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떻게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

본문 : 요한일서 5장 13절~21절

설교자 : 조 정 의

13절은 요한일서 전체의 결론이자 요약이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요한은 서신을 썼고, 단지 그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고 풍성히 누리게 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알게 하려 함). 

영생은 무엇인가?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살거나, 죽으면 천국 가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관계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는 것, 그래서 믿는 순간부터 영원히, 이 땅에서 하늘나라까지,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친밀한 관계, 사귐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1:1-4; 요 17:3).

영생의 결과는 무엇인가? 영생을 가진 자는 어둠에 행할 수 없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1:5-10; 3:1-12). 영생을 가진 자는 형제자매를 미워할 수 없다.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2:7-11; 3:13-24; 4:7-21). 영생을 가진 자는 거짓을 따를 수 없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이다(2:18-29; 4:1-6). 영생을 가진 자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세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2:15-17; 5:1-5). 이처럼 영생을 가진 자는 죄와 세상과 거짓과 미움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따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누구를 통해 영생을 누리는가?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얻는다.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이다(요 14:6). 그래서 아들에 관한 바른 진리, 아들에 관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2:18-29; 5:6-12). 또한 우리가 영생을 계속해서 풍성히 누리게 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3:1-3, 하나님의 아들…그는…영생이시라”, 5:20). 

우리가 어둠에 행할 때마다 어떻게 어둠을 몰아내는가? 대언자와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다(2:1-6). 회개하면 용서와 깨끗게 하심을 받는다(1:9-10). 어떻게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바라봄으로다(3:16, 20-21; 4:7-21). 어떻게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보여주신 삶을 진리의 영께서 가르쳐 주신다(2:18-29). 어떻게 세상과 악한 자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가? 세상보다 크시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2:12-14; 4:4). 요한일서는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많은 주석가들이 14-21절을 편지의 추신(P.S.)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요한이 13절까지 쓴 편지에 누군가 추가한 내용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본도 이 부분을 포함하지 않은 사본이 없다. 또한 내용 면에서도 요한이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한 것은 탁월하다. 요한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영생을 누리는 비결을 강조하며 이 편지를 끝맺었다.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은혜의 방편, 바로 기도이다. 당신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영생을 풍성하게 누릴 수 없다.

1. 기도는 영생의 특권이다(14-15절)

먼저, 기도는 영생을 누리는 자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 아버지께 언제든지 나아가 구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4절)

‘담대함’은 친밀한 관계때문에 생긴다(그를 향하여). 남의 아버지에게 언제든 찾아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다르다. 물론 존경심을 갖추고 무례하지 않게 구하지만, 아버지에겐 언제든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아시는 지혜와 지식이 무궁하신 아버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무한하신 아버지, 사랑과 인자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아버지. 졸거나 주무시지 않는 아버지, 너무 바빠서 우리 기도를 들을 시간이 없는 분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들으시는 아버지(잠 15:29; 벧전 3:12). 기도는 하늘 아버지와 영생을 누리는 자가 언제 어디서든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데, 기도는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도 언제 어디서든 자기 신에게 구할 수 있다. 무엇이 다른가? 누구를 향하여 구하는가가 다르다. 우리가 구하는 대상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우상에게 구하는 자들의 신은 시편 135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그들의 신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는 죽은 신이다(시 135:15-18). 그것을 의지하는 자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향하여 구하는 자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왕상 18:27).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그분이 들으신다는 확신을 갖는다.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께서 들으신다. ‘응, 잘 들었어’라는 식으로 들으시는 게 아니라,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시 10:17). 그리고 구하는 그것을 주신다. 응답하신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5절)

우리의 기도는 두 가지 “앎”에 기초한다(안즉, 아느니라). 우리가 구할 때, 1) 하나님이 들으신다 2) 하나님이 주신다(구한 그것을 얻다, 현재형). 당신은 이것을 진실로 알고 믿고 구하는가?

어쩌면 당신은 “무엇이든지” 구해봤으나 ‘듣지 않으시고, 주시지도 않더라’라고 푸념할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기도의 특권을 오해한 것이다. 14절에 보면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앞에 어떤 단서가 붙는가? “그의 뜻대로. 

우상에게 구하는 것과 참되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의 차이가 여기서 또 분명히 드러난다. 우상은 신처럼 섬기고 높이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얻기 위해 이용하려고 만든 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다르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구한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 가장 선하고 복되다는 걸 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줄 믿는다(마 7:11).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한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을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우리에게 주실 줄을 알고 믿고 구하는 것이다.

웨일스의 C. H. 다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란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능하신 분의 힘을 빌어 오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재조정되고 그의 뜻을 성취하는 통로가 되도록 만드는 수단입니다”.

당신은 기도를 영생을 누리는 특별한 권리이자 은혜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가? 시편 기자는 이렇게 감격하며 고백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짧고 피상적인 요구로만 채워진 기도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깊고 친밀한 기도를 쉬지 말고 드려라.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될 것이다.

2. 기도는 영생을 회복한다(16-17절)

다음으로 요한은 죄를 범한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ask)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6-17절)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독특한 표현이 계속 나와서 본문이 정작 무엇을 말하는지 집중하기 어렵다. 어떤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먼저 요한이 영생을 누리는 이들에게 무얼 요구했는지 주목해 보자.

형제자매가 죄를 지속적으로 범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그의 뜻대로…구하면, 14절). 우리는 요한일서 1장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하는 것이 죄라는 걸 배웠다. 모든 종류의 불의는 죄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속에서 일어나는 반항심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열매인 죄를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죄가 그들의 삶에 맺히는 걸 볼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기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 말은 요한일서 초반에 나온 것처럼 죄 사함과 깨끗하게 하심을 통해 다시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신다는 약속이다(요일 1:9). 영생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기도가 영생을 회복하는 은혜의 도구라는 사실을 배운다(약 5:19-20).

다윗만큼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있을까? 시편 51편에서, 밧세바를 범한 죄를 선지자 나단이 고발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구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0, 12). 우리는 자신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형제자매의 회복을 위해 이렇게 구해야 한다. 영생을 누리도록.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사망에 이르는 죄는 많은 죄 중에 특별히 무거운 죄를 가리키는가?(대죄/소죄). 실제로 육신의 죽음을 가져오는 죄를 가리키는가?(살인, 행5장,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고전 11장, 만찬을 함부로 먹어 잠자게 된 성도들). 아니다. 요한일서 문맥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았는데도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부하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거부하는 죄를 말한다. 요한이 말한 적그리스도, 거짓 교사들이 범한 죄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분명히 알리셨음에도 고의로 그것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자들을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라고 평가했다(히 6:4-6). 종종 우리도 교회에서 함께 섬기다가 완전히 배교자가 되어 떠난 이들을 본다.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기도는 영생의 회복이 필요한 자에게 집중되어야 한다(16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하나님 편으로 혹시 투항할지도 모를 적을 위한 기도보다는 실족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전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온갖 죄로 영생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충만한 기쁨을 모두 빼앗긴 채 고통 중에 살아가는 형제가 있지 않은가?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생명력 없이 살아가는 자매가 있지 않은가? 그들을 위해 간절히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생을 회복시킬 것이다. 

3. 기도는 영생을 알게한다 (18-21절)

마지막으로 18-21절까지 요한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는 것” 세 가지를 말했다(우리가 아노라(18), 또 아는 것은(19, 20)). 이 내용을 기도와 상관없이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기도가 영생을 더욱 풍성히 알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생 안에 보장된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신다(18절)

요한은 영생을 가진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는 것은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죄를 조금도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조금 전에 죄 범한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 요한). 계속해서 죄인처럼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롬 8:12).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키신다. 세상도, 마귀도 그 무엇도 절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9). 

기도와 무슨 관계가 있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한 자)에게서(도)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있다(마 6:13). 하나님은 이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고,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악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된다.

2)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19절)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의 소속은 명확히 두 개로 구분된다. 하나님 혹은 악한 자(세상).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누리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세상 사람은 모두 악한 자 마귀 아래 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 요한이 말한 세상의 무기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어떻게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 힘 있게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만드는 기도이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상의 달콤한 유혹이나 무서운 핍박 가운데서도 최후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더욱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20절)

마지막으로 우리가 영생 가운데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 그분 자체이시다. 요한은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하나님)를 알게 하신 것을 안다고 말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르러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어떻게 알게 하셨는가?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알게 하셨다.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본 적 없는 자들에게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요 1:18, 참된 자, 하나님). 그래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어 그분 안에 있는 자는 그분과 더불어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다(요 14:20). 우리는 이 관계를 영생이라고 말한다. 예수님 없이는 영생이 없다(영생이시라).

요한은 마지막 명령으로 21절에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라고 썼다. 갑자기 왠 우상 이야기인가? 영생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그 친밀한 관계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멀리하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잭맨은 “하나님을 내 삶의 중앙에서 변두리로 밀어내려는 것은 무엇이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몰아내야만 한다”고 말했다(255p). 

반대로 하나님만 내 삶의 중앙에 두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바로 기도이다. E. M. 바운즈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고 거룩한 친교에 대한 갈망이다”(674p). 그러므로 영생을 풍성히 누리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