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 없이 사는 교회는 들을지어다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4절~22절

설교자 : 이 병 권

지난 13일에 울진과 삼척 지역에 열흘째 계속되었던 산불이 진화되었습니다. 역대 산불 중 가장 긴 시간으로 213시간을 기록했고 피해 면적이 축구장 3만개, 서울의 1/3에 해당하는 지역이 불에 탔습니다. 울진에서만 피해액이 1300억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금액은 더 늘어날 거라고 합니다. 정부는 산불 피해를 입은 삼척과 울진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산불 피해에 대한 복구비를 지원받게 되어서 지자체의 재정적인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해주민에 대한 재난지원금과 함께 지방세 납부유예, 공공요금 감면 등 간접적인 지원도 시행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우리는 그런 도움 없어도 됩니다. 우리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만큼 돈이 많다는 말이고,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계시록의 일곱 번째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라오디게아 도시가 그러했습니다. AD 60년에 큰 지진이 라오디게아와 그 주변의 도시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로마의 재정적인 지원 없이 도시를 재건합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라오디게아는 스스로의 재정적인 힘으로 폐허에서부터 일어섰으며 우리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만큼 라오디게아가 부자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는 어떻게 이렇게 부자가 되었을까요?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요소를 언급합니다. 금융, 양모, 의료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이 세 가지의 중심지였습니다.

첫째, 금융. 소아시아 지역에 무역을 위한 중요한 길이 두 개 있었습니다. 바다로 연결된 에베소로부터 동쪽으로 이어지는 무역로와 버가모에서 주요 도시들과 연결되어 남쪽으로 이어지는 무역로입니다. 그리고 두 무역로가 만나는 지점에 라오디게아가 있었습니다. 가로 방향의 도로와 세로 방향의 도로가 만나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이러한 지역적인 특징으로 돈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부자들이 모여 들었고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은행이 발달되었는데, 로마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키케로가 남긴 글에 라오디게아에서 재정 증권을 돈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뉴욕이나 홍콩과도 같은 금융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둘째, 양모. 라오디게아는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땅은 좋은 목초지가 되어서 양을 키우는데 적합했습니다. 양모를 생산하는 다른 도시들도 있었지만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양모는 윤기가 나고 품질이 좋았기에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양모로 만든 옷을 ‘트리미타’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명품처럼 하나의 브랜드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라오디게아를 ‘트리미타’를 만드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트리미타리아’라고 불렀습니다. AD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공의회에서 라오디게아를 ‘트리미타리아’라고 불렀던 공식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셋째, 의료. 라오디게아에는 의료 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하면 의과대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사로 훈련받기 위해 멀리서부터 라오디게아를 찾아왔습니다. 이 학교에는 유명한 의사들이 있었는데 당시의 주화에 의사들이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실력 있는 라오디게아의 의사들은 병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었는데 특히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던 약이 안약입니다. 안약은 풍토병이었던 눈병에 효과가 좋아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라오디게아의 큰 수입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가 어떻게 돈이 많은 도시가 되었는지 역사적인 배경을 참고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의 부요함이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 상태가 가장 안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칭찬은 없고 책망만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말씀하신 책망은 좀 충격적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그냥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너를 뱉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기에 주님께 이런 책망을 들었을까요?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15) 행위는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통해 그들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미지근했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의 특징을 알면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고 풍족했던 라오디게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물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인근의 강은 물살이 세지 않아서 물을 끌어오기가 힘들었고 건기에는 강이 말라버려서 그마저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북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히에라볼리와 동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골로새에서 물을 끌어왔습니다. 북쪽의 히에라볼리는 석회 성분이 다량 함유된 온천수가 유명했는데 피부염 치료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터키의 이 지역은 온천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데 ‘파묵칼레’라고 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의 골로새에는 카드모스라는 높은 산이 있었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차갑고 순수한 물이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히에라볼리의 온천수와 골로새의 냉수가 수로를 따라 라오디게아에 도달하면 더 이상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뜨겁지 않은 온천수는 더 이상 치료를 위해서 사용할 수 없었고 석회 성분이 들어있는 물이기에 식수로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미지근하게 데워진 냉수도 그러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뜨겁지도 않았고 차지도 않았고 미지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상태는 그들의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고 주님께 무익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입니다. 이 평가의 확실함은 주님에 대한 묘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14).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틀림이 없습니다.

차라리 주님을 모른다고 믿음이 없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행위에서는 주님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저렇게 사는데 어떻게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음표가 생깁니다. 그 모습을 보시는 주님은 어떠하실까요? 그 가식적인 삶을 그 가증스러운 행위를 견딜 수 없으십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뜨거움이 식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갓 구원받고 뜨거움으로 수고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그렇지 않은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미지근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를 미워하십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18:21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언제까지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될 만큼 우리의 인생이 길지가 않습니다. 한 번 뿐인 우리의 인생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열심’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충격적이고도 무서운 주님의 책망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정말 사랑하기에 때로는 엄하게 대하시고 때로는 회초리를 드시는 겁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열심과 회개를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회개함으로 열심을 내야했습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열심의 부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문제는 문제를 모르는 겁니다. 문제를 모르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반성의 부재라 할 수 있습니다. 반성은 자신에 대해서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반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착각이고 무지입니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가 물질적인 풍요에 빠져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성이 없는 삶을 삽니다. 자기만족에 빠져서 스스로를 점검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자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가난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그들이 만든 명품 ‘트리미타’를 입으며 좋은 옷으로 자신을 꾸미고 있었지만 주님은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효과 만점의 안약을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살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앞을 보지 못한다고 눈 먼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였습니다. 비참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했고 병들었고 헐벗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자기만족과 착각에 빠진 무지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님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말씀하십니다. ‘내게서 사라’ 그들이 잘 했던 일, 시장에 가서 상인들에게 돈을 주고 필요를 사는 것처럼 주님께 가서 정말 중요한 것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좋은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주님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줄 수 없는 것,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주님이 은혜로 주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이 사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실제로 내가 주님께 뭔가를 드리고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사야 말씀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 그래서 회개함으로 주님께 나오는 자에게 주님은 영원한 양식, 완전한 의로움을 주십니다.

이처럼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것을 말씀에서 세 가지로 표현되는데 불로 연단한 금, 흰 옷, 안약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꼭 맞는 맞춤형 비유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가난과 벌거벗은 것과 눈 먼 것을 주님께서 해결하십니다. 그들이 자신의 영적인 실상을 바로 알고 주님께로 돌이킨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와 같습니다. ‘더 이상 너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내게로 돌아오라!’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14)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의 시작이시고 창조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적인 부와 성취에 빠져서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 그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주님의 부재입니다. 주님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의 삶에 주님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 없이 자기 힘으로 삽니다. 부족함이 없기에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주님 없이 살아도 괜찮습니다.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을 점검하고 돌이키는 반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도 없습니다. 그저 그런 미지근한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의 문제는 주님의 부재로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주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말을 좀 더 의미를 살리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요하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강조점이 ‘나’입니다. 내 힘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부족함이 생기더라도 언제든 내가 내 힘으로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 없이도 괜찮다고 착각하며 사는 겁니다.

주 없이 사는 것, 이 심각한 문제가 단지 라오디게아 교회만의 문제일까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겪고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힘들었습니다. 본문을 연구하는 어려움을 떠나서 이 말씀의 무게가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찬양이 있는데, Can’t live a day 라는 찬양입니다.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I can’t live a day without you(주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네)

나는 주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내 삶에서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내 뜻대로 내 힘으로 내 가진 것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하고 주님 없이는 안 된다고 그렇게 주님께 매달리고 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냥 풍요로운 세상에 빠져서 주님 없이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내 삶에서 주님을 찾지 않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신앙으로 살고 있는가? 열심을 내고 있는가? 주님을 향해 뜨겁게 달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뒤를 돌아보고 안주하고 멈추려고 하는가? 그냥 적당히 힘들지 않을 만큼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주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으십니까?

‘네’라고 대답하기 어려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내 삶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주님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면, 회개함으로 주님께로 돌이키면, 그렇게 내 삶에 주님을 초대하면,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먹으며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식사는 그 사람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는 신분과 계급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왕이 먹는 음식과 종이 먹는 음식은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종은 절대로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다. 식사는 비슷한 사람끼리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스스로 낮추셨고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셨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다윗의 은혜로 왕의 식탁에서 왕과 함께 식사하게 된 므비보셋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는데 그런데 삶에서 주님을 모른 척하고 살고 있다면 주님 없이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살고 있다면 나를 의지하고 나를 위해 살겠다고 나 중심으로 산다면 어찌된 일입니까! 언제까지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그분의 음성을 외면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그 말씀을 덮어두고 회개하기를 미루어야 할까요? 언제까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세상과 주님을 두고 머뭇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요? 이제는 결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두 사람 모두 같은 고백을 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다는 같은 고백이지만 그 이유는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스스로를 의지하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다윗이 했던 고백처럼 여러분도 주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면 반성의 부재가 생기지 않도록 나의 영적상태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열심의 부재가 생기지 않도록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부재가 생기지 않도록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자리에 주님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를 위한, 나 혼자만의 은밀한 자리는 없습니다. 주님을 초대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십시오. 주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을 범사에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부요함이 아니라 영원한 부요함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눈을 열어서 정말 가치 있는 귀한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시고 주님의 의로움으로 옷 입혀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가 참된 만족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문을 열고 여러분의 삶에 주님을 초대하시겠습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듣고 합당히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