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편이 말하는 성육신

본문: 시편 22편

설교자: 조정의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눅 24:44). “모세와 선지자”만으로도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데 충분한 표현이다(눅 16:29; 24:47). 하지만 예수님이 시편을 덧붙이신 이유는 그만큼 시편에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내용이 많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구절 이상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시편이 스물 다섯 편이고, 신약 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11편의 메시아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시편에 약 70회 언급된 메시아의 일을 성취하셨고, 시편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연상할 수 있는 장면도 130회 이상이 된다.

성육신과 관련된 시편은 다윗과 맺은 언약에 따라 영원히 다스릴 왕으로 오실 것이 예언된 시편 89편(마 1:1), 마리아의 찬가 중에 인용된, 태어난 아기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기억하실 것이라고 노래한 시편 103편(눅 1:54), 예수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요한이 태어났을 때, 사가랴가 한 예언 중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돌보고 속량하게 하셨다고 노래한 시편 106편(눅 1:68) 등이 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예수님을 가리키고 그분이 이루실 일을 생생하게 예언하면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성취하는 중에 직접 인용하신 시편은 바로 22편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성육신이 예수님께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깊이 묵상하고 교훈을 얻으며 경배와 찬양 드리기 원한다.

1. 성육신하여 받으신 고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마 27:46).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중에 이 시편 구절을 말씀하셨다. 극심한 고통 중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내기 위해 하신 말씀이 우연히 시편 22편 1절과 맞아떨어진 게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시편에 주님을 가리켜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심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시편 22편 전체 시상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첫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시편 22편에서 우린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당하신 고난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저자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시를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경험하고 묘사한 생생한 고통과 치욕의 장면은 흡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일을 눈으로 보고 기록한 것 같다. 예수님은 시편에 기록된 고난을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먼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고통을 겪으셨다(1-2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렸던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죄인처럼 취급했다. 아버지는 재판장이 되어 모든 심판과 저주를 아들에게 쏟으셨다. 모든 죗값을 치르기 위해 아들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아버지는 아들의 부르짖음과 신음 소리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아들로 얻기 위해.

둘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롱과 수치를 받으셨다(6-8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것,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모든 만물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 합당하신 분께서 사람에게 벌레 취급을 받으셨다. 자기 백성의 조롱을 받으셨다.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다), 심지어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도 가증하고 모욕적인 말과 몸짓으로 예수님께 수치를 입혔다(마 27:39-44).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를 주님이 육신을 입고 대신 받으신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체의 고통을 당하셨다(14-18절):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은 벌거벗겨졌고 모든 사람이 주목하여 보는 가운데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예수님은 탈수 증세와 탈골 증상을 겪으시고, 호흡곤란과 쇼크 증세를 보이셨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여든 원수들은 힘센 소들(많은 황소, 들소의 뿔),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이 힘 세고 거칠고 잔인한 이들이었다(12-13, 21절). 그들은 예수님을 희생 양으로 삼아 죽이고 탈취물을 나눴다. 우리가 받아야 할 육체의 고통을 주님이 대신 받으시기 위해 육체를 입으신 것이다.

2. 성육신으로 이루신 구원

시편 22편은 심한 고난 중에 구원을 부르짖는 탄원의 내용에서 끝나지 않는다. 22절부터 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바라보는 소망의 노래다. 예수님께서 이 시편을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의 뜻대로 성육신하여 받으신 고난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실 아버지의 구원을 바라보셨다고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시편에 기록된 고난뿐만 아니라 구원을 이루셨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26-31절).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을 말씀하실 때, 그분은 죽음을 통해 어떤 일이 이루어질지 아버지의 뜻을 통해 확신하셨다.  십자가 고난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고난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게 될 것이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될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끝까지 여호와께 돌아오며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모든 풍성한 자(부자) 또는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가난한 자도 주님 앞에 나와 배불리 먹고 그분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태어날 후손, 대대로 주의 백성이 되어 주를 섬길 것이다. 성령 강림으로 시작하여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구원의 완성을 주님은 십자가에서 기쁨으로 바라보셨다(“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히 12:2).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가 온전히 서게 될 것이다. 주님은 바로 그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며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시편에 주님을 가리켜 기록된 대로 고난이 이루어진 것처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신 것이다.

3. 성육신으로 보이신 교훈

어쩌면 당신은 시편 22편이 왜 성탄절에 합당한지 여전히 궁금할 것이다. 육신을 입고 나셨기 때문에 시편에 기록된 대로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또한 그 고난을 통해 시편에 기록된 대로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었다는 것도 안다. 천사도 예수님 나심을 두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하지만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참으시면서 그 앞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바라보실 때, 그분의 성육신이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9-10절).

1차적으로 이 말씀은 다윗이 고난 중에 지금까지 자기 삶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신뢰하는 고백이지만, 본문의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시상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게 하셨으며, 날때부터 돌보고 기르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셨다(눅 2:52).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는 고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그 앞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되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 11:41-42). 항상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아셨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시는 것도 아셨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하셨다. 조금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환경 가운데서도 아버지가 반드시 최고의 선으로 응답하실 것을 신뢰하셨다. 성육신하실 때부터 십자가에 오르실 때까지, 아버지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택을 주님은 잊지 않고 기억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주님이 구원을 바라보는 시편을 노래하게 한 비결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육체의 고통, 관계 속에서 받는 수치, 대적할 수 없을만큼 강하고 잔인한 원수의 공격, 경제적 압박이나 자녀가 주는 염려와 슬픔. 모든 고통의 책임은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있지만(죄),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허락된 고통은 없다. 당신은 고통 너머의 기쁨을 바라봐야 한다. 지금 허락하신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믿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창 48:15-6), 항상 내 말을 들으시고 나를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기억하라. 이스라엘은 잊어버렸지만, 참 이스라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기억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기억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구원을 이루셨다. 시편에 주님을 가리켜 기록된 그대로 주님은 고난을 받으셨고, 구원을 이루셨다. 성육신하신 모든 순간에 아버지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본을 따르자.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참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뜻하신 대로 그분의 구원을 우리 삶 가운데 이루실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성육신을 기억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