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루살렘을 향하여: 왕의 귀환
본문 : 누가복음 9장 51~56절
설교자 : 조정의

luke 9-51-19-27

 

1년 이상 누가복음을 가르치고 있고 오늘이 50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부분입니다. 50절까지 누가가 던졌던 질문과 이후의 질문이 달라집니다. 그동안 누가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이제는 그가 어떤 일을 하시는가, 그가 왜 이 땅에 오셨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동안의 말씀이 세례 요한이 했던 질문,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이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이제는 그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가 하실 일이 무엇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그 이름에는 이미 구원자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다룰 이 단락의 마지막에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9장 51절부터 시작되는 핵심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본문에서는 크게 4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누가는 온 백성을 위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 자체가 분명한 메시지로 전달되고 복음이 미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집니다. 사마리아인, 여자, 노인, 병자, 이방인 등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지고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을 보면 그것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론가 향하여 가시는 모습이 그려지고 계속해서 갔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세 번째 주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이들이 손가락질 하는 죄인은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나병환자 열 명 중 한 명이 돌아오고, 십자가의 강도 둘 중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네 번째 주제는 제자도에 대해 체험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십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고난이 따르는 길이고, 겸손하고 온유해야 하며, 충성되고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앞으로 한동안 우리가 설교를 통해 누가복음을 듣는 동안 이 중요한 주제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계획의 성취의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기약이 찼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안 좋은 의미에서 배가 잠기는 것을 말하고 좋은 의미에서는 배가 만선된 상황, 출항 준비를 마친 상태를 말합니다. 배가 출항하기에 앞서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그 때를 기다리시고 준비가 되었을 때 이제 출항할 때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출항할 때가 이 때라고 보신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주님의 구원의 방법을 이루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직선코스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베다니나 갈릴리 지역 등 장소가 언급됩니다. 지리적인 여행이 아니라 운명적인 여행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십자가를 굳게 다짐하시고 그 운명을 향해 걸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부제는 왕의 귀환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나왔고,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이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고 주인입니다. 여러 말씀을 볼 때 분명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왕인 것은 분명합니다. 왕이 왕의 도시로 귀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누가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한다는 강력한 두 가지 힌트를 발견합니다.

첫째로 누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나 무덤에 묻히실 날로 말해도 되는데 왜 승천하시다고 표현했을까요? 이미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은 예정되어 있던 사실입니다. 승천은 그 이후에 일어날 일지만 앞에 있는 고난을 포함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왕의 권세를 얻게 되는 장면과 승천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고 모든 만물이 그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 주권이 확증되기에 앞서 그분은 고난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국가의 삼요소를 국민, 주권, 영토라고 합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으로 백성을 구출하셨고, 부활은 그분의 주권을 확증하였으며,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설정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러 승천하셨고 그것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주의 백성이 주의 주권에 순종하며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두번째로 52절을 보면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는 전 국민에게 공적인 소식을 전하거나 선언문을 낭독시키려고 정부에서 권한을 부여한 사람들의 임무와 공식 자격을 말합니다. 왕이 행차할 때 그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앞서 이런 사자들을 보낼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2)”,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왕의 귀환을 알리는 선포자들은 왕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 선포를 들은 사람은 왕을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두 가지의 선택이 가능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거절하는 쪽을 택합니다. 단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는 이유로 그리합니다. 거기에는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오랜 갈등의 역사가 작용합니다.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은 한 민족이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국가가 분열되고 그중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절기마다 예루살렘성전을 향해 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금신상을 만들어서 단과 세겜에 두고 백성들에게 섬기게 합니다. 제사장은 레위인들이어야 하는데 아무나 제사장직을 맡겨 제사드리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사마리아인들은 마음대로 종교를 망가뜨린 사람들입니다. 이후 앗수르 왕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데 이민족과 서로 결혼하게 함으로 민족적 정통성을 흐려놓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그리심산이라는 곳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싫어하여 파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을 때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싫어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해가는 것이 당연했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굳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 가셨습니다.

주님은 멸망시켜도 될 것 같은 사람들의 지역에 가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에 분노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치 자신에게 이런 권한이 있는 것처럼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요한(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은 신기하게도 이후에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사랑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면서 그의 권한 밖의 일을 자신의 권한인 것처럼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민 20).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그리고 고대 사본에 추가된 내용을 보시면,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심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때가 아니다, 그리고 그 권한은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심판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뱃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눅 10:13-14)” 하지만 당시는 심판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다니시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심판에 대해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후에 사마리아 지역에 베드로와 빌립이 가서 복음이 전파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종교라는 미명아래 이웃을 핍박하는 것은 절대 옳지 않습니다. 이슬람과 우리의 차이는 주님을 거절한 사람을 우리가 죽이거나 핍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참된 것이지만 그것을 이유로 남을 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핍박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 열심에 지성을 더해야 합니다. 구약부터 예언되어 있던 예수님의 구속계획을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 후 부활하실 것을 알았다면 제자들과 같은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뛰어나도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J. C. 라일은 ‘열심으로 가득 찬 무지한 사람보다 교회를 더 해롭게 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그들의 열심이 제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이 보여주신 온유, 겸손,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을 때 사랑과 온유로 반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고 했습니다.

다음은 왕을 거절한 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전도하기 위해 복음 공부를 하자고 권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결단을 미루고 계시는 분들은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은 별로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마치시고 승천하셨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고 약속대로 죽으셨고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주님을 거절한 모든 사람을 불태울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1-16)” 왕이 다시 오십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분을 거절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7-15)”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거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믿지 뭐, 기회가 또 있겠지’라고 생각하신다면, 왕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속히 올 것이다, 도적같이 올 것이다’입니다. 은혜의 때에 구원받을 만한 때에 왕 앞에 굴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더 언급하려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고, 교회에 나오고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관심이 없고 개인적인 기도도 없습니다. 교회가 끝나면 세상으로 갑니다. 세상에서 주는 유익이 더 좋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다고 말해도 실제적으로 왕으로 모시지는 않은 사람입니다. 선한 목자이자, 탕자의 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은 좋아하지만 심판의 예수님, 청지기 예수님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씀은 좋아하지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이렇게 안주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용하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1-12)” 저는 어릴 때 아버지께 훈계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무서워했던 훈계는 ‘네 마음대로 해, 그 책임은 네가 질 거야.’였습니다. 주님은 ‘내가 속히 올 것이다, 악한 사람은 악하게 행하라, 네가 행한 그대로 갚아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사랑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회개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에 안주하며 살지 않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이라면 그 사랑 앞에 나와 회개하고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분을 왕으로 모신다면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가셨던 길대로 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왕에게 충성스럽게 행하는 자로 마지막 날에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구역모임을 위한 질문들

  1.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나요?
  2.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3. 예수님이 야고보과 요한을 꾸짖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4. 기독교인으로서 야고보와 요한 같은 잘못을 범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보세요.
  5.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 분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