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본문: 마태복음 1장 18절~25절
설교자: 조정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 끊이지 않고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질문으로 인해서 너무 심하게 싸워서 무리 중 일부를 내쫓기도 했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예수님이 어떻게 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주장하는 이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흠집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1세기의 도세티즘이 있었는데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실상은 육체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듯하지만 곧 사라져버리는 환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또 2세기의 영지주의자들도(이들은 플라톤주의를 이어받아 모든 것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이분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마리아에게서 난 아이는 영적인 아이였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다락방이라는 종교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이었고 육체는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을 담는 껍데기일 뿐이므로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인성을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세기의 에비온파는,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가 세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비로소 임하시고 다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그냥 인간이었던 것 뿐입니다. 또한 4세기의 아리우스파는,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최초로 창조한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몰몬교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마리아 사이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 태어난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신천지도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었는가,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첫 번째 신약성경이자 첫 번째 복음서,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오신 것, 둘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오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을 한 번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말씀드리고, 또 한번은 하나님의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핵심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그 이름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집마다 문패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아무개’라고만 적혀있지 ‘아무개 선생님’이라고까지 적혀있는 집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집 앞에 문패가 있다면 ‘예수’라고만 적혀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닌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인간적인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인데 이것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당시 매우 흔한 이름이었는데 여호수아가 꽤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지명을 붙여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이름은 성육신 하신 인간 예수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입니다(요 1:41). 이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선지자, 제사장, 왕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고(왕상19),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서(레8), 왕은 백성의 리더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이끌어가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16).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선지자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18:18).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1400년 후에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대언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히 4:14).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고, 교회의 왕,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만 봐도 '인간이신 예수님'이자,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서, 이제 지극히 인간적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8,19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극히 평범한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에 대해 설명하면서 두 사람의 배경을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향이나 나이, 직업, 생활수준이나 집안 내력, 그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에 대해 말하면서 그 부모에 대한 설명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매우 평범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은 나사렛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이름 없는 시골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말할 정도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나이는 당시에 결혼적령기로 흔한 나이였고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목수는 평범한 직업이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정결예식을 할 때 흔히들 준비하는 양이 아닌 비둘기를 준비한 것으로 보아 생활이 가난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해도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다윗의 자손은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요셉은 아주 평범한 부모였던 것입니다.

당시는 신랑측에서 지참금을 주어서 결혼을 준비하게 하고, 약혼을 하고 일 년 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약혼 자체가 큰 효력이 있어서 거의 결혼과 같았으므로, 만일 이유가 있어 약혼을 깨야 한다면 정식으로 이혼의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고 이혼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간음죄에 대해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성령으로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을 듣고 유대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 지역에서 3개월 정도를 머무른 뒤에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데,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가 먼 곳에 3개월을 다녀온 뒤 임신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간음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이혼 절차를 밟든지, 마리아를 간음죄로 법적인 처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요셉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이혼하고자 했습니다. 평범한 부모의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과정였습니다.

본문의 20-23절을 보면 요셉이 꾼 꿈 역시 참 평범한 꿈이었습니다. 요셉이 잘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꿈의 내용은 참 중요한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꿈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 꿈을 생생하게 꾼 적이 있지만 그 꿈이 사실로 이뤄진 적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단순한 꿈인 것입니다. 요셉은 잠이 들었고 천사가 나왔으며 얼마뒤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요셉이 잠에서 깼을 때 발밑에 천사의 깃털이 있었던 것도 벽에 어떤 글자가 쓰여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천사가 나타나 말하는 꿈을 꾸었을 뿐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의 내용대로 마리아와 이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본문 24,25절은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기록인데 이것 역시 지극히 평범합니다. 요셉은 꿈에 나온 천사의 말을 기억하고 그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그의 아내를 데려오고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시지만, 그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마태는 그저 “낳으매”라고만 기록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다른 복음서(눅)에는 “나아”일 뿐입니다. 왜 이렇게 짧게 표현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세상의 다른 아기들처럼 그저 평범한 아기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얼굴에 광채가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많은 찬송가 가사와 성화 속의 모습과 같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주 고요하게 태어나시지도 않았습니다. 산모가 적절한 산부인과 조치 없이 태어난다면, 고통을 줄여줄 약도 없고 간호사도 없는 마구간 바닥에서 아기를 낳았다면, 얼마나 큰 혼란과 소음과 난리가 있었을까요. 마구간의 가축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기가 나오자마자 어떤 모습이었을지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핏덩이 벌거숭이 우는 아기로 태어나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마구간 주위에 천사들도 없었고 하늘에서 찬송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지극히 평범하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시골 동네에 초라한 마구간에 머물 곳을 찾아 급히 들어간 부부에게서 난 평범한 아기였습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제한적인 존재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바보스러움을 가지고 계셨고,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배가 고팠으며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에 도움이 필요한, 지식과 지혜의 수준이 유아에 머문 제한적인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만 빼고는 인간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으로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성령으로 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다만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18),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23),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25).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아기도 아버지의 씨 없이 태어난 아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성령으로 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마리아를 덮고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시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된 것이다”(눅 1:35). 이것은 이교도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마리아의 성적관계를 통해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기록하면서 다른 것을 생략하고 본문의 반을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로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말한 것은 첫째,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것과, 둘째 그것이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사7:14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30년 전에 예언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태어날 것이고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태는 1장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실 때 그 말씀의 권위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고, 8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고백하는 장면, 제자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에 “네가 답하였다”고 대답하심으로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장면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 목적에 대해 21절에서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 또한 양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0-11).

저는 서두에 1세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이 되실 수 있는가? 왜 모든 만물을 말씀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한걸음도 옮길 수 없는 어린 아기가 되셨나? 이에 대한 답은 21절에 나타나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 부모의 도움 없이는 생명을 빼앗길 수 있는, 그리고 사탄의 시험을 당하는 인간이 되셨나? 그에 대한 답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모든 지각에 뛰어나시고 지혜가 풍성하신 기묘와 모사이신 하나님께서 유아의 낮고 천한 지능과 연약함을 가지고 태어나셨나? 역시 답은 동일합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영원히 심판하실 만왕의 왕께서 작은 식민지국가였던 이스라엘 왕의 공격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가야 하는 작은 아기로 오셨나?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알파와 오메가,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는 인간이 되셨나? 모든 질문의 답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모든 인간은 우리의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피흘림이 없음즉 사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죄가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데 모든 인간은 죄인임으로 하나님 앞에 설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이유는 우리가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를 대신 이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셔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어야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가 따라야할 본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이시기만 하다면 우리는 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우리에게 따를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만 영원한 속죄제물일 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제물은 유한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셨기에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이셔야 비로소 이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완벽한 중보자가 되려면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눅2:8-14을 보면, 마구간 안에는 천사들이 없었지만 밖에는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곳에는 빛이 있었고 수많은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선지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기에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하나이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신 목적,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이 목적의 ‘자기 백성’ 중에 하나이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나심은 여러분에게 평안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중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성탄절에 아이들의 재롱과 텔레비전의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볼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찬양을 부르고 싶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