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좁은길에서 드리는 기도 Part I
본문 : 시편 25편
설교자 : 최종혁

 

시편의 시작은 두 개의 다른 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복 있는 자의 길이 있었고 악인의 길이 있었습니다. 복 있는 자의 길은 말씀에 따라 열매 맺는 풍성한 삶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아서 의인과 함께 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시편 1편의 말씀만 보면, 복 있는 자 혹은 의인은 항상 잘 되고 악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인은 삶에서 어려움이라고는 전혀 없고 뭐든 원하는 대로 다 잘되는 삶인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에 막연히 이 세상에서 뭔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적을 붙여 두고, 묘자리를 잘 쓰며, 새벽에 물을 떠 놓고 기도하던 것이 하나님으로 대상만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그렇게 단순화 할 수 없습니다. 너무 단순화 하면 오해하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 ‘복’과 ‘심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결과로서의 복을 말하는데 우리는 과정으로서 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순간적인 것을, 성경은 영적인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육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시편을 공부하면서, 여러 시편이 ‘의인으로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히나 시편 바로 앞에 있는 ‘욥기’는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때로는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순종의 삶을 산다고 할 때 항상 좋은 일들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도 인생의 두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쉽고 좋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어렵고 힘든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준다고 하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건 무슨 말일까요? 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좁고 협착 하다고 말씀하실까요? 믿는 자의 삶은 고난 없는 평안한 삶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이 있는 것이 믿는 자의 평범한 삶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믿는 자의 삶입니다.

세상의 평안과 기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좋은 상황에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과 기쁨은 상황이 아닌,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상황에 관계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고난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느냐이고, 고난 중에서도 그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입니다.

시편 1편은 두 길을 두고 선택하는 상황이라면, 오늘 살펴볼 25편은 이미 의인의 길을 선택한 자가 그 길을 걷는 중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의인의 길, 좁은 길을 선택한 자가 그 안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고 험한 길입니다. 때로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 길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I. 좁은 길

먼저 좁은 길 위에 있는 다윗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 가운데 이 시편이 언제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항상 어려움 속에 있었고 고난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 그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말씀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좁은 길을 걷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상황

다윗은 언제나처럼 대적이 있습니다(2~3절, 19절). 다윗의 삶은 늘 전쟁을 겪었고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대적이 항상 외부에만 혹은 멀리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을 죽이려던 자는 그의 직접적인 적군이었던 골리앗도 있었지만, 다윗이 섬겼던 사울도 있었고, 심지어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도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윗의 그런 싸움이 모두 영적인 부분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그와 싸웠습니다. 다윗이 싸웠던 핵심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골리앗과 싸우려 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그의 믿음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그가 자신이 가진 신앙의 양심에 따르지 않고 사울 왕을 먼저 죽였다면 다윗은 그렇게 오래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됐었습니다. 어쩌면 훨씬 더 빨리 왕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최소한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양심을 지켰고 고난을 택했습니다. 다윗이 좁은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충성스럽게 걸어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다윗이 범죄에 빠졌을 때도 그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고 회개했지만, 그 죄에 대한 결과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 태어난 아기가 죽었고 그의 가정에 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녀 사이에 살인이 일어났고, 다윗에 대한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남의 아내를 범했던 것처럼 다윗의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통하여 교만하여졌을 때, 마찬가지로 다윗은 회개 했지만 그 죄에 대한 결과로서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다윗은 처음 왕으로 세울 때부터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던 자로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다양한 고난이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좁은 길에 들어선 자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당하는 고난에 더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고난도 있고 그런 면에서 넘어졌을 때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좁은 길을 걷기로 선택한 이상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여러 가지 고난은 그저 외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내면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내 마음에 근심이 많사오니”(17)고 말합니다. 외적인 고난이 마음의 문제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요?

내면

1. 두려움(2, 19절)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윗은 두 종류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상황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를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 나와 뜻을 함께 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은 별로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19). 더구나 그들이 나를 적극적으로 미워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며 지은 시입니다. 그 시에서 다윗은 천만 명이 자신을 에워싸 진 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지만(시 3:6), 사실 그는 압살롬에게로 민심이 쏠렸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바로 도망했었습니다. 엘리야도 승리한 이후에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이세벨의 위협을 듣고 그 생명을 위해서 바로 도망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에게 항상 있고, 때론 그 두려움이 하나님보다 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또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2, 3, 20절). 구약성경을 보면 종종 이런 수치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부끄러운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그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예, 명성, 이름’이라 부르는 사회적 관계나 위치를 우리나라는 매우 중요시하는 문화인데, 다윗 당시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가서 싸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방인의 손에 죽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압살롬의 책략가였던 아히도벨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목매어서 죽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수치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시편에서도 이런 수치 혹은 명예에 대한 말씀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은 자기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왕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명예, 그리고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명예까지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실함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쉽게 ‘고난’을 ‘심판’과 연관 짓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이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어차피 사실이 아니니까’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시간이 길어지거나 고난이 반복되면 그렇기 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도 수치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오는 공격입니다. 다윗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된 신이라면 다윗에게 그런 일들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 일들이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참된 신이 아니다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믿고 있는 것은 결국 그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원수들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특히나 다윗은 고난을 당하고 있고, 그들이 승리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들의 말이 설득력을 얻고 다윗의 말은 힘을 잃습니다.

물론 다윗은 3절에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결과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다윗은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금 현재 상황입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내가 고난을 당하고 그들이 잘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확신을 순간적인 두려움으로 바꾸기도 했던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끝이면 어떡하지?’라는 인간적인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크든 작든 이런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하게 느끼며 어떤 두려움도 없이 용감하게 나아갈 때도 있지만, 때론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다윗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담대한 설교자였던 세례 요한도 예수님께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욥도 고난 중에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상황에 압도당하면, 믿음의 눈은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의 문제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2. 죄책감(7, 8, 11, 18절)

이 말씀을 읽어보면 다윗은 여러 차례 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11),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8).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에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죄 없다고 하거나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삶 속에 죄는 있습니다. 단지 그 죄를 보는 눈이 다르고 그에 대한 반응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삶에 있는 이런 죄의 문제를 보다 보면 죄책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과거에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것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내가 전에 이런 사람이었었는데..’라며 주저하게 됩니다. 과거의 죄가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그럴 수도 있고 주변의 ‘대적’이 그런 생각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또한 죄의 크기를 보면서도 죄책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크기는 실제로 얼마나 크냐보다는 내가 얼마나 크다고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죄의 크기 때문에 죄책감에 빠진 것입니다. 또 다른 비슷한 경우는, 반복되는 죄를 보며 용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입니다. 어차피 또 같은 죄를 짓게 될 텐데, 용서를 구하는 것도 못할 일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책감도 우리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의 결과를 보며 죄책감에 빠지는 일도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 자신의 범죄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보며 아마 자신의 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하여 낳은 아기가 죽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그 집에 칼이 떠나지 않고 그의 후궁들이 백주에 모욕을 당한 것을 알았을 때, 다윗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죄로 인한 분명한 결과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내가 용서 받지 못했다는 증거는 아닐까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죄책감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죄책감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죄책감에 계속 빠져있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길을 걸으면서 이런 죄책감에 빠져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다 용서하신 것을 “내가 나 자신을 용서 못해”라고 하면서 더 큰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탄이 계속해서 우리를 송사합니다.

3. 외롭고 괴로움(16절)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다윗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이런 외로움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느냐에 달린 문제는 아닙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홀로 서서 외로운 싸움을 했지만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할 때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곁에 있었지만 그는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그를 위로했겠지만 그는 괴로워했고 슬퍼 울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상대로 놀라운 믿음의 승리를 보였지만, 이세벨의 협박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기를 구했습니다. 그가 그런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실제로 엘리야만 남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외로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으로 그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외로움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거나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더 자주 겪게 됩니다. 잘못된 헌신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지만, 올바른 헌신을 해도 비슷합니다. 세상에는 넓은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좁은 길은 찾는 사람도 적지만, 좁은 길을 찾고 열심히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더 적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많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참된 신자는 아닙니다. 참된 신자 중에도 자신의 문제로만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언가 더 열심히 하고 헌신하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 자체로만도 외롭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적다 보니 일은 더 많이 하게 되고, 일에 매이게 됩니다. 성도와의 교제도 멀어지고 주님과의 교제도 멀어집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뭔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 온 것 같은데, 괜히 나 혼자 유난 떤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 나만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외롭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아마 엘리야가 이런 경우였을 것입니다.

좁은 길은 기본적으로 외로움을 느끼기 쉬운 길입니다.

시편 25편에서 볼 수 있는 다윗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어려움과 대적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내면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좁은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이고, 또한 같은 내면의 문제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다른 성도를 찾아가서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그 상황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앞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을 때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 내가 현재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시편 25편을 보면 다윗의 기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길을 구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 중에 그가 원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계속 이 좁을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냐고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걸어 가면 우리에게 고난이 있고 그런 고난 중에 우리는 두려워 하기도 하고, 죄책감에 빠지기도 하고, 외로움과 괴로움에 몸 부림 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그저 나의 행복한 삶이고 평안한 마음인지.. 그렇다면 그런 고난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고 평안하면서 그 끝은 생명에 이르는 길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 있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목자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길 원하는지 알고, 내가 그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보다 장차 올 것이 더 실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그 때에라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장차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이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가 구해야 할 바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높일지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고난 중에 우리가 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