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배자의 신뢰와 확신
본문 : 시편 27편
설교자 : 최종혁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분에 따라 직업에 따라 제복을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기도 합니다. 전에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도 스님들처럼 통일된 옷을 입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꽤 다양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들, 성도, 신자, 구원받은 자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들은 우리가 이런 자들이기 때문에 얻게 되는 다양한 유익들과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근본적인 우리 마음의 변화라고 한다면, 그 변화는 예배라는 삶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삶에서 예배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할까요? 26편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YES라고 말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하는 것이 예배자의 삶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기는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27편은 특별히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보여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시편 27편의 전반적인 주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는 신뢰와 확신입니다. 그 신뢰와 확신이 예배자(다윗)의 다짐에, 바람에, 기도에, 그리고 기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예배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다짐이 다르고, 바라는 것이 다르고, 기도가 다르고, 기대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다른 것입니다.

 

I. 다짐(1~3절)

하나님을 신뢰하고 확신하는 자는 다짐이 다릅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내 마음이 두렵지 않으며”,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이것은 내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일까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이것이 다윗이 처한 상황입니다. 시편에서 워낙 자주 접하는 표현이어서 큰 감흥이 없을지 모르지만, 정말 이런 상황에 놓이면 우린 어떨까요? 저는 잠을 자다가 북한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희 집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실제로 정말 무서웠습니다. 전쟁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경험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쟁만 봐도 참 무섭고 두렵습니다. 이런 상황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상황입니다. 평온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지금 군대가 자기 한 사람을 대적해서 일어나 치려고 하는 극한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고, 부모가 나를 버렸다고 말하며(10),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한다고 말합니다(12). 이런 상황에서 그는 태연하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다윗은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평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빛이요” 성경은 하나님을 빛에 자주 비교해서 말하는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빛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말씀은 이 말씀이 유일합니다. 빛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서 다윗은 빛을 구원과 연관 지어서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과 같습니다. 어둠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두려움을 줍니다. 어두움 자체는 우리에게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빛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 두려움을 자연스럽게 몰아냅니다. 하나님은 빛이 되어서 다윗에게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시니” 다윗은 하나님을 구원자가 아닌 ‘구원 그 자체’로 표현합니다. 그가 구원이 필요한 상황에 있을 때 바로 하나님이 그의 구원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능력 혹은 보호, ‘피난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생명을 의지할 수 있는 곳, 평안히 쉬기 위해 도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단지 지적인 사실의 전달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실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아는 어떤 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라는 말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다윗은 자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하나님, 경험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의 경험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2). 악한 자들이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다윗에게로 왔지만 그들은 완전히 실족해서 넘어졌다고 말합니다. 즉 완전히 패배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수도 없이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많은 나라, 왕들이 다윗을 대적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건은 골리앗과의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무시하며 당연히 자신의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마치 다윗의 생명을 자신이 쥐고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저주하며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삼상 17:44)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골리앗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고, 그 하나님은 다윗의 빛과 구원, 생명의 능력이셨습니다. 그 앞에 골리앗은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을 알았고 그렇기에 그는 고난 중에서도 여전히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고난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오면 이것이 왜 나에게 왔는가 원망하고 또는 막연히 괜찮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주문을 외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분명한 확신 가운데 ‘난 두려워 하지 않을거야’라고 다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II. 바람(4~6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가 있고 지금 그것을 구하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다윗이 구한 것, 그의 바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4). 다윗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좋으신 분이신지 날마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높이기를 원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26편에서처럼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을 언급합니다. 그곳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다윗이 바라는 ‘한 가지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5). 성전은 다윗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다윗의 표현처럼 그 당시의 성전은 ‘초막’ 혹은 ‘장막’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직 제대로 된 건물로서의 성전은 지어지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성전은 성막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천막 혹은 텐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를 두셨고 다윗은 그곳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성막이 안전한 곳일까요? 다윗이 말하는 환난은 적이 나를 공격하는 상황입니다. 군대가 일어나 치려고 할 때 성막이 안전할까요? 적의 공격을 막기에 성막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성막이어도 집보다 튼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연약한 초막과 장막이 가장 안전한 장소인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빛이시고 구원이시며 피난처이신 분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비록 그곳이 천막일지라도 난공불락의 요새보다 더 안전하다는 것이 다윗의 말입니다.

그런 안전한 것으로 피하는 것 자체가 다윗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한 가지’는 아닙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승리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런 승리를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 승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노래하며 찬송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바라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즐겁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윗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하나로 모여집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큰 바람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중에 있든, 고난 중에 있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III. 기도(7~13절)

7절부터의 말씀은 6절까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6절까지의 말씀에서 다윗은 큰 확신 가운데 시를 기록했다면 7절부터는 현 상황에서 느끼는 괴로운 감정이 더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7-8). 기도의 내용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들어달라는 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이 기도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항상 일상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식사 기도하듯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소리 내어 부르짖는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부르짖으니 들어 달라고, 응답해 달라고 구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떼쓰듯 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당연히 응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하게 여기시기에, 불쌍히 보시기에 도우시는 것이지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거나 우리에게 어떤 궁극적인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도 응답을 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8).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신다는 표현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같은 의미로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다윗은 그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특별히 9절과 10절에서 다윗은 버림받은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심지어 그의 부모가 그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다윗이 많은 형제들 중 막내였기에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상황일 수 있습니다. 또는 다윗이 어릴 때 왕궁에서 사울을 섬겼던 것을 생각해보면 사울이 늘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단지 이 상황을 가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내 부모가 나를 버린다 해도…”라는 의미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제시하면서 다음 말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다윗은 지금 가장 외롭고 힘든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리고 등을 돌려도 마지막까지 내 편이 되어 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그런 부모에게 버림 받는 것은 정말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 더 비참한 것은 하나님께 버림 받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의, 그리고 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도움이며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9). 그 하나님이 나를 버리면 정말 더 이상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지금 상황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서 은혜를 거두신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에게서 얼굴을 숨기시고 노하셔서 그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계속 그를 방치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보이지만,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고 결국 영접하실 것이라 고백합니다(10). 그런 확신 가운데 다윗은 제발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하지 마시고 함께 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10절과 같은 확신이 있는데 왜 9절과 같은 기도를 할까요? 하나님께 이렇게 확신할 수 있다면 왜 얼굴을 숨기지 말라고 기도할까요? 마치 확신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10절과 같은 확신이 있기 때문에 9절과 같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에게 한 과부가 자주 자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구했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가 너무 번거롭게 하니 그 말을 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귀찮게 하니 차라리 그 말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이라도 그렇게 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겠느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두가, 심지어 부모자식이 나를 등지는 상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더욱 그분께 나가서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상황이 어렵고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 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기도의 내용은 인도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시 한 번 좁은 길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좁은 길에서 하나님의 길을 구하고 걷기 원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좀 거리감이 있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다윗이 원하는 것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함께 하며 가르침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길 원하고, 그 길을 하나님과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원수를 언급합니다. 11절에 “원수”는 문자적으로 ‘나를 지켜보는 자들’입니다. 좋은 의미로 지켜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윗을 주시하면서 그를 넘어뜨릴 기회를 엿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이고 그 입으로 악한 것을 토해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노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기를 구합니다(12절, “내 원수의 뜻에..”).

그러면서 다윗이 확신하는 것은 그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13). “확실히 믿었다”라고 번역된 것은 약간의 의역입니다. 사실 13절에서 다윗은 생략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가… 믿지 않았다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그만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을 확실히 믿었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표현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볼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산 자들의 땅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이 확신은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확신과 같습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불투명해 보이고, 지금은 괴롭고, 지금은 아닌 것 같고 두렵고 외로운 상황일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옳은 길인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길을 택합니다.

 

IV. 기대(14절)

다윗은 다음과 같이 시를 마무리합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너는 누구일까요? 이 말을 다윗은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요? 다윗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것입니다. 다른 시편에서 “내 영혼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하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자. 여호와를 기다리자. 지금은 그가 나에게서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 같고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마치 나를 버리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나의 빛이고 구원이시며 피난처가 되셨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곰과 사자와 싸울 때도 그분은 나를 도우셨다. 모두가 두려워 하는 골리앗도 말도 안 되는 무기로 이길 수 있게 하셨다. 그러니 기다리자. 그분이 나타나실 것이고 그분이 도우실 것이다. 하나님을 기다릴 이유는 충분하다.’ 이것이 다윗의 기대입니다. 다윗의 확신에 찬 기대입니다.

기다리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인내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다윗은 “강하고 담대할 것”을 말합니다.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리지만, 여전히 현실은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거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며 평안 가운데 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이 상황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인도가 필요하고 또한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 가운데 지금을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오늘을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는 우리가 어떤 자인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다른 사람과 구분 짓습니까?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를까요? 집의 책상에 혹은 침대 머리맡에 성경책이 있다는 것이 다른 것일까요? 주일에 늦잠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오는 것, 월급의 일부를 교회에 헌금으로 내는 것, 아니면 밥 먹기 전에 기도하는 것,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다는 것이 다릅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어느 정도 구분 짓기는 하겠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라는 짧은 말의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실을 그저 아는 것은 어떤 무게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전능하신 창조주, 주권자, 최후의 심판자를 믿는다는 말, 그 말의 무게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분을 나의 빛이라, 나의 구원이라, 나의 능력이라 부르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와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아는 자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자고 예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자의 신뢰와 확신은 바로 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신뢰와 확신은 두려운 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게 합니다. 환난 날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께 피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게 합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한 가운데 그분의 때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그분에 대한 더 큰 신뢰와 확신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 받으셨습니까? 그 믿음은 지금 내 삶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믿음은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 삶에서 역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삶에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배자의 삶을 바꾸고 그 삶이 곧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