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사랑함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본문 : 누가복음 7장 36~50절
설교자 : 이병권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거울을 보십니까? 학생들은 거울을 가지고 다니며 혹은 스마트폰으로 수시로 자기 얼굴을 확인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거울을 안 봐도 될 만큼 자신이 있으십니까? 저도 한 때는 거울을 자주 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제는 보나 안보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하루에 몇 번씩은 꼭 확인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살피는 일입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몰랐던 대표적인 사람이 있는데,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모르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예수님과 부딪히며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잘 알고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가 나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고 나의 진짜 모습을 바로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름 없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나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오늘 본문과는 다른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있는 기록입니다. 누가는 이름 없는 한 여인과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을 극적으로 대조합니다. 이 두 사람은 너무나 다릅니다. 성별도 다르고 사회적 위치도 다르고 사람들의 평가도 다릅니다. 하지만 누가가 말고자 하는 이 두 사람의 정말 다른 것은 이런 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 두 사람의 진짜 다른 점, 그 차이는 따로 있습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사건은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시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시몬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어떤 동기로 예수님을 초대한 건지 분명히 나타나진 않지만, 존경하는 마음이나 선한 동기로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호기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시몬은 함께 식사하기를 요청했고, 예수님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식사 문화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특별한 식사를 할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먹었습니다. 낮은 식탁에 옆으로 누워, 머리는 식탁으로 발은 뒤를 향하게 했습니다. 밥 먹을 때마다 항상 누워서 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랍비나 귀한 손님과 함께하는 특별한 식사 때에는 이런 자세를 취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특별한 식사는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받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들어와서 초대된 손님이 하는 이야기, 랍비가 전하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보면, 어떤 좋은 일이 있을 때 동네에 잔치를 열어서 사람들을 초대하고 함께 먹었는데 마치 그런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이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한 여자가 거기에 나타납니다. 여자가 나타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자가 특별한 여자라는데 있습니다. 누가는 이 여자에 대해서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기록합니다. 어떤 죄인지 모르지만, 성경학자들은 아마 이 여자가 몸을 파는 여자였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정말 그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여자에 대해서 분명한 것은 온 동네가 이 여자의 죄를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여자가 지금 바리새인의 집에 나타났습니다. 이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닌데, 그런데 이 여자는 식탁 가까이 다가가 뜻밖에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이 여자의 행동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이 여자는 아주 신중하고 진지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38)

여자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누워계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누워계시니까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다가갈 수 있었고 그리고 이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간 여자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여자가 우는 동작을 묘사하는, 우리말로 “적시고”라고 변역된 단어는 원래 비가 내리는 것을 말할 때 쓰는 동사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 발 곁에서 그저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여인이 이 식사자리에 나타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이 보여 주는 헌신적인 행동을 근거해서 볼 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본문 전체 내용을 생각할 때 그렇게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인생을 살던 그녀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을 울립니다. 그것은 구원의 메시지요, 희망의 메시지요,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은혜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사는 동네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이 여인이 식사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습니까? 얼마나 큰 결단을 했겠습니까? 이 여인이 바리새인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몰랐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손가락질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향한 이 여인의 헌신과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왔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그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울었던지, 어느새 예수님의 발은 그녀가 흘린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풀고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하나하나 닦아냅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마침내 가져온 향유를 그분의 발에 붓습니다.

향유는 매우 값진 것입니다. 종종 여인들이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팔아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하는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립니다. 여인이 하고 있는 이 모든 행동은 극도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누가는 이 여인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모든 동사를 미완료 과거시제로 기록했습니다. 그 느낌을 살려서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었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계속해서 향유를 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인의 행동이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 여인의 행동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이 일이 진행되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그냥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여인에게서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녀는 계속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으며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으며 펑펑 울고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어떤 마음일까요?

적어도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몬의 마음은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그 모습을 지켜본 시몬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39)

이 사람이 만일 누구라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죄인인지 알았을 텐데. 무슨 말입니까? 여기 나오는 말을 조건절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조건절은 현재사실과 반대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시험을 잘 쳤을 텐데’ 그럼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겁니까? 안 했다는 겁니까? 안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어떤 자인지 알았을 것이고, 저런 일을 하도록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텐데, 그녀를 쫓아냈을 텐데, 저렇게 가만히 두고 보다니 이 사람은 절대로 선지자일리가 없어!‘ 시몬은 지금 마음속으로 예수님에 대한 평가, 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죄인인 이 여인은 부정한 사람이다. 이 여인이 예수를 만지면 예수도 부정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예수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가만히 있다. 따라서 예수는 선지자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시몬의 마음까지도 모두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짧은 비유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두 사람이 빚을 졌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또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어서 돈을 빌려준 사람이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빚을 면제 받은 두 사람은 열배의 차이, 50일과 500일 노동의 차이입니다. 대략적으로 2달 동안 일한 월급과 2년 동안 일한 연봉의 차이입니다. 2달과 2년은 아주 큰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물으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합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하시며, 방금 말씀하셨던 비유를 지금 상황에 적용하십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기본적인 예의라 할 수 있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자기를 낮춰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형식적인 입맞춤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머리에 인사치레로 할 수 있는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대조입니까?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그러면 이 차이가 왜 중요할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무슨 뜻입니까? 이 여인의 한 일이 죄를 사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결과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 여인이 하는 사랑의 행동은 죄 사함의 근거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많은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사하여졌도다”라는 말은 현재완료시제인데, 이것은 이 여인이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여인이 이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전에 죄 사함을 받은 상태였는데 예수님은 그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다시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48절에 나오는 죄 사함 받았다는 표현도 동일합니다.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은 것과 사랑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점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합니까?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입니다. 반면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합니다.

바리새인처럼 교만한자는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빚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 받은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적게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 지은 여인과 바리새인처럼 교회 안에도 여전히 대조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고,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함 받은 것이 적으니까 그냥 적당히 그냥 부담되지 않는 정도로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데 방해되지 않는 정도로 사랑합니다. 인생에서 신앙은 선택이며 내 개인의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 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을 다해 향유를 부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이 죄인이라고 하니까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이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완벽하지 않아 그렇지만 저기 있는 저 사람보다는 낫지.’ 그래서 이런 자는 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왜 일까요? 문제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으니까 누군가에 대해서 걱정이라면서 기도제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실수는 없고, 다른 사람의 잘못, 불평뿐입니다.

반면에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머리로만 아니라 가슴으로 압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와! 나 같은 죄인, 이 추악한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주님의 희생이 그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겁니다. 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합니다. 이렇게 큰 빚을 탕감 받았는데 무엇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죽었던 나를 살리신 그분을 위해 어찌 향유를 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주님 앞에 엎드리며 나 자신을 드리는 겁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겁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봅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나입니다.

여러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팔삭둥이 같은 나‘,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헌신된 삶을 살았던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나 자신을 괜찮다 말하며 남과 비교하겠습니까? 어떻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사랑으로 품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함을 많이 받은 자가 하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누구와 닮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습이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도 갈수록 의인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왜 일까요? 정말 의인이 많아진 걸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을 모르고 하나님의 용서의 크기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겁니다. 내가 울어야 하는데 내가 죄인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남을 비난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몸을 파는 여자라도 회개하고 우리 교회에 오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사랑으로 품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지요.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관계없이 서로가 존중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감싸주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 받은 자 인줄 알고 말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교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여인을 보십시오. 본문에서 이 여인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행동은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소리를 냅니다. 어떤 소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여인은 행함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그 고백이 진짜임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 덜 말하고, 조금 더 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을 내면서 목소리를 높이기 이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소리를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행함의 볼륨을 조금 더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함 받은 것,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 십자가 앞에서 엎드려 우리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내가 적게 사함 받은 자의 자리에 있다면, 여기에서 그만 짐을 정리하시고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자인지 제대로 보고 많이 사함 받은 자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그래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그 낮은 자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넘치게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들

  1. 오늘 본문에서 대조되는 두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2. 시몬이 마음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이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사실과 어떻게 다릅니까?
  3. 여인이 예수님께 한 행동들은 무엇입니까? 이 행동들은 시몬이 했던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4. 여인의 헌신적인 행동은 무엇에 근거해서 나온 것입니까?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설명해보세요.
  5. 사랑함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6. 내가 많이 사함을 받은 자인지, 적게 사함을 받은 자인지 점검하며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