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방법

본문: 시편 75편

설교자: 최종혁

생각과 감정이 있고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알고 인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수록 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수록 하나님의 주권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고 결국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수준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게 된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하여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세상 가운데 있는 불의다. 악한 자가 승승장구하고 선한 자들만 고통을 받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사회 국가적으로 공분이 일어나는 일을 보게 될 때 그렇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정말 선한 지, 공의로운지 모르겠는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도 든다.

욥이 그러했다. 욥기는 욥이 당한 고통과 그 속에 드러난 그의 인내에 대해서 기록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다. 고통 가운데 욥은 계속해서 고통의 이유를 찾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 욥이 진심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말들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의문이었고 부정이었다.

하박국 선지자는 개인보다 국가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질문을 던졌다. 선지자는 유다 안에 있는 불의를 지켜볼 수 없었다. 악인이 의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율법의 공의는 무너진 유다를 언제까지 그냥 두시겠냐고 하나님께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곧 갈대아 사람들, 즉 바벨론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하박국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더 악한 자들로 그런 심판을 행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악을 심판하는 쪽은 선이어야 하는데, 더 악한 자들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을 받은 요나가 불순종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가 보기에 니느웨는 그런 메시지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요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리고 요나는 악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분노했다.

때로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보다 정의롭고 공의롭다. 모든 것을 알고 주관하시는 하나님보다 내 판단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욥기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던지는 의문이 정도를 넘어설 때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기초에 두고 던지는 타당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자체를 묻는 질문이 그렇다. 더 믿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심이고 불신인 질문을 할 때 그렇다. 우리의 말이 불만, 불평, 원망이 될 때가 그렇다.

야고보는 다른 형제를 판단하고 비방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약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입법자, 즉 법을 세우신 분이 한분이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하나님이 정하셨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재판관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누구를 구원할지, 누구를 멸할지도 하나님이 정하신다. 삼권분립은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겠지만, 완전하신 하나님께는 불필요하다.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시면 된다.

시편 75편은 아삽의 시로서 바로 그런 절대적인 재판관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시편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 시간처럼 말씀이 구성되어 있다. 1절은 청중의 상태다. 2-5절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6-8절은 설교자의 외침, 그리고 마지막 9-10절은 개인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청중의 상태(1절)
1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이 말씀의 인과 관계는 뒤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전파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을 느끼고 알 수 있었다. “이름”은 수차례 시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 자체를 의미하는데, 특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선포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사하고 감사한다는 말이다.

“주의 기이한 일”은 주로 하나님의 창조나 구원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이 둘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창조가 질서를 세우는 일이라면, 구원은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에는 심판도 항상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조의 능력과 구원의 능력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어떤 나라, 어떤 민족보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기이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광야를 안전하게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이었다. 가나안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 편에서 싸우셨기 때문이었다. 남겨진 가나안 민족이 그들을 괴롭힐 때 사사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이렇게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 주의 기이한 일들을 경험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을 이들은 선포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다. 시편을 보면 이들은 꼭 그런 민족적인 구원 뿐 아니라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도 선포하며 하나님을 예배한 것을 알 수 있다.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때, 원수들에게 승리했을 때, 죄에서 회복되었을 때 등이 그런 경우였다. 하나님의 구원을 혼자만 간직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서 공유하고 하나님의 가까우심을 함께 기억하고 예배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예배였고, 사실 오늘날 교회의 예배도 동일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 예배한다.

1절에서 중요한 표현은 “감사하고 감사한다”는 동사다. 시편 전체에서 이 동사는 항상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진행될 행동을 나타내는 형태로 사용된다. 지금 감사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항상 사용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시편에서 유일하게 과거부터 진행되어 온 행동을 나타내는 형태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감사했고 감사해 왔다”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는 일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 맥락에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라 자손의 시편인 44편을 보면 그들이 실제로 ‘과거형’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시 44:1)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억한다. 그들 역사의 모든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그들은 선포한다. 그러면서 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 44: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계속해서 자랑해온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가까운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다.

시 44: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75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은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왔다. 문제는 지금인 것이다. 지금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지금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신경쓰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다.

이 시편은 공동체의 시편이기 때문에 각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거리감은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는 “하나님은 여전히 가까이 계시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베풀고 계셔”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누군가는 “하나님은 이제 완전히 우리를 떠나셨어. 그분의 역사는 과거의 일일 뿐이야”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누군가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어떤 사회의 불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바가 각자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2-5절)
의인에게
2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2-5절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특히 2-3절은 의인에게, 4-5절은 악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2-3절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나”를 강조하신다. – “바르게 심판할 자가 바로 나다. 땅의 기둥을 세운 자가 바로 나다”

먼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위로의 말씀은 “하나님이 때를 정하셨고 하나님이 방법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바르게 심판하실 것이다. 즉, 심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한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3절은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3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땅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소멸될 수 있다. 모든 질서가 무너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어찌되려나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마치 세상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땅의 기둥을 세운 자가 바로 나다” 즉, 세상이 흔들린다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흔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게 붙잡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보라. 하나님이 겨우겨우 힘겹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창조를 방해하지 못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는 우리처럼 힘들어서 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그날은 축제의 날이었다. 그런 하나님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 어떻게 세상의 공의를 실현해야하는지 고민하고 계실까? 하나님이 노력은 하는데 잘 안되는 것일까?

아니다. 2-3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강조하셨다고 했는데, 2절에서는 “나 일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셨고 3절에서는 “나였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셨다. 즉, 창조 때 땅의 기둥을 세우신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바르게 심판하신다는 말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단지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만 알려주셨다. 그 때가 언제인지, 어떤 방법으로 될 것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이 우리가 바라는 시간, 방법과 일치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공의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실망한다.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한다. 왜 빨리 심판하지 않으셨나고 따지기도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이 우리와 다른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굉장히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판단하고 하나님은 모든 정보를 가지고 계획하시기 때문이다. 한쪽 편의 말만 들은 판사의 판단과 양쪽 편의 말 뿐 아니라, 증인들의 말, 녹음 기록, CCTV 등도 모두 파악한 판사의 판단 중 어느 것이 더 공의로울까? 당연히 후자다. 한쪽 말만 들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목적은 셀 수 없이 많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결과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땅의 민족들이 극도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이기도 했다. 즉시 심판하지 않으신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기도 했고 죄가 가득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 신뢰하기를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아시고 주관하신다. 그런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이 우리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내가 언제 이렇게 할 것이니 기다려라”가 아니라, “내가 할 것이니 기다려라”였다. 의인의 믿음은 시간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주권으로 일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악인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인에게
4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5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악인은 오만하고 교만한 자로 표현되고 그들의 하는 일이 “뿔을 드는 것”에 비유된다. 구약에서 뿔은 힘과 권위를 나타내고, 종종 부정적으로 여기서처럼 교만과 관계되어 사용된다. 뿔이 있는 야생소를 연상해 보면 된다. 그들은 뿔을 높이 들어서 자신의 힘과 권위를 과시한다. 교만한 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만한 자들은 단순히 자기 자랑을 좀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특징적으로 자랑하는 자들이다. 자기를 믿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절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이다. “교만한 목”이 바로 그런 의미다.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하는 목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굴복하기 원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주먹을 흔들면서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고 선포하는 자들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악인들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뿔을 들지 말라 …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회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2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시간과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회개는 지금해야 한다.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답답한 일일 수 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은 그렇게 의인에게는 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기다리며 신뢰하게 하시고, 악인에게는 경고를 주시면서 당장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어지는 6-8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외침이다. 이 외침도 의인과 악인을 향한 외침으로 나누어져 있다.

설교자의 외침(6-8절)
의인에게
6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높이는 일은 의인의 입장에서는 구원이고 악인의 입장에서는 심판을 의미한다. 그 일은 동쪽, 서쪽, 남쪽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의인들이 바라는 구원과 심판은 그런 곳에서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 북쪽에서는 올 수 있다는 말인가? 북쪽은 아예 계산에도 없다. 북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구원이 오는 곳이 아니다. 그들은 항상 북에서 오는 민족들에게는 침략을 당했었다. 당연히 북쪽에서 구원은 오지 않는다. 6절에서 설교자가 말하는 것은 그 어떤 다른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7절).

때로 우리는 세상의 공의를 어떤 사람이나 세력에게 기대하곤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어느 정도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이 참된 공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참된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신다. 오만한 자, 스스로 높이는 자는 하나님이 낮추시고, 겸손한 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는 자를 하나님은 높이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제자리’이기 때문이다. 창조 때 만문을 제자리에 두신 하나님은, 죄로 엉망이 된 세상을 다시 제자리에 두실 것이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은 자리에, 낮추는 자는 높은 자리에 두실 것이다.

이 일은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하신다. 구원을 기다리는 자는 시간과 방법을 정하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반대로 설교자는 악인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악인에게
8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잔이 준비되어 있다. 예언서는 종종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포도주가 가득 한 잔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술 거품이 일어나고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하다는 것은 이 잔이 잘 준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당할 심판을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마침내 그 잔을 쏟아 내실 것이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한 때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의 기다림은 없다. 악인은 그 찌꺼지까지, 즉 하나님의 진노를 남김없이 담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충동적으로 사람들 심판하거나 하지 않으신다. 한편으로 이것은 감사한 일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 땅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악인의 죄를 잊거나 하시는 것은 아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그 진노의 잔에 든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값을 치뤄야한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이 값을 치룰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는 유한한 우리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무한하신 하나님을 부인하며 스스로 높이는 악인의 죄에 대한 형벌은 영원한 죽음이다. 우리는 그렇게 값을 치르기를 선택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대신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으신 무한하신 하나님,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에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마 26:39).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그 잔을 마시는 것이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두번째 방법이었다. 그것이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공의였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죄 없음’을 선포하신다.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회개다.

그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할까?

개인의 적용(9-10절)
9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10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10절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반복 진술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고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1절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가까우심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과거부터 해왔던 그 일을 지금도 계속하는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 여전히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과 방법으로 그 공의를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이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그리고 그 신뢰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들을 선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바울은 우리가 계속해서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할 이유를 같은데서 찾았다.

갈 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무엇을 심든지 우리는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은 이 땅에서는 사실이 아닐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이라고 부르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야외 집회같은 것을 할 때 종종 부르는 찬송 ‘참 아름다워라’는 본래 가사의 반 정도만을 번안해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실려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후에 그 찬송가의 가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 가사 중 일부를 번역하자면 대략 이렇다.

이 땅은 내 아버지의 세계입니다. 잊지 않게 하소서. 비록 악이 성행할지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다스리심을.
이 땅은 내 아버지의 세계입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으신 예수께서 만족하실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 세상을 보면서 낙심이 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크신 하나님의 세계에 속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을 볼 때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모든 질서를 다시 세우실 것이다.

그때까지 그리고 그 후로도 우리가 할 일은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 은혜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며 믿음 가운데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