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를 위해 죽고 사는 교회

본문 : 사도행전 12장 1절~19절

설교자 : 조 정 의

 

거의 일 년 가까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죽음의 공포가 전 세 계를 덮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거리를 두고 일상을 포기하고 심 지어 생업을 접을 만큼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에 소 망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죽음 자체는 두렵다.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죽음 자체의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커지고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질수록, 마 음속 깊은 곳에서 질문이 생긴다. ‘왜 살려고 하는가?’ ‘무엇을 위 해 살고자 하는가?’ 어떤 사람은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자아실현), 자녀를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해보고 싶은 것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서, 기쁨과 만족을 최대한 얻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가? 그 리스도인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대표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 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로다”(롬 14:8).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교회는 주님의 것이다.  교회는 주를 위해 죽고 산다.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12장 1-19절에서 만날 두 사도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의 지체이자 그리스도의 제자인 당 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보기를 원한다.

1.    주를 위해 죽은 자, 야고보(1-2)

야고보의 죽음은 갑작스럽다.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이 특별히 훈련한 삼 인의 제자 중 하나였다(눅 8:51; 9:28). 야고보는 당시 유대인이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여긴 로마식 처형법, ‘칼로 죽임’—참수형으로 순 교했다(2절).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실 것이라’는 주님 말씀대로 되었다(마 20:23).

야고보를 해친 세력은 그전까지 교회를 박해한 세력과 달랐다.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큰 박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곧 대 제사장 무리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통해 일어났는데(8-9 장), 야고보를 포함한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이 핍박을 받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절을 보면 그 때에라는 시점을 언급하는데, 이때는 바로 베드로 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난 직후이다(11장 1-18절). 종교 적, 사회적으로 유대인 공동체 상류 층 뿐 만 아니라 대다수의 유대 인에게도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이방인까지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위험하고 저급한 이단으로 취급 받을 만한 때였 고, 그 유대인들의 심리를 적시에 잘 이용하여 자기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했던 헤롯 왕이 바로 야고보를 죽인 범인이다(1절).

헤롯 왕조는 대대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수 역할을 했다.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나실 때부터 죽이려 했고(마 2:16),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이려 했다. 그의 여동생은 헤로디아로 예수님의 앞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을 참수했던 주적이었고(막 6:19), 삼촌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 심문했던 인물이다(눅 23:8).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선친이 처형되면서 네 살 때 로마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황제 가족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또래로 함께 자란 절친 글라우디오 황제가 세워지는 데 일조하고, 그 결과 헤롯 대왕을 뛰어넘는 영토와 권력을 황제에게 받고 ‘왕’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한 총독이 다스렸는데, 유대인 문화나 종교를 잘 모르는   이방인 지도자는 늘 유대인 공동체와 문제를 일으켰다. 헤롯 왕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겨 그곳 유대인들 특별히 상류층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유대인의 미움을 받던 신흥 종파 기독교를 박해하는 건 유대인 공동체 전체에게 호의를 얻는 데 아주 유리한 일이었다.

야고보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사람의 정치적 야망과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유대종교 지도자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긴 다수의 유대인들 때문에 야고보는 참수당했다. 심문도 없었고 합당한 변호의 기회도 없었고, 재판도 없었다. 부당한 고난, 억울한 죽음을 주를 위해 당한 것이다(벧전 2:20). 베드로가 잡혔을 때처럼 교회는 야고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고보를 살려주지 않으셨다. 주를 위해 죽게 하셨다. 누가가 아무런 설명 없이 야고보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충격이지만,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눅 14:26). 참 교회는 주를 위해 죽기 원한다.

2.    주를 위해 산 자, 베드로(3-19)

주를 위해 죽기 직전에 살아난 자는 베드로다. 헤롯 왕이 예상한 대로 유대인들은 야고보의 죽음(이 일)을 기뻐했다(3절). 그것을 보고 헤롯 왕은 베드로도 잡옥에 가두었다(4절). 베드로를 바로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교절 기 간이 시작되어 그 기간 동안 사람을 죽이는 일을 꺼렸기 때문이다(유월절부터 시작되는 약8일의 절기). 그래서 옥에 가두었다.

베드로는 전에도 옥을 탈출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5:17-20), 헤롯 왕은 평소보다 감시를 4배나 강화했다. 그래서 네 명의 군병 이 한 조가 되어 네 조가 24시간을 돌아가며 감시하도록 했다(4 절).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어 한바탕 유대인의 분노와 적개심을 끌어올린 뒤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목을 치면 헤롯이 원했던 호의와 지지를 최대로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한 날이 오기까지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 히 하나님께 기도했다(5절).

하나님은 야고보를 주를 위해 죽게 하셨지만, 베드로에 대해서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야고보는 때가 되었지만, 베드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야고보는 할 일을 마쳤고, 베드로는 주를 위해 할 일이 더 남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의사자(7절) 즉 천사를(8절) 보내어 베드로를 구원하셨다. 주를 위해 살도록.

베드로가 감옥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베드로는 누워 자고 있었고 천사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했고(9 절), 감옥 밖으로 나와 한 거리를 지나 천사가 떠나고 나서야 신이 들었다(10-11절). 베드로는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 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라고 말하며 깨닫게 되었는데(11- 12절), 정말 헤롯과 유대 백성은 그가 죽기를 원했지만, 하나님 은 그가 살기를 원하셨다. 그 뜻대로 베드로를 구하셨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이었다. 베드로가 갇힌 감옥에 두 군인이 베드로의 양 팔 혹은 양 다리에 쇠사슬을 채워 자신들의 몸에 어 두어 베드로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나머지 두 군인은 파수꾼처럼 문 밖에서 옥을 지켰다(6절). 게다가 여기를 벗어 나도 두 번째 파수꾼이 지키는 문이 기다리고 있었고, 마지막 육중한 철문을 열어야만 마침내 탈옥이 가능했다. 아무리 탈옥의 귀재라 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에겐 불 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쉬운 일이었다.

탈옥 과정은 다음과 같다. 주의 사자홀연히(갑자기) 나타났다 (7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광채옥중에 빛났다. 천사는 깊이 잠들어 있던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웠다(‘비교적 세게’). “급히 일어나라”라고 천사가 말하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졌다(7절, ‘어느 틈에 없어지다’). 천사는 베드로가 띠를 띠고 신을 신겉옷을 입게 했다(8절). 탈옥에 용이한 복장, 밖에서도 의심받지 않는 복장을 갖추려는 의도인 것 같다. 천사는 베드로에게 자신을 따라오라 했고 베드로는 나와서 따라갔다(8-9절).

첫째 파수를 지나 둘째 파수도 통과하고,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렸다. 군병들이 실수로 열어 둔 것도 아니고, 열려져 있던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살게 하셨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산 이유가 교회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간절히’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면을 묘사할 때 사용된 표현이기 때문에,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정말 합심하여 열정적으로 기도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음 장면을 보면 기도가 베드로를 살린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감옥 밖으로 나온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성도들이 주로모이는 장소 중 하나인 마리아의 집을 찾아갔다(12절). 마리아는 마 가(헬)라 하는 요한(히)의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부유했고 100 여 명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방(2층-다락방)이 있는 집을 소유하 고 있었다. 초대 교회는 그녀의 집을 예배하는 곳으로 자주 사용했었고, 그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한 장소, 예수 님의 부활 때 제자들을 만난 곳과 오순절 성령을 받은 장소도 아 마 여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12절).

베드로는 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고(현관문-뜰-대문) 그 소리를 로데(‘작은 장미’)라 하는 여자 아이가 듣고 영접하러 나왔다 (13절). 로데는 대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였는데, 너무 기뻐서 그만 문을 미처 열어줄 생각을 못 하고 안으로 달려 들어가 사람들에게 했다.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14절).

그때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이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그들은 로데에게 “네가 미쳤다”라고 말했다. ‘실성하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표현이다. 로데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라고 했고, 그러자 “그의 천사라”고 대답했다(15절). 미쉬나에 나오는 유대 미신에 따르면 각 사람은 수호천사가 있는데 그 천사는 수호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미신이 더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여길 만큼 사람들은 베드로가 탈옥했다고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베드로가 죽다 산 것이 기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야고보를 위해서도 기도했을 태지만 야고보는 죽었고,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정말 살아 돌아올 것을 믿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야고보는 주를 위해 죽게 하 시고, 베드로는 주를 위해 살게 하셨다. 죽든 살든 하나님 뜻대로 된 것이다.

베드로는 대문 밖에서 계속 그치지 않고 두드렸고, 마침내 사람들이 나와 문을 열베드로가 서 있는 걸 보고 놀랐다(16 절). 17절을 보면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는데, 하도 놀란 성도들이 아주 크고 흥분된 목소리로 베드로를 환영하 고 말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했고,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형제들(사도들) 에게 된 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17절). 잠시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고(행 15장에 다시 예루살렘에 있음), 헤롯은 베드로가 탈옥한 사실을 알고 파수꾼을 심문하고 죽였다 (18-9절). 경비병이 죄수를 놓쳤을 때 그 죄수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는 시민법대전에 따른 처벌이었다. 헤롯은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물렀다(19절).

3.    주를 위해 죽고 사는 교회(교훈)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참 교회는 주를 위해 죽고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또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 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 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어쩌면 당신은 바울이 말한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히 밝혔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 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시고 당신을 위해 살아나셨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예수님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고 예수님이 먼저 당신을 위해 살고 죽으셨다.

레베카 밴두드워드는 <여성들의 종교개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왕실의 부와 권력을 버리고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남 편과 자식을 잃으면서까지 헌신적인 섬김과 복음 증거의 삶을 산 열두명의 여성 종교개혁자들의 아름다운 삶을 그려냈다. 그녀는 책의 결론을 맺으며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남겼는데, 야고보    와 베드로 같은 삶을 산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얻은 교훈과 같다.

첫째, 교회는 환경과 상관없이 열매 맺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환경은 열매 맺는 데 걸림돌은 되어도 열매 맺지 못하는 핑계가 될 수 없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오히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환경을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요 15:2).

둘째, 교회의 각 지체는 다양한 정체성(아버지, 어머니, 직장인, 성도 등)을 가지고 살지만, 단 하나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제자에 집중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 것만 남는다(고전 3:13)

셋째, 그리스도가 주신 재능과 재물을 통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주인이 맡기신 재능과 재물을 주인의 유익을 위해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 청지기이지 주인이 아니다. 결산할 날 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마 18:23-35).

넷째, 충성해야 한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성취가 아니라 충성이다.

다섯째, 살고 죽는 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맡겨진 일을 다 마치면 하나님이 데려가신다. 주어진 일을 다 마쳤는데도 데려가시지 않거나, 주어진 일이 남았는데 데려가시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주를 위해 죽고 사는 건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의지와 능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     한 교제 속에서 먼저 우리를 위해 죽고 사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가능하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 주를 위해 산 것만 남을 것이고, 주를 위해 하지 않은 것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겠는가? 당신을 위해 먼저 죽고 사신 사랑의 주님을 위해 죽고 사는 교회가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