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와법

본문 : 로마서 7장 7~12절

설교자 : 이병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사전에는 마음이 곧고 착하여 법의 규제가 없어도 바르게 산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람은 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법이 하는 일이 자유를 제한하고 사람을 통제하는 일입니다. 강제성을 가지고 있고 법을 어겼을 경우 처벌이 따라옵니다. 자연스럽게 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설명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본문에서는 부정적인 설명, 그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나쁜 남편이었고 죽음을 통해서라도 벗어나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반감이 최대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바울의 말을 듣고 있다면 ‘거봐 바울도 그러잖아. 율법은 이제 필요 없어!’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7장에서 율법에 대해서 사용했던 표현들은 사실, 6장에서 죄에 대해서 사용한 표현들과 같습니다. 6장에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말했고 죄에서 벗어났음을 그리고 죄의 열매를 말했는데(6:2, 7, 21). 그러한 표현을 7장에서 율법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음을 말하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그런 율법에서 우리가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생명을 줄 것처럼 보였지만 율법을 좇는 사람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죄의 결과로 사망에 이르는 것처럼 율법도 같은 결과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율법과 죄는 밀접하게 연결되고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율법을 오해하면 율법과 죄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율법은 없는 게 좋아요’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반대편에서 율법을 설명합니다. 율법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로마서 7장을 이해하는 큰 질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바르게 볼 수 있도록 오늘 본문에서 균형을 맞추어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율법이 죄입니까? 바울은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면 죄와 법, 둘은 도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붙어 다니는데 수상합니다. 계속 함께 지내면서 같은 결과를 주기 위해 서로 돕고 있습니다. 같이 일하면서 그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죄와 법, 그것이 알고 싶다. 죄와 율법은 어떤 관계입니까? 첫째로 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

7:7 …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율법이 아니었으면 죄를 알지 못했다고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 인해 죄를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알다’라는 말은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는데, 율법이 어떻게 이 일을 하는지 우리가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예로 탐심을 말합니다. 율법은 탐심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탐심이 죄라는 것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누가 탐심을 죄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경찰이 갑자기 식당 앞을 지나는 사람을 잡아갑니다. ‘당신을 지금 탐심을 품은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그리고 조사를 해보니 가게를 지나면서 탐심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재판에 넘겨졌고 판사는 습관적인 탐심에 대해서 징역을 선고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죄라고 인정하는 것은 실제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드러난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아니라면 누구도 탐심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은밀한 것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로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죄로 여기는 것이 변하고 달라집니다. 사람들의 요구와 생각에 따라 법도 개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죄를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들,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생각들이 있고 마음속에서 수많은 악들이 요동을 치는데 그것을 누가 규정할 수 있을까요? 누가 마음을 꿰뚫어보며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것이 변하지 않는 기준이 되고 그것으로 사람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없이는 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죄와 법, 그것이 알고 싶다. 죄와 율법은 어떤 관계입니까? 둘째로 율법은 죄를 드러낸다.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8절부터 “계명”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계명은 율법보다는 조금 더 세부적인 명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뉘앙스에 차이가 있지만, 율법과 계명을 구분 없이 봐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하는 역설적인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죄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도록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기회를 타서”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여기 기회라는 단어는 군사적인 거점을 나타낼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원정을 위한 출발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라는 의미입니다. ‘교두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에 기지를 만들고 그곳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입니까? 내 속, 내 마음이 전략적인 교두보입니다. 그리고 ‘공격 앞으로’ 하고 신호가 오면 싸우기 위해 달려 나갑니다. 다시 말해, 나의 죄의 본성이 죄를 짓기 위해 전진하는 것입니다.

신호가 옵니다. 계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죄의 본성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가 잘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왜 해야 돼?’ ‘하기 싫은데!’ ‘귀찮아!’ 이런 식입니다. ‘들어가지 마시오.’ 하면 들어가고 싶고, ‘던지지 마시오.’ 하면 던지고 싶고, 금지되어 있으면 그 금지를 어기고 싶어 합니다. ‘탐내지 마!’라는 명령이 오히려 내 속에 잠자고 있던 탐심을 흔들어 깨웁니다. 죄가 계명을 기회로 활용해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처럼 힘이 없지만 율법이 있으면 죄는 탐심을 일으켜서 율법을 어기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탐심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탐심을 자극합니다. 이것이 계명의 실제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부추기고 결국 죄를 드러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러한 죄의 본성을 팀 켈러는 perversity라고 합니다. 번역자가 이 단어를 재미있게 잘 바꾸었는데, “삐딱함”으로 번역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삐딱함이 있기 때문에 죄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에 대해서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금지 명령을 받고 나면 삐딱함이 발동해서 내 마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려는데 옆에서 아내가 여기에 자리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 주차를 하지 않고 굳이 다른 곳을 찾아서 주차를 하는 겁니다.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방청소를 할까 생각했는데 엄마가 와서 방청소를 하라고 하면 갑자기 하기 싫어져서 안하는 겁니다. 삐딱함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고백록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통해서 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 있는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 포도밭 근처에 배가 주렁주렁 열린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와 몇몇 또래들은 그 나무에서 배를 훔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한밤중에 몰래 그곳에 모여 많은 배를 훔쳤다. 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기에 조금만 맛본 후 남은 배들을 모두 돼지에게 던져 주었다. 집에는 훨씬 좋은 배가 많이 있었지만 도둑이 되어 보고 싶은 마음에 남의 배를 훔쳤다. 우리의 진짜 즐거움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데 있었다. 훔친 배를 던져 버리면서 내가 맛본 것은 나 자신의 죄였고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어거스틴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금지되었다는 이유를 제외하고 다른 이유로 불법적인 일을 즐기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우리에게 있는 삐딱함이 이런 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제한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어기는 일을 했을 때, 우리는 그 제한을 넘어가는데서 오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의 첫 범죄가 그러했고 그 이래로 사람의 모든 범죄가 그러합니다. 죄는 나의 원함, 나의 주권, 나의 자유를 이루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죄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죄가 내속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속에 있는 삐딱함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가 문제입니다.

죄와 법, 그것이 알고 싶다. 죄와 율법은 어떤 관계입니까? 셋째로 율법은 죄를 정죄한다.

7: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 말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본문에서 ‘나’를 가리키는 것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바울이라는 견해와 아담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질문을 가질 필요가 없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논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본문을 자연스럽게 읽으면, 이 구절을 가지고 갑자기 바울이 아담을 말한다거나 이스라엘을 대신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것은 그에게만 적용되는 개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포함시킬 수 있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 경험은 자전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표하는 일반적인 것으로 확대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 율법을 깨닫기 전의 상황과 율법을 깨달은 후의 상황을 극적으로 대조합니다. 삶과 죽음으로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해서 죄와 나의 상태가 역전됩니다. 전에는 내가 살고 죄가 죽었는데 율법이 오자 죄가 살고 내가 죽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율법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몰랐던 때가 있었을까요? 바울은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자란 유대인입니다. 율법을 몰랐거나 지키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까지도 열심으로 율법을 지켰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자였습니다(빌3:5-6).

그래서 여기서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의 참된 의미를 오해했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수많은 계명을 알았지만 율법의 목적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고 율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를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키는데 완전히 실패했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정죄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율법은 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율법은 드러난 죄를 정죄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게 됩니다. 그래서 9절, 10절, 11절은 모두 계명을 죽음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11)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율법의 정죄로 인해 의에 이르려는 나의 수고와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그 역할을 했을 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았을 때 사람은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고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먼저 우리를 정죄합니다. 죄를 알게 하고 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죄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정죄함으로 죽음을 선포한 후 죽음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안내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결론입니다.

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바울이 질문했습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은 죄가 없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 율법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가 될 수 없으며 죄와 같지 않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그래서 율법이 죄와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본질적으로 죄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법을 어기고 유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갔다면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간 것에 대해서 법을 탓할 수 없습니다. 법이 그를 정죄하고 감옥에 가게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법이 아니라 그가 범한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심판에 대한 진짜 범인은 율법이 아니라 죄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삐딱함,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죄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계시합니다. 율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물론,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시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죄를 깨닫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기 위해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영향력 있는 전도자인 폴 워셔가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이 오하이오 주에 있는 교회에 초청을 받았을 때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설교를 마쳤을 때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일어서더니 다리를 떨면서 천천히 통로를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폴 워셔는 강단에서 내려와 아이를 붙잡고 “얘야, 무슨 일이니?”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저처럼 사악한 죄인도 구원하실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는 엄마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청중들은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폴 워셔가 말합니다. “웃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주님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죄에 대한 자세를 이 아이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율법이 죄를 알게 하고 죄를 드러내고 정죄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처럼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다 죄인이지 뭐! 다 용서함 받았으니 괜찮아! 누구나 다 죄 짓고 사는데 뭘!’ 이렇게 반응합니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대답하는 만큼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 라는 고민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죽음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삶에 반복되는 죄를 너무도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같은 삶을 살고 나의 삶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자주 범하는 죄들, 가볍게 생각하는 작은 죄들, 잘못된 삶의 습관들, 순간적으로 나오는 나쁜 말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하는 나쁜 생각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 질투와 이기심, 험담하고 판단하는 마음, 이렇게 내가 일상적으로 짓고 있는 죄들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악한 것인지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를 쉽게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 모든 죄를 정죄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알게 합니다. 내 속에서 계속되는 죄를 드러내며 빛을 비추어 나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끝이라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더 좋은 마지막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죄의 대한 대가를 예수님이 지불하셨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사망이 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을 따라 생명으로 연결되었고 영생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죄를 알게 하실 때, 말씀이 나의 죄를 드러낼 때 죄에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를 베푸실 때 미루지 말고 즉시 죄를 버리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앞에 다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