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는 나으냐?

본문: 로마서 3장 9~20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나으냐?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돌아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되새겨지고 도전이 되어서 나를 점검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되는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장 18절에서부터 시작된 서신의 첫 번째 본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단락이 오늘 본문에서 결론을 맺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정말 복음이 복된 소식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소식보다 먼저 나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생각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로 바꾸어버린 사람들,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를 자신의 욕심으로 바꾸어버린 사람들, 그런 자에게 심판은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판단하며 자신을 살피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괜찮다고 착각하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율법과 할례를 내세우며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차별 없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대상을 “우리”라고 말합니다.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 자신을 포함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포했는데, 이제는 그 심판의 대상으로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여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럴 때 말씀을 듣고 있는 이방인들은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유대인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어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였던 유대인들도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끝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보다 율법에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바울이 자신까지 포함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나으냐? 그러자 유대인 중에서 아직 할 말이 있었던 사람들, 그래도 자신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있었던 자들 그들도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은연중에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닌데, 나는 잘하는데’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지적할 때 우리는 다르다며 저들과 우리를 구분 짓고 선을 긋습니다. 저런 교회와 우리 교회는 달라! 나는 저런 가짜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나는 나은 사람, 우리 교회는 나은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한 나쁜 교회이고 우리는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착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평가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내 판단입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오늘 바울의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나은 게 있습니까? 겉으로 드러나거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지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죄악들이 감추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덮어두고 아닌 척하고 괜찮은 것처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 이 질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질문이 제 속에서 계속 메아리치는 겁니다.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말씀을 맡아서 말씀을 전하는 너는 나으냐?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너는 얼마나 자신을 가르치고 있느냐?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얼마나 본이 되고 있느냐?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아니라” 나은 것이 없습니다. 심판이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물게 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정말 심판이 마땅합니까?

 

바울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유죄를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은 죄에 사로잡혀 그 지배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죄의 문제는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죄의 종, 죄의 노예가 되었기에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는 죄의 노예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그리고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여 그 사실의 증거로 제시합니다. 성경의 증거가 10절부터 18절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보기에 따라 6~7군데의 구약이 인용되어서 특별한 목록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랍비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인데 성경 구절을 진주알을 꿰는 것처럼 한 줄로 모아서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 대한 유죄 선언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목록을 작성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 목록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나은 것이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증거 목록의 구성을 먼저 생각하면 증거 목록은 두 종류로 나누어서 각각 세 개씩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없음을 밝히는 ‘없다 세 가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몸을 비유하는 ‘몸 세 가지’입니다. 총 여섯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없다는 10절입니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무엇이 없습니까? 의인이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의인이 단 한 명도 없을까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의인은 없습니까?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선한 일이나 대단한 일을 성취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의인이라고 말하는 기준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에 대한 기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에 대한 기준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만족되는 사람만이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의를 측정하는 기준은 사람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족시키는 자가 의인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기준에 미달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데 비행기가 아니라 헤엄쳐서 간다면 갈 수 있을까요? 세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려고 합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어릴 적에 수영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국가대표 수영 선수입니다. 누가 미국에 갈 수 있을까요? 헤엄쳐서 간 거리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아무도 미국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기준에는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의인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조금 덜 의인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기준에는 모두 다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격 미달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예외 없이 모두 다 죄 아래에 있습니다.

 

두 번째 없다는 11절입니다.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무엇이 없습니까? 깨닫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을까요? 좀 과장된 말이 아닐까요?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것 아닌가요? 우리만이 아니라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까? 진리를 찾으며 나름의 종교를 통해서 절대자를 찾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살면서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해결해줄 뛰어난 존재를 찾습니다. 나의 죄책감을 해결해주고 마음에 위로를 주는 어떤 것을 찾습니다. 만족을 얻기 위해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무언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을 만난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일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나으냐? 나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찾기보다 하나님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세 번째 없다는 12절입니다.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무엇이 없습니까?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정말 선을 행하는 자가 없을까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재능이나 물질을 나누고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끔 마음 따뜻해지는 뉴스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선행에 대한 기준 역시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일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자녀가 부모와 원수 된 상태에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면서 온갖 일을 다 한다면 어떨까요? 부모를 위해 잔치를 열고 선물을 드리고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해도 부모와 서로 원수 되어 있는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선행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먼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의를 행할 수 있고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증거 목록에 대해서 ‘없다 세 가지’를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몸 세 가지’는 입, 발, 눈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몸은 ‘입’입니다.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이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목구멍, 혀, 입술, 입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린 무덤, 속임과 독사의 독, 저주와 악독, 사람에게 있는 이렇게 더럽고 냄새나는 치명적인 죄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증거가 됩니다. 말로 죄를 짓지 않는 말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말이 많은 사람이든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이든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으냐? 우리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 몸은 ‘발’입니다.

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죄를 짓는데 빠른 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발을 통해서 증거 되는데 여기 발이 의미하는 것을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말’과 ‘행동’으로 짝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그 말과 행동으로 죄인 됨을 드러내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몸은 ‘눈’입니다.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눈’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여기 눈은 그냥 눈이라기보다 마음의 눈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말한 죄인에 대한 증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 경외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심각한 죄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만만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은가요? 우리는 다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습니까?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르실 것처럼 그렇게 쉽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이 보면 그럴 듯하게 꾸미고 괜찮은 척하지만 사람이 보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고 의식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건강을 염려하는 것만큼이나 나의 성공이나 나의 미래를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이나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얼마나 있느냐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으냐? 이 질문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요? 우리에게 나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증거들로 인해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입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이 많은 증거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주석가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진 피고인이 자신에 대해 제시된 증거가 너무 무거워 입을 열지 못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판결이 내려지고 형이 집행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선한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기준이 다릅니다. 아무리 열심으로 율법을 지키고 순종했다 하더라도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는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켜 의에 이르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나의 한계를 알고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의로움을 줄 수 없습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죄에 대한 이해이지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닙니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핵심 원리는 사람들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어서 그들이 겸손해지고 무서워하며 멍들고 낙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위로받고자 그 축복받은 분께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다.” 죄인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 절망적인 상황, 내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사랑,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같은 죄인이지만 그 결말은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의 결말을 바꿀 수 있을까요? 결말을 바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크기에 따라, 죄의 수와 정도에 따라, 아니면 선행에 따라 죄인의 결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의 결말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책망하실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죄를 깨닫게 하셨을 때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것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저 사람 때문이라고 내가 자라온 환경 때문이라고 그 정도의 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핑계 댈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인의 결말을 바꾸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은 나의 죄를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킬 때, 그럴 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유일한 피난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첫 번째 본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나를 포함해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조금의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나의 상황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더욱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나의 상황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