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정한 바리새인 되기
본문 : 누가복음 11장 37~44절
설교자 : 최종혁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런데 2017년 첫 누가복음 설교는 “화 있을진저!”입니다. 우리는 3년째 누가복음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선포하셨던 “화”에 대해 들을 것입니다. 이 “화”를 어떻게 “복”으로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헌금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믿어온 신앙의 유산을 귀하게 생각하고 지켜 가고 있습니다. 나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성경에 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또 연구하여 삶의 구석구석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성직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말씀을 알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우리는 ‘참 신실한 성도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고 말씀에 따라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모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고 말씀이 삶에서 역사하기를 바라던 사람들, 고민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오늘날 이곳에 살고 있었다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예배도 잘 참여했을 것입니다. 성경 공부에도 빠지지 않고 경건의 시간도 잘했을 것입니다. 아마 전도에도 열심을 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좋은 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사뭇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참 바리새인같으세요.’라고 말해보십시오.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의 바리새인은 당시 사람들과 참 다른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켰고 예수님도 그들에 대해서 강하게 책망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함께,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당시 그들이 세리와 창기들에 대해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의 모습을 보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앞서 말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이름의 뜻은 ‘분리된 자들’, ‘구별된 자들’로서 그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 말씀에 따라 구별된 삶을 살기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삶의 목표로 삼아도 괜찮을만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요? 무엇이 순수한 동기로 시작한 이 무리를 예수님의 혹독한 책망을 받는 무리로 만들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들을 그렇게 책망하셨을까? 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로 전에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성하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가지 측면에서 그들을 지적하시는데 그들은 전통을 성경보다 앞세웠고, 비본질적인 부분을 본질보다 앞세웠고, 사람을 하나님보다 앞세웠습니다.

1. 전통이 성경을 대신한다(37~41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37절) 본문의 상황은 이전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도 하고 시험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비추고 있는데 너희가 아직도 어둡다면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빛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빛이 밝은데 내가 어둡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미 밝게 비취고 있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때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방금하신 말씀의 가장 직접적인 대상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어떤 의도로 초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꼭 적대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유대인들도 식사 교제를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면서(45절, “율법교사”) 예수님만 제외할 수 없어서 초대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궁금해서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청에 응하셨고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할 좋은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8절)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긴 것은 위생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손 씻는 것은 그들의 관습을 따라 예식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행하지 않으셨기에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놀라고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예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정결 예식을 자주 행했습니다. 생활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의식적으로 부정해지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이방인을 만나거나 그들이 접촉한 무언가를 만지거나 하는 일이 있습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과 접촉하거나 그들이 만진 것을 만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경우들도 있으므로 이들인 자주 정결 예식을 행했고, 식사 전에도 손을 씻는 것으로 자신들의 거룩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했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의식이기 때문에 그냥 씻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식을 하기 전에 손을 씻고 해야 했습니다. 정해진 물을 정해진 양만큼 정해진 방법을 사용해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에 물이 닿지 않도록 하는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손톱에 흙먼지나 때가 있으면 먼저 제거해야 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페인트칠을 하다가 페인트가 묻으면 그것을 제거하고 의식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용도로 먼저 사용된 물을 사용해서도 안 됐기 때문에 큰 단지나 항아리에 예식에 사용하는 물을 따로 보관했습니다. 항아리 위에 작은 용기(달걀 하나 반 정도에 해당하는 물을 담을 수 있는)를 두고 그 용기로 물을 떠서 손을 씻게 했습니다. 한 번에 물을 쏟아 손 전체가 구석구석 씻겨야 하고, 손을 씻은 물이 이미 씻긴 곳으로 다시 가면 안 됐기 때문에 손을 쳐들어서 물이 손목 쪽으로 흘러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손이 정결하게 되었다고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늘 그렇게 해왔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어겼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일까요? 구약 성경을 보면 식사 전에 씻는 것이 언급된 부분이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관습을 따라했을 뿐입니다. 율법에는 부정하게 된 자들이 의식을 따라 정결하게 되고 특별히 제사장들이 직무를 행할 때 손발을 씻을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식사와 관련해서 모든 사람이 손을 어떻게 씻으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예식으로서 손을 씻는 것이, 성경에도 없는 이 의식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에서 만든 하나의 예식이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서 손발을 씻을 것을 명하셨다면, 우리도 제사장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냐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 하나의 전통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의 전통을 기록한 문헌을 보면 그들은 손을 씻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손을 씻었다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전통과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폐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전통을 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 자리에 두신 것뿐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고 충격적이었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 예수님은 전통이 가진 약점을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전통은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 행위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행위를 가져오는 마음, 동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정확히 이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결 예식이 자신들의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잔의 겉만 깨끗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겉이 깨끗하다고 자동으로 속이 깨끗하게 되지 않습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깨끗해 졌다고 생각했던, 혹은 그렇게 되고 싶었던 그들의 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네가 어떻게 알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분으로서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 안에는 악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이런 마음의 죄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십니다. 겉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속도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순종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시작해서 겉으로 이어지는 순종입니다. 이것을 애써 외면했던 바리새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리새인들은 이 말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들이 했던 것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롬 10:2-3).

이들에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는지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1절). 바리새인들이 구제를 안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열심히 구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그 마음으로 먼저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겉과 속을 모두 지으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결한 것은 그 마음에서 시작하여 행동으로 옮겨지는 구제입니다. 생색내듯이 종교적인 의무감에서 행해지는 구제, 그러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 양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든 가장 싫어하시는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눈이 어두운 자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대신합니다. 우리에게 혹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생각하는 모습이 있다면 우리도 이들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어느 사회든 모임이든 전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으로, 선택이 아닌 필수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큰 책망을 들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들의 두 번째 모습은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한다’입니다.

2.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한다(42절)

누가는 앞서 두 차례 예수님의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부귀를 추구하는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던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여기서는 6번에 걸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42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비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썼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말하는데, 이는 율법에 따르면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십일조를 드려야 했습니다(레 27:30).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이 말씀에 따라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사실 그 이상을 드렸는데, 그것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박하, 운향을 비롯한 여러 식물(허브)의 십일조였습니다. 이런 식물들은 굳이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했을까요?

울타리 치기의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뱀이 찾아와서 하와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본인이 혹은 아담이 울타리를 친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럼 만지지도 않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울타리를 친 것입니다. 아마 조금 더 나갔으면 보지도 말라고 했을 것이고, 반경 50미터 이내는 접근하지 말라는 식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울타리를 치는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그 울타리가 커져서 본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 이상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혹은 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이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했으니,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으니 무엇이 일인지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울타리 치기는 대개 처음 의도는 선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울타리들이 쌓여서 본래 의도는 희미해지고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십일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곡물과 열매의 십일조를 원하시면 이런 채소의 십일조도 드리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었고, 누구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즐겁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더욱 중요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부차적인 것이 핵심을 놓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가 필요 없다거나 그것 자체가 문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원하고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입니다. 그들은 비본질적인 것, 사소한 것에 집중함으로 본질적인 것, 정말 중요한 것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을 필수로, 본질적인 것을 선택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하면서 사소한 것도 버리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자들이 보이는 두 번째 모습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버려야할 바리새인의 모습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의 세 번째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3.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한다(43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절)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기뻐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기뻐했던 것은 “회당의 높은 자리” 그리고 “시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문안 받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는 회당의 앞쪽에서 회중을 마주보는 높은 자리가 있었는데,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그런 자리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인사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합니다. 나이에 따라서도 그렇고 사회적인 지위, 권력 등에 따라서 이런 것들이 결정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나 인사를 받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을 그들이 기뻐했고,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추구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생을 존경하고 알아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선생이 그것을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임 받기 원하는 이들의 교만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할 때 나팔을 불며 사람들 앞에서 구제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이 많은 곳, 공개된 장소에서 기도했습니다. 금식할 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사실은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더 걱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나’가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동기나 본질보다, 보이는 전통이나 비본질적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사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사랑했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의 세 번째 모습이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 평토장한 무덤(44절)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처참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평토장한 무덤”은 땅을 파서 시신을 묻고 그냥 덮어둔 무덤으로 아무런 표시가 없으면 무덤인지 알 수 없는 무덤입니다. 속에서 시체가 썩고 있고 그 위에 있는 사람을 부정하게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좋은 동기에서 경건을 추구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했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을 때, 그들은 말씀과 전통의 자리를 바꿨고, 본질과 비본질의 자리를 바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자리를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성경의 수호자라고 자부했으며, 본질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도전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하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마음의 소원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 즉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을 더 우선시하고 무엇을 더 중시하고 무엇을 더 사랑해야 하는지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웠기에 눈에 보이는 것에만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힘써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예수님께 나왔던 소경들처럼, 그들도 예수님께 나와서 보게 해달라고 구해야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밝히 보고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세상과는 구별될 것을 명령 받은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우리는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전하라는 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듯이 우리끼리 모이고 우리끼리 좋아하면서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가짜 바리새인, 바리새주의에 빠진 바리새인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 몸도 온전히 밝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 더욱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합시다. 그러면서 우리 삶을 돌아봅시다. 이것이 화 있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복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