님만 하셨습니다.

하지만 9장에 와서는 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사역을 직접 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는 12명의 제자들이 이 사역에 동참하고, 10장에서는 70명의 제자들이 동참합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시면서 예수님은 가능한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원하셨고, 그 일을 위해 제자들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더 쉽고 간편한 방법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기를 즐겨하십니다. 평범하고 평범 이하인 것 같은 제자들을 통해 그런 큰일을 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일하시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라는 일반적인 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을 효율이나 효과를 생각해볼 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보면, 하나님은 굳이 가기 싫다는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바울로 심게 하셨고 아볼로에게 물을 주게 하셨습니다. 그냥 자라게 하실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굳이 평범한 제자들을 선택해서 훈련하는 수고를 하여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큰 착각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혹, 표현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전도해서 영혼이 구원 받고, 내가 말씀을 잘 전해서 성도들이 잘 배우고, 내가 잘 섬겨서 교회가 잘 돌아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그런 필요들을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통해서 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서 마치 내가 대단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격 없는 자를 구원하신 것이 은혜인 것처럼, 자격 없는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하고 그것을 특권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일하는 우리가 그것을 바라고 하나님이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은 또한 은혜로 그 남은 삶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그렇기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기적을 보아 왔는데 이제는 너희들이 해야 한다고 하니 흥분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기대가 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능력과 권위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 여행 중에 그들이 꼭 가져야할 태도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제자들을 훈련하기 원하셨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명령을 주시는데, 여행을 위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명령과 한 집에 머물라는 명령,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1.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이것이 아무 것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행을 위해서 따로 뭔가를 더 준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느 정도 여행에 필요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 해서, 혹시나, 보험용으로 무엇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만 가지고 최소한으로 여행하라는 것이 첫 번째 명령입니다.

“지팡이나” 지팡이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는 여행자의 필수품이었습니다. 길을 걸을 때 도움이 되고 방어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더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배낭이나” 오늘날로 말하면 크로스백과 같은 모양으로, 주로 농부, 목자, 거지, 순회 철학자 같은 자들이 사용하는 자루였습니다. 가방이나 자루의 목적은 저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양식이나 돈이나” 먹을 것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사먹으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돈도 필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벌 옷” 옷도 하나면 충분합니다.

여행을 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것을 준비합니다. 항상 고민하고 항상 후회되는 일이 짐 싸는 일입니다.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를 가지고 이것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좀 어렵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도 여행은 당일치기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보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제자들은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거지들처럼 구걸하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4절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어느 곳에 가든 그곳에서 그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을 통해 공급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생략했지만 마태는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했습니다. 즉, 그들의 필요는 사람들을 통해서 채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사람들을 섭외해두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거절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이 길을 가야 했을까요?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실 것임을 믿고 가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제자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태도는 바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2. 한 집에 머물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어느 지역에 가든지 한 장소에 머물 것을 말씀하십니다. 5절에서 이어지는 말씀처럼, 어느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집의 주인이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필요를 공급받는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한 집에서만 머물다가 그곳을 떠나라고 하실까요? 이 명령은 당시의 다른 순회 사역자(철학자)들의 관습을 염두에 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어느 한 곳에 계속 계시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라면 학교를 세우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철학자들이나 교사들은 이런 식으로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통해 필요를 공급 받았습니다. 8장의 시작에서 예수님을 물질적으로 섬겼던 여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그런 순회 사역자들은 사람들에게서 필요를 공급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필요’만을 공급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 집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면 다른 집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또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부를 쌓았습니다. 또한 머무는 집보다 더 편하고 좋은 집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가진 것에 만족하며 더 가지려 하지 말고, 또한 그들이 하는 사역을 통해 자신의 배를 불리려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쉽게 이런 잘못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곳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제자들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뭐든 희생하려 할 것입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또 없는 대로 제자들의 능력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나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두 번째 태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3.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5). 사도들을 거절하는 경우, 먼지를 떨어 버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지역을 다녀오면서 하는 행위였는데,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거룩한 땅에 들어가기 전에 부정한 것을 떨어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다녀온 그 지역 그리고 그 지역의 사람들은 부정하고 자신은 깨끗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들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위를 통해서 그들 즉, 제자들을 거절한 자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거절한 자들은 예수님을 거절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특별히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보내셨는데, 그들은 유대인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했기에 이방인과 같이 되었음을 이 행위를 통해 제자들은 선포했습니다. 즉, 이 행위는 거절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심판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증거’였습니다. 복음을 거절했다는 증거이고 또한 제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거절하는 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계속 그곳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멈춰야 할 때는 멈춰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지만, 우리만 통해서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구원하지 않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져야 할 세 번째 태도였습니다.

에수님께서 주신 세 가지 명령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니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 같지만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여행을 위해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실제적인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는 이 말씀만 믿고 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먹고 자는 것도 불확실한 상태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명령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사람들이 거절할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가라는 걸까요, 말라는 걸까요?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며,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할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도 채우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이 때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눅 22:35~36).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이 우리가 아무런 계획이나 계산 없이 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철저히 계산하고 계획하여 일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가운데 일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6).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했습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많은 시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각 마을을 다녔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 일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헤롯 안디바(안티파스)로서 주전 4년에서 주후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던 통치자입니다(눅 3:1). 9절에 나오는 것처럼 세례 요한을 참수한 왕입니다. 제자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곳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행했던 일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곳의 왕이었던 헤롯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전해질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의 사역도 그저 조용히 진행될 수는 없었습니다.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변화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헤롯은 당황했습니다.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헤롯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7). 이 일들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나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도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요한이 어떤 이적을 행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제자들이 전했던 메시지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사람들은 이 놀라운 이적들이 행해지는 것에 대해서 기적의 선지자 엘리야나 혹은 다른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나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후에 19절에서 좀 더 설명하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이런 일은 이 세상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특별한 경험, 죽은 사람들이 부활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헤롯은 이 일이 요한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한은 헤롯의 부도덕함을 지적했고 헤롯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가 참수했습니다. 헤롯은 눈엣가시를 빼낸 것처럼 시원해 했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마치 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더 큰 능력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던 것입니다. 헤롯은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20절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듣게 될 것입니다. 눅 23:6~12에 의하면 결국 헤롯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앞에서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잠히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헤롯은 그런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일에 동참합니다.

헤롯의 말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소식을 헤롯이 들었다면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 일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 일들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굉장히 실제적인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올바르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 돌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한 모든 일이 하나님 때문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와 같은 교훈들을 배웠을까요? 제자들은 분명히 이 교훈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 일을 위하여…기뻐했다”(행 5:41). 채찍에 맞았지만, 심지어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했을까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4-35). 사람들이 많은 재물을 그들 앞에 가져왔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이적을 행한 것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능력이 은혜의 선물임을 알았고,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일 이용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렸을까요?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행 4:21). 사도들은 그들이 행하는 이적이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그들은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일 할 때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도 모두 배워야 할 교훈들입니다. 어쩌면 나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릅니다. 소위 말하는 ‘전심 사역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 ‘전심 사역자’가 아닌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반심’으로 순종해도 되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찌 되었든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만 일꾼이 아닙니다. 교회의 리더들만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꾼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합니다. 누군가는 보이는 일을 하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합니다. 직접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나 물질로 동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타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일을 더 잘 감당하도록 훈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먹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태도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특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용하고 계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런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분이 나의 부족함을 채우시고 필요를 공급하시고 결국 그 뜻을 이루실 것임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습니까? 나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가 꼭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주님은 결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보상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께 영광 돌립시다.

 

구역 모임을 위한 질문들

  1.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꾼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일하길 원하십니까?

 

  1.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꼭 가져야 할 태도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거기서 어떤 교훈을 받았는지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