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 구원에 대하여 PART I
본문 : 베드로전서 1:10-12
설교자 : 조정의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나 명예, 안전, 건강 등을 주시기를 원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 가장 기쁘고 즐겁고 복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이라는 주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면 ‘구원의 역사’이고, 성경도 ‘구원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결국 성경은 구원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통해 계속해서 이 구원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1장 1, 2절에서 성도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구속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이라는 구속사역이었습니다. 3-12절까지는 이것에 대한 긴 찬송시로, 3-5절은 아버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찬양하고 있고, 6-9절에서는 매일의 삶에서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제 10-12절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차례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찬송가의 가사는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회적인 표현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찬송하고 있는데, 그분이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기다리고 찾으려 했으며 전파했던 분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에 대해 얼마나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별로 큰 기쁨이 아니십니까? 구원이 나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에 그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내가 잊어버린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 구원에 대하여는”(10)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0-12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12)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모두 구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의 3절에서는 “산소망”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4절에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 5절에서는 “구원”, 9절에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성도들은 여러 시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 때문에 힘들고 낙심할 수 있는 그들에게 베드로가 보여준 위로의 말씀은 바로 이 “구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도 위로와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10-12절)에서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고 전하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 마지막으로 천사들입니다.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살았던 자들로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야에 대해 연구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후나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했던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말씀에 대해 계시한 분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성령”(11)이십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10)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소아시아 성도들뿐만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도, 오늘날 여러분과 저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왜 특별히 “너희에게(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임할 은혜”라고 했을까요?

‘구원’이라는 단어는 ‘어려움과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위험에서 구원되었나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1:18)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헛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입니다. 그는 전도서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1)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장을 통해 인생의 헛됨을 말하던 그가, 전도서의 마지막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법을 지키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행위와 은밀한 것을 가지고 나가서 ‘나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는 모든 인간은 헛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이 땅에서 지식과 부, 쾌락을 누릴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세상에는 헛된 인생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헛된 것들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만족시켜 줄 누군가가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죄로부터 구원할 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게 해줄, 인간의 헛된 삶의 고리를 끊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이 죄를 범한 결과로 죽음이 임하게 됩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그리고 5장을 보면 아담 이후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인간은 이렇게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에 처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약속하십니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누군가가 약속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저주와 동시에 죄의 사슬을 끊어줄 구원자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분이 오셔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기를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 인류를 헛된 삶에서 건져낼 구원자, 과거에는 가려져 있고 그림자와 같았지만 이제는 확실해진 사실, 그것이 소아시아 성도들과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임할 이 은혜에 대해 예언을 했을까요? 그들은 단순히 말씀을 받아 전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폈다고 말합니다. 매우 집중하고 몰두해서 메시야에 대해 연구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11)이 증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언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받으실 고난과 후의 영광”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습니다. 장차 오실 분의 “고난”과 “영광”을 말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1000년 전에 다윗은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22:6-8).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22),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22:27)의 말씀으로 주님의 고난 이후의 영광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BC 700년에 이사야는 주님의 고난을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또한 9장에서는 메시야의 영광을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BC 500년에 다니엘은 장차 있을 일과 기름 부음 받을 자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4-26). 그리고 구세주의 영광받으실 것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약 4천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구세주의 그림자를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그들처럼 그림자나 추측이 아니라,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어떻게 오셨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 우리의 죄를 해결하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고 확신할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이 큰 은혜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부지런히 살피고 알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결국 너희들(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고 너희들 때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12).

저는 가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삶을 보면서 ‘나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기적을 경험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그림자를 붙잡고 살았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죽으심, 승천하심을 분명히 알고 믿고 있는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소아시아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이 구원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얼마나 기다리고 바라던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냐고 말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옥에 갇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묻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연구하고 살폈던 바로 그 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주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5:11)고 답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직접 언급하신 것입니다. 즉 이사야에게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45).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6-48).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신 메시야의 확실한 실체를 보고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2)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지켜온 선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 것은 그들 시대에 성취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원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계십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그 가치를 잘 깨닫지 못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구약의 많은 성도, 하나님의 약속만 붙잡고 고난의 삶을 살았던 그들이 바라고 기다렸던, 연구하고 답을 얻기 원했던, 그 해답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