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

본문 : 창세기 27장 1절~28장 9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살펴볼 본문은 27장뿐만 아니라 앞, 뒤로 조금 더 포함됩니다. 26장 마지막 부분과 28장의 처음 부분이 오늘 본문의 큰 틀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26장 34절에 에서가 헷 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기록으로 시작되고, 28장 9절에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기록으로 끝납니다. 에서의 결혼에 관한 내용은 본문의 중심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늘 본문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중심이 되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내용은 일곱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각 장면이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등장하고 그들의 대화를 통해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장면에서 가족이 다함께 등장하는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축복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인데 가족 각자가 따로 계획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집니다. 건강하지 못한 뭔가 문제가 있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럼 이 가정의 문제가 무엇인지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 해가 되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장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4절까지인데 이삭과 에서가 등장합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1)

지금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서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삭의 이러한 상태는 앞으로 벌어지는 일의 꼭 필요한 전제가 됩니다. 이삭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이삭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눈이 어두웠다는 말은 그의 육신의 눈이 어두웠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4)

이삭은 에서에게 사냥을 하여 자기를 위해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마음껏 축복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가정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려고 할까요?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유,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삭이 에서가 사냥을 해서 만들어주는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창25:28)

이삭에게 있어서 음식이 하나님의 계획보다 더 우선되는 것 같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먹으려고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사냥, 사냥한 고기’라는 말을 8번, ‘별미’라는 말을 6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 것과 비슷합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넘겨준 것처럼 이삭은 자기가 즐기는 별미에 눈이 멀어 에서를 축복하려는 것입니다. 이삭의 이러한 선택은 그의 영적인 안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 축복할 때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삭은 에서만을 불러 비밀스럽게 그를 축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삭이 자녀들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축복을 선포했다면 아마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삭은 자신이 생각한 비밀스러운 계획으로 인해 리브가에게 역으로 이용당합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면은 5~17절까지인데 리브가와 야곱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에서는 즉시 사냥을 하러 떠났고, 이삭과 에서의 대화를 들은 리브가는 또 다른 비밀계획을 세웁니다. 이 비밀계획은 이름 하여 ‘눈 먼 남편 속이기’입니다.

이삭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브가의 방법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리브가가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브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자신이 나서서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결코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그 뜻을 이루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심으로 합당한 때에 합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까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속일 수는 없습니다. 더 많은 구제를 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도둑질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악을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결과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는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오면 아버지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이 제안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이 고민하는 이유는 잘못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찔림이 아니라 자신의 거짓이 발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야곱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에서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거짓이 탈로 나서 저주를 받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리브가는 주저하는 아들을 다그칩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리브가는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의 아들아’ ‘내 말을 따르라’(8, 13)라는 말을 반복하며 밀어붙입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니까 아들은 어머니의 계획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지시한 대로 염소 새끼 두 마리를 잡아옵니다(14). 그리고 리브가는 그 염소로 이삭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에서의 좋은 옷을 꺼내 야곱에게 입힙니다(15).

지금 야곱은 이삭을 속이기 위해 옷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옷으로 속임을 당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한 대로 되갚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리브가는 염소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에 입힙니다(16). 이삭을 속이기 위해 여러 가지로 준비하며 수고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축복과 저주를 심각하게 대하는 걸까요? 이삭이 축복을 하든 저주를 하든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이 당시에는 아버지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권위로 집안의 모든 종교적인 일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축복은 곧 하나님의 축복이요. 아버지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와 같았습니다.

 다음 장면은 긴장되는 세 번째, 이삭과 야곱의 장면입니다. 18~29절까지인데 야곱은 들키지 않고 축복을 받아낼 수 있을까요?

야곱은 어머니가 만든 별미를 가지고 이삭을 찾아가서 자기가 에서인 것처럼 행동합니다(18-19). 그런데 야곱이 에서의 흉내를 잘 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삭은 ‘네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18). 에서를 기다리고 있던 이삭에게 야곱의 목소리는 에서로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을 마치고 오게 되었느냐?’ 그러자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20)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이용합니다.

이 말은 들은 이삭은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앞에 있는 자가 정말 에서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오라고 해서 직접 만져 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22).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은 이삭은 마지막으로 정말 에서인지 한 번 더 물어봅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24) 나이가 많은 이삭은 자신이 듣고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삭은 아내 리브가가 만든 음식을 먹고 야곱을 축복합니다.

야곱이 이삭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세 가지를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는데, 첫째, 제때 내리는 이슬과 기름진 땅을 빌어 줌으로써 땅의 풍요로움을 축복합니다(28). 둘째, 정치와 군사적인 주권을 축복합니다(29a).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되고 그들은 야곱에게 ‘굴복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축복과 저주 선언으로 선포됩니다(29b).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누구든지 야곱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다음 30~40절까지는 네 번째 장면인데, 이삭과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30)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고 나가자마자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드라마 같은 장면입니다. 에서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왔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서는 사냥한 고기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서 아버지를 찾아가 말합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1)

이삭은 그를 찾아온 에서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에서가 대답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32)

여기서 우리가 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맏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맏아들 이라는 말이 모두 5번 나오는데 우리 성경에는 모두 맏아들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는 두 개의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한 단어는 정말 ‘맏아들’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맏아들이 아니라 그냥 ‘큰 아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5번 중에 2번은 맏아들, 장자를 의미를 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19절에 야곱이 이삭에게 직접 “맏아들 에서”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지금 32절에 에서가 이삭에게 직접 “맏아들 에서”라고 말했을 때, 이 2번의 경우가 맏아들을 뜻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3번은 창세기의 저자가 에서를 말할 때인데, 1절, 15절, 42절 모두 ‘큰아들’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가 에서에 대해서 말할 때는 ‘맏아들’, ‘장자’라고 말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냥 ‘큰아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기 때문에, 그래서 에서는 더 이상 맏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은 에서를 ‘맏아들’이 아닌 ‘큰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이삭은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아들이 에서라는 사실을 알고, 에서에게 빌어줄 축복은 이미 야곱이 가져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에서는 동생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야곱이 자신을 속였기 때문입니다(36). ‘야곱’과 ‘속이다’라는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서 붙여진 이름인데 에서는 그 야곱의 이름을 ‘속이다’라는 새로운 의미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은 간교함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고, 훗날 하나님은 야곱의 이 이름을 다시 바꾸십니다.

에서는 지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울며 소리치지만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삭이 빌어줄 복은 야곱에게로 갔고, 에서에게 빌어 줄 복은 없었습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울며불며 매달리며 복을 빌어달라고 애원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일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셨습니다. 에서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크고 많은 것을 빼앗겼는가를 새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대처하기 위한 리브가의 계획이 이어집니다. 41~45절까지는 다섯 번째, 리브가와 야곱의 장면입니다.

분노한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리브가는 이러한 에서의 마음을 헤아리고 야곱을 친정 오빠인 라반의 집으로 도망시키기로 합니다(43). 에서의 분노가 사그라질 때까지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시켰다가 에서의 마음이 안정되면 야곱을 돌아오게 하겠다는 겁니다. 리브가가 몇 날 동안을 예상하며 간단하게 생각한 이 문제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야곱은 20년 동안 리브가를 떠나 살아야 했습니다.

이어지는 46절이 여섯 번째 장면인데 리브가가 이삭을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리브가는 아주 좋은 명분을 찾아 남편을 설득해서 자신이 아닌 이삭이 야곱을 보내는 것으로 일이 진행되도록 합니다. 리브가는 남편 이삭에게 가서 에서의 아내들에 대한 원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걱정을 곁들입니다. 이삭도 에서의 며느리들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었기에(26:35) 리브가의 생각대로 야곱을 라반에게 보내기로 합니다.

28장 1~5절까지가 마지막 일곱 번째, 이삭이 야곱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불러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지 말 것과 라반의 딸들 중 아내를 취하라는 권면과 함께 그에게 복을 빌어 주고 보냅니다.

특별히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 준 복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 주셨던 복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일곱 장면이 끝나고 다시 에서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에서는 자신이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한 것을 나름대로 수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인정을 받으려고 새 아내를 맞이하는데 자신의 큰 아버지가 되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를 맞이합니다. 물론, 에서의 이런 노력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좋게 보일 리는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정리하면, 이삭은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고, 에서는 야곱과 했던 맹세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리브가는 이 소식을 듣고 야곱이 축복을 받게 하려고 속임수를 씁니다. 그래서 이삭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야곱을 축복했고, 에서는 분노합니다. 결국 야곱은 이 일의 결과로 집을 떠나 멀리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가정의 책임자인 이삭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입맛’을 따르며 에서를 축복하려 합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의 속임에 넘어갈 정도로 눈이 어두웠고, 영적인 눈도 어두워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능력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이삭에 대한 기록은 끝이 납니다. 사실, 이 사건 후로도 이삭은 약40년이라는 세월을 더 삽니다. 하지만 그의 남은 삶은 기록되지 않으며 창세기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저자는 그의 나머지 이야기를 생략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창세기는 본격적인 야곱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이 가정의 어머니인 리브가는 어떠합니까?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축복을 받도록 하려고 남편의 약점을 이용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하나님을 신뢰함이 없습니다. 에서는 어떠합니까? 자신의 맹세를 저버리며 분노합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며 거짓을 말합니다.

이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서로가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황을 조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며 행동합니다. 그 결과로 다투고 나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제쳐 두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이기심, 남편과 아내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생각과 자녀를 향한 편애는 두 아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건강하지 못한 가정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부정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이들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삶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에도 그러한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거짓과 속임수,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과정을 무시하는 일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심, 이러한 죄들은 분열과 아픔과 분노와 원망을 가져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에 대한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고 내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려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무엇을 심고 있는지 주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심은 대로 그 결과를 거두게 하십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며 세속적인 가치를 따른 결과로 지금 통곡과 후회의 눈물을 거두고 있습니다. 야곱은 속임의 씨앗을 심었고 그 결과 자신도 라반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야곱도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속임을 당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위해 일을 꾸몄지만 그 일을 꾸민 결과로 아들과 헤어집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몇 날 동안 피해 있으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20년이 넘는 세월이 되었고 리브가는 야곱을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비록 리브가가 했던 일이 하나님의 뜻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했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선을 이루려고 악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 그것은 어려움과 위기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그런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말며, 각 사람이 양심에 따라 진리를 행할 것을 가르칩니다(고후 4:2).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과 조작이라는 수단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거짓된 방법을 버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족하기에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어떤 일이 있을지 또 어떤 상황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나의 삶의 목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선을 이루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017년 올 한해에도 그러한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