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선하신 하나님, 함께 기뻐하자

본문 : 시편 34편 1~10절

설교자 : 최종혁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코미디언, 희극배우는 찰리 채플린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한 사람의 삶이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처한 다윗이 처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코미디 같지만 다윗의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시편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부분이 많지 않은데 34편은 비교적 분명하게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기록된 것은 사무엘상입니다(삼상 21:10~15).

다윗은 매우 두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굳은 결심을 한 것을 다윗이 요나단을 통해 들은 상황입니다. 한시바삐 도망을 했습니다. 음식도 무기도 아무도 함께 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지 아는데 그가 혼자 자신을 찾아온 것이 너무 이상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지금 그의 상황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히멜렉에게서 약간의 음식을 얻고 골리앗의 칼을 받아서 계속 도망해서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다윗의 생각에 사울을 피해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딜까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적대 관계에 있었기에 그곳이 안전하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이었고, 그곳의 사람들이 다윗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필 무기라고 가진 것도 골리앗의 칼이었습니다.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골리앗의 고향에 간 것입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말을 아기스 왕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기스가 어떻게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게” 되었고 미친 체를 하여 쫓겨나 아둘람굴로 도망합니다. 사울을 피해 왔는데 다시 아기스를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수염에 흘리매” 다윗의 행동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갔던 용맹한 다윗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만큼 연약해진 모습입니다. 결국 그곳에서 쫓겨납니다. 그가 정말 미친 줄 알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 아둘람굴로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의 가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드는데,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강한 군대 군인들이 아니라 환란 당한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다윗이 탈출하게 되는 상황은 어떤 면에서는 희극처럼 우스꽝스럽습니다. 미친 체하며 대문을 긁고 침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글로서 읽고 있기에 우스울 수 있지만 그 상황 속의 다윗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외롭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위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코미디처럼 보이는 일을 하면서 목숨을 건지고 자기 주변에는 자신의 군대가 아니라 온갖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약속의 하나님보다는 가드 왕 아기스가 그에게 더 가까이 있었고, 능력의 하나님의 손보다 사울의 창이 그에게 가까웠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이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1-10절에서 그 하나님께 찬양하자는 말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찬양의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항상 찬양하자와 하나님을 찬양하자, 함께 찬양하자입니다.

 항상 찬양하자(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1절). 1~3절은 33편의 시작과 매우 유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33편은 의인들이 마땅히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할 것에 대해서 강조했다면, 34편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격려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에 대해서 1절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항상’입니다. 언제나,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다윗의 다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막내인 다윗이 왕으로 택함을 받았고, 아무도 감히 대적하지 못했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단숨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후 군대의 장이 되어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높여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인정하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교만해져서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만한 상황입니다.

신실한 자들이 좀 더 시험을 겪는 상황은 어려움이 있을 때입니다.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이 그런 상황입니다. 왕의 아들과 친구가 되고, 왕의 딸과 결혼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순조롭게 되어 가는 것 같은 때, 왕이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왕정 시대에 왕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 왕을 피해 외롭게 홀로 블레셋으로 망명을 떠났지만 그곳도 자신이 있을 곳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치욕스러운 일을 겪고 거기서 도망해 와야 했습니다. 지금 자신은 한 굴에 거하고 있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약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뿐입니다.

상황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려면 한없이 비관적으로 볼 수 있고,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영적 암흑기를 겪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상황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런 상황에서 힘들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갑니다. 이제는 충분합니다, 목숨을 거둬달라고 기도했던 그입니다. 모세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온유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이끄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며 울자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라며 이렇게 하실 거면 그냥 자신을 죽게 해달라고 구하기도 했습니다(민 11). 또한 베드로도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는 “모두가 주를 버리고” “내가 죽을지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잡히시자 예수님을 부인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다시 예전의 생업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 비관적으로 보일 때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도 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예들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쁘고 좋은 일이 많은 때는 신앙적으로도 뭔가 안정이 되는 것 같고 기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만찬을 떼는 것도 어렵고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을 해도 그리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도 아마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 역시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필요한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짐이 필요한 이유는 좋지 않은 상황을 우리 육신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불평하려고 하는 우리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언제든지 주를 찬양하겠습니다, 기뻐하겠습니다라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이런 다짐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어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분, 기뻐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다윗이 강조하는 찬양의 측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이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자(2, 4~7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절). 다윗은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영혼”이라는 표현은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의미상으로는 ‘나’와 동일하지만, 좀 더 진정한 마음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여호와를 자랑하리니…입니다. 여호와를 자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4~7절 말씀에 나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다윗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4절).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6절에서는 자신을 “이 곤고한 자”라고 표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상의 기록을 보면 마치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적인 기지, 혹은 꼼수로 위험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사람을 속인 것이기 때문에 잘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윗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그런 일을 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겼던 것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이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약한 모습을 보였던 다윗,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다윗에 대해 최소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신실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윗을 건지셨습니다. 다윗도 그 하나님을 잊지 않고 지금 이렇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특별한 경험이지만 다윗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5절). 여기서 “그들”이 누구일까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번역하면, “주를 바라보는 자들은 광채를 내고, 그들을 얼굴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그 얼굴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어쩌면 자신이 온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며 이런 표현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이 기록한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의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얼굴을 하나님께서 부끄럽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경험한 것입니다. 6절은 4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절). 다윗은 자신을 “이 곤고한 자”라고 하여 2절에 나오는 “곤고한 자들” 중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곤고한 자들이 다윗의 찬양을 듣고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다윗이 그렇게 하라고 격려하는 이유는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곤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다윗은 다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7절).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자,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서 그를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고 위험에서 건지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특별히 7절 말씀은 엘리사와 그 사환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왕하 6장). 아람 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서 엘리사가 있던 도단이라는 성읍을 에워쌓았습니다. 그것을 본 엘리사의 사환은 두려워하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절망합니다. 그 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사환을 안심시키면서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말합니다. 사환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밖에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기도하여 사환의 눈이 열렸을 때 그는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졌을 때도 그들 중에 하나님이 계셨고(단 3장),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이미 사자의 입을 봉하셨습니다(단 6장).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과 경험으로 증명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분명히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건 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야.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생각하셔서 이렇게 하신거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이렇게 된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낮아진 상황에 있지만 그래도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들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찾아온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성취한 것들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기 보다 그 모든 일을 하신 하나님을 자랑하길 원했습니다. 3절도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즉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곧 찬양이고 예배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중심에는 누가 있을까요. 우리의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찬양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이 높아지기보다 오히려 낮아지고 때로는 불쌍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향해서 책망하듯이 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들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 드러나고 더 높임을 받으셔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 내 상황, 내 기분이 예배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야, 나는 그런 상황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자들”은 낮아진 자들, 어려운 자들입니다. 만약 이들이 다윗이 자신에 대해서 자랑하고 했다면 그것을 듣고 함께 기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자랑했고, 그들도 같은 경험을 가지고, 혹은 같은 소망을 가지고 함께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절에서 다윗은 더욱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말합니다.

 함께 찬양하자(3, 8~10절)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3절).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것을 나누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합니다. 맛있는 음식, 좋은 노래, 재밌는 드라마 등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특별히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가 있으면 거기서 뭔가를 발견했을 때 그걸 정말 나누고 싶은데 그렇게 할 사람이 없어서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나눌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누군가에게 말했는데, 원하는 만큼 반응이 없으면 왠지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마트에 갔다가 재밌는 것을 봐도 누군가에게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에게 참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드라마, 재미있는 기사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광대하시고 그분이 높으시다는 것에 대해서 혼자만 알고 혼자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소리를 높입니다.

우리가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예배하는 것이 그래서 사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함께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정말 즐거운 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8절 말씀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8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여기 특이한 표현이 있습니다. “맛보아”라는 말은 실제로 음식을 맛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식을 먹어보고 그 맛을 분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요즘 먹방이니 쿡방이니 하는 것들이 유행해서 TV를 보면 ‘맛’에 대해서 열심히 연예인들이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들으면서 ‘아, 이런 맛이겠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것도 있고 어떤 때는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내가 이미 경험한 맛이 있으면 그것에 기초해서 어느 정도 상상이 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맛’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실제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맛보라’고 표현한 것은 그런 면에서 참 적합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은 글로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구나라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경험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고 감상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충격적이고 뜨거운 불 같은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8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9절), “여호와를 찾는 자”(10절). 여호와께 피하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를 찾는 자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11절의 말씀부터 나오는데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하는 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경험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복이 있도다”, “부족함이 없도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고 더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의 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항상 즐겁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도전

그리스도인의 삶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희극입니다. 우습다는 말이 아니라 즐겁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절대 비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비극이 될 수 없습니다.

새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혹은 그냥 열심히 살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계획이 있든 없든 이 한 가지가 우리의 올 한 해, 혹은 삶의 목표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자. 그래서 하나님을 항상 찬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