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좁은 길에서 드리는 기도 Part III
본문 : 시편 25편
설교자 : 최종혁

 

우리는 지난 시간, 시편 25편을 통해 다윗이 언급하고 있는 ‘좁은 길’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다윗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다고 했고, 예수님은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구원받았다, 또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미 좁은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생각지 못한 대적이 있고 믿음 때문에 당하는 여러 고난이 있습니다. 때론 넘어짐으로 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 등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내면에서도 많은 싸움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때로는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길이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이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쁨과 평안, 주님이 주시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의 안락을 생각한다면 좁은 길은 분명 그런 길이 아닙니다.

지난 두 번째 시간에는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죄 용서, 보호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좁은 길에서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 어떻게 우리가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어떤 확신과 태도 가운데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독립적이고 어떤 이는 조금 더 의존적이기는 하지만 누구나 근본적으로는 의존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의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존하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필요 없어, 내가 할 거야’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구원 받은 자들도 여전히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 것처럼, 혹은 이미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사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내 삶에 큰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문제입니다.

누구에게나 베푸시는 일반 은혜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살 수 있다면, 즉 공기가 있고 물이 있고 먹을 것이 있고 살 수 있는 환경만 되면 하나님은 굳이 없어도 상관 없다면 정말 문제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신뢰로 그렇게 합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기도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가 분명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절),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2절), “주를 바라는 자들”(3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15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21절). 이것들이 기도에 대한 다윗의 표현들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절) 문자적으로 “내 영혼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정형화된 표현이기도 하지만,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정확히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실 때 어떤 자세로 하십니까. 오늘날 우리는 기도할 때 주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하지만, 구약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무슬림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다면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또는 하늘을 바라보고 두 손을 들고 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올려져야 합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주권자가 되시기에 그 분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15절) 우리말에도 ‘누구만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없을 때 ‘누구만 바라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오직 한 사람만 나에게 도움이 된다, 그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 외에 기대할 분이 없으니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 “내가 주를 바라오니”(21절) ‘바란다’는 말은 다른 말로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수 있고 나에게 응답하실 것을 알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 가운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의지하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 신뢰는 그저 이유 없는 맹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분의 속성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기도 가운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이며 우리가 기도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이제는 본문 내용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간구라는 것은 나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간구할 때 굳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속성이 왜 중요할까요? 하나님은 그 속성에서 벗어나서 행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거짓말도 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야 제대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면서 그분께 무엇을 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 내용을 보면 그 기초에 하나님의 속성이 있고 그 속성에 기초한 기도이기 때문에 다윗은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 구원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구원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구원자를 자청하는 사람들도 많고 제한된 의미에서의 구원자들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언제나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말로만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실제로 구원하셨습니다. 능력의 손으로 구원하셨습니다(신 4:34).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순종할 때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사사기의 역사는 그들이 순종할 때 구원을 베푸셨음을 증명합니다.

그럼 구원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속성을 드러내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 은혜입니다. 다음 말씀을 통해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하리라”(습 3:17).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1-22).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신 20:4).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셀라)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시 68:19-20).

실제로 하나님이 구원하셨던 사건들을 보면 이러한 속성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전지구적인 홍수가 이 땅에 있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일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났습니다. 인간들의 죄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 사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을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멸망을 예고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고, 긴 시간을 주어 사람들로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거절함으로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만을 구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 사건에는 불과 유황으로 불이 내리는 하나님의 능력, 죄인을 멸하시는 공의, 롯과 가족들을 구원하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롯은 그곳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열 명이 없었기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도 역시 그러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다윗의 삶에서 자신을 그런 하나님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골리앗과의 말도 안 되는 싸움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중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임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3절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5절) 왜 계속해서 주를 기다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구원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많으시고 공의로우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그 백성이 어려움 중에 부르짖을 때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확신 가운데 구원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인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또한 다윗의 기도에서 그가 구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주권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뜻대로 이끌어 가시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따라오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실까요? 구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에 앞서 그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고 롯에게도 찾아가서 계획을 알리셨고 도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보다 일반적인 경우는 어떤 상황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을 통해 야곱의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시고 애굽에서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상황을 통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족장 시대 이후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선지자들을 일으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방법은 ‘기록된 말씀’을 통한 것입니다. 다윗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도 했고, 상황을 통해 인도 받기도 했고,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추구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해두신 말씀을 깨닫고 그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특별한 인도하심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어떤 속성과 관련이 있을까요? 다윗은 선하심과 정직하심(8절) 그리고 인자와 진리(10절)를 언급합니다. 좁은 길에서 멈춰서 있을 때,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던지는 가장 많은 질문은 “이 길이 정말 맞습니까?”일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길이 힘들어도 지금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끝이 보일 때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둡고 힘든 길을 통과할 때는 그런 확신도 약해지고 그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이 길이 정말 맞는 것인지 의심이 생기고 확신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정직하신 분 즉 올곧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신데 우리를 악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바르신데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하나님의 길이 옳다는 확신 속에 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모든 길이 “인자와 진리”(10절)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길에 있다면, 그 길이 나에게 어렵든 쉽든, 즐겁든 슬프든, 두렵든 평안하든, 어떻듯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자백(죄 용서) 용서하시는 하나님

세 번째로 다윗이 구했던 것은 용서입니다.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한 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나님은 항상 용서하셨습니다. 어떤 죄든지, 누구의 죄든지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 있는 것이지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닙니다. 용서했다는 말은 죄를 그냥 없는 셈 쳤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 자동으로 용서되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용서에는 언제나 회개가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는 자가 누구든, 얼마나 자주 회개하든 관계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 했을 때 용서하셨습니다. 악한 왕 아합이 잠시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도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하나님은 회개하면 용서하셨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선한 자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용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속성은 긍휼과 인자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속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 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8-19).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는 긍휼과 인자가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에 기대에 죄 용서를 구했습니다(6-7, 11, 18절).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다고 믿는다면, 죄의 문제를 감추려 하거나 정당화해서 나를 변호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백하고 그분의 긍휼과 인자하심에 기대면 됩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회개하는 자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확신 가운데 죄 용서를 구하십시오.

 

보호 – 보호하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살펴 봤던 기도의 내용은 보호였습니다. 하나님은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며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보호하셨고 차가운 어둠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여러 차례 ‘주께 피한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마치 어린 새가 그 어미의 날개 아래로 피하는 것처럼, 사막의 여행자가 큰 바위 아래서 쉬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께로 피했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시면서 적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보호와 연관된 하나님은 속성은 성실과 정직입니다(21절). 정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른 것’을 말하고, 성실은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주께 피하는 자들을 온전히 보호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다윗은 다시 한 번 “내가 주를 바라본다”라고 말합니다. 신뢰와 확신에 대한 표현인 것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실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식으로만 쌓아두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에 적용하며 더 깊은 교제 속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구할 수 있었습니다.

대적 때문에, 믿음 때문에, 때론 범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 속에서 두렵고, 외롭고, 괴롭고 때로는 죄책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걷다가 제자리에 멈추고 서 있을 수밖에 없을 때에 다윗은 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같은 길을 걷는 자들로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25편을 마무리 하면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기도하십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에게 기도합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합니까? 혹은 내가 어떻게 되는 아무런 상관없는 신에게 기도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 오직 하나이신 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돕기 원하십니다. 그분의 공의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선하심과 정직함으로 인도하십니다. 긍휼과 인자로 용서하시고 온전함으로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께 구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 길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서 다윗은 온유(9절)하게 순종(10절)하는 자,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14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이들만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배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되어서 순종의 행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친밀하심을 나타내시며 그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좁은 길에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좁은 길은 분명 외롭고 괴로운 일이 많습니다.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할 때 불필요한 고난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 많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로 그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감사하게 하고 찬양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좁은 길을 걸으며 때로는 잠시 서 있을지라도, 그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겸손히 기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