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안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해도 될까?

본문 : 요한일서 2장 12절~17절

설교자 : 조 정 의

요한일서는 충만한 기쁨으로 시작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분과 더불어 아버지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자고 말했다(요일 1:1-4).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럽고 특별한 사귐인가!

그런데 그 이후 요한은 독자가 당황할 만큼 흑백논리, 강력한 이분법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눈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그분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행할 수 없다(요일 1:5-10).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사랑으로 순종해야 한다(요일 2:1-6). 예수 안에 사는 자는 형제를 미워하면 안 된다(요일 2:7-11). 

첫 번째 메시지와 달리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칼같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가 정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이 맞나 의심하는 사람도 생기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모두 달린 것처럼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한계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 편지를 쓴 사도 요한도 독자의 반응을 예상한 것 같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안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다음 가르침을 주기 전에 성도에게 확신과 격려를 해주기 원했다(12-14절). 당신은 예수 안에 이미 살고 있다고 확증한다.

1. 당신은 예수 안에 살고 있다(12-14절)

12-14절은 마치 암송을 위해 일부러 구조를 만든 것처럼 정교하고 규칙적인 수사법을 활용하여 기록되었다(호칭-“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내용 X6번). 요한이 부르는 대상은 “자녀들”(12), “아비들”(13), “청년들”(13), “아이들”(자녀들), “아비들”, “청년들”(15)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 안에 살고 있는 자들이다.

자녀들”은 요한이 자주 사용한 그리스도인 독자 전체를 가리킨다(요일 2:1, 28; 3:7, 18; 4:4; 5:21).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은 독자 전체를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신의 나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사귐을 누린 시간, 신앙의 초보, 아이 단계, 성숙한 청년 단계, 신앙이 오래된 아비의 단계. 단지 구원받은 연차가 아니라 신앙의 성숙도에 따른 구분이다(참고. 히 5:12-14).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중에 속해있다.

12-14절까지 사도 요한이 여러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었던 내용이 있다. 요한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표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이라고 연거푸 말하면서 세 가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설명한다: 1) 죄 사함을 받는 너희는 예수 안에 살고 있다(12), 2)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알고 있는 너희는 예수 안에 살고 있다(13, 14), 3) 악한 자를 이긴 너희는 예수 안에 살고 있다(13, 14).

12-14절에 요한이 그들의 상태를 표현한 동사는 모두 완료형이다(6개). 과거 일어난 사건이 현재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최초에 예수 안에 살게 된 그 상태를 지금도 계속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한은 그리스도인 독자가 현재 어떤 단계에 있든지 예수님 안에 살고 있다는 것,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걸 확신하라고 여러 번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다.

1) 죄 사함을 받는 너희는 예수 안에 살고 있다(12)

만일 당신이 예수 안에 산다면 당신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12절).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가 단번에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고 모든 무거운 죄의 책임에서 해방됐음을 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자백을 통해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경험한다. 당신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지속적인 죄 사함을 경험하는 당신은 확실히 예수님 안에 사는 사람이다. 

2)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아는 너희는 예수 안에 살고 있다(13, 14)

만일 당신이 예수 안에 산다면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을 안다(13, 14).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것’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 곧 경험적으로 인격적으로 안다. 태초부터 계신 이 곧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걸 알고 그분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안다.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을 알게 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요 17:26).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당신은 확실히 예수님 안에 사는 사림이다.

3) 악한 자를 이긴 너희는 예수 안에 살고 있다(13, 14)

만일 당신이 예수 안에 산다면 당신은 악한 자 혹은 흉악한 자이기었다. 당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 14절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강하고 악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마귀는 계속 우리를 정죄하고 고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려고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으로 위협하지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긴다(롬 8:37). 영적 전쟁에서 지속해서 승리를 맛보는 당신은 확실히 예수님 안에 사는 사람이다.

우리와 예수님의 사귐은 상호 관계이다. 죄를 멀리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라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 안에 말씀을 두셔서 승리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하셔서 더욱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친밀한 사귐 안에 있음을 스스로 안다.

2.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15-17절)

그동안 요한은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자, 영생을 누리는 자가 사랑할 것과(예수님 말씀, 성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죄)을 말해 왔다. 한 가지 더 예수님 안에 살면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이다. 잠깐,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지 않았는가?(요 3:16).

성경에 세상은 1) 하나님 만드신 피조 세계(히 4:3; 9:26), 2) 세상에 사는 사람(요 3:16), 3)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의 체계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세 번째 의미의 세상이다. 요한은 다시 한번 명백하게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15절)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단호한 말이다. 둘 중 하나만 사랑할 수 있다. 야고보는 더 극단적인 표현으로 세상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이들을 ‘간음한 자’라고 책망하면서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고 말했다(약 4:4).

왜 그런가? 두 가지 이유가 따라온다. 이는. 먼저 16절에 첫 번째 이유가 나온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 세상을 사랑하는 건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구에 대한 설명에 앞서 우리는 먼저 욕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과거 그리스도인 중에는 금욕주의에 빠져 욕구 자체를 부정하려 했던 이들이 있다. 욕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성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반역하는 욕구 곧 세상이 만든 욕구다. 요한은 세 가지로 설명한다.

요한이 말한 육신의 정욕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한 육체의 욕심,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가리킨다(17절).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했다(21절). 육신의 정욕은 결국 죄를 낳는다(갈 5; 롬 7:5).

안목의 정욕은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탐심은 그 자체로 육신의 정욕인데, 눈으로 보면 볼수록 탐심이 더욱 커진다. 세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모든 만족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이 약속한 영적인 복을 무가치한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이생의 자랑은 이 땅에서 물질이나 지위처럼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주신 것을 누리며 감사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선물을 의지하고 선물 주신 분을 잊어버리게 한다. 받은 것에 자만하게 하고 주신 분을 무시하게 한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 빼고 자랑하게 한다.

예수님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게 하셨다(엡 2).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하셨다(고후 4:18).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셨다(고전 1:29-31).

그런데 세상은 육체의 욕심을 계속 따르게 하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며 주님 아닌 다른 것을 자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것,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

2) 세상을 사랑하는 건 영원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17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당신이 노후를 위해 주식을 한다면 은퇴 전까지 상한가를 보이다가 은퇴 후 휴지조각이 될 주식과 은퇴 전까지 하한가처럼 보이지만 은퇴 후 반드시 최고 상한가를 계속 갱신할 주식을 사겠는가? 성경엔 이와 유사한 비유가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으로 공적을 세울 수 있는데, 불로 각 사람의 공적을 시험하게 되어 불로 다 타버릴 것을 쌓은 사람은 해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고전 3:11-15).

세상이 주는 욕구대로 사는 사람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만족 최악의 경우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삶에 채우는 사람이다. 불로 다 타버릴 공적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타지 않을 공적을 쌓는 사람이다. 그가 예수님을 위해 한 모든 일들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존 파이퍼 목사의 부엌에 적혀 있던 글귀처럼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것만 영원하리라”(찰스 스터드, “오직 한 번뿐인 인생”).

결론적으로 예수 안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려 하는 것이고, 둘째, 예수님이 보혈로 사신 고귀한 삶을 영원하지 않은 것에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적용

케빈 드영은 <구멍난 거룩>이란 책에서 한 예화를 들려준다. 신학생들 몇 명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 존스와 아들 존스가 같은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코믹하게 묘사한 장면이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신학생들이 남녀를 막론하고 큰 소리로 웃었는데, 평소 존경받던 나이 지긋한 학생이 큰소리로 “여러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내용은 간음과 근친상간입니다. 절대로 웃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엔 ‘다른 사람 무안하게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왜 우리는 하나님이 죄라고 말한 것,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보고 재미있어하고 웃고 기뻐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즐겨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당신은 왜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웃고 기뻐하는가?

세상은 절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도록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가진 정욕을 하나님 뜻에 반하여 좇게 하고 보이는 것과 일시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만 추구하고 의지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미국 성인이 하루 평균 5시간 TV를 시청하고, 그리스도인 중에서 일주일에 한 번도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 63%라고 하니 소위 세상을 사랑하는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많은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초대 교회 성도 역시 싸워야 할 정욕이 있었지만, 만일 그들이 오늘 우리를 본다면 어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안목의 정욕이 집 안, 손에 쥐어져 눈앞에서 항상 유혹하고 있음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기술과 도구는 편리하지만, 세상이 사용하는 영적 주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그 무엇보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만이 그 예수님이 미워하는 세상을 멀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고 끝난 분이 아니다.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늘 살아계신, 늘 함께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늘 살아계셔서 자백할 때마다 우리 죄를 사하신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늘 살아계셔서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늘 살아계셔서 갈수록 거센 공격을 퍼붓는 세상과 싸워 이기게 하신다. 이 예수님 안에 살면서 영원한 사귐을 누리는 우리가 어떻게 마귀가 던져주는 싸구려 세상 즐거움 때문에 영원한 즐거움이 되시는 예수님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