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본문 : 에베소서 4장 1-16절

설교자 : 이병권

교회를 그린다면 여러분은 어떤 그림을 그리시겠습니까? 아마 십자가가 있는 교회 건물을 그릴 것입니다. 그러면 완벽한 교회를 그린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완벽한 교회를 그려보라고 했을 때 그리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그런 교회를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기에 교회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더 성숙하고 더 건강한 교회는 있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부족함이 있고 연약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의 약함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고 더 회복할 수 있고 더 좋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 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더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계속해서 그 완벽함에 이르기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러한 수고를 멈추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완벽함에 이르기 위해 계속 수고하는 교회이길 원한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그 일에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적이고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건 교회 인도자나 몇몇 사람들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성경적이고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한 신학자는 오늘 본문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엡 4:1-16 말씀보다 더 능동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없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 우리가 함께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사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에베소서의 후반부를 시작합니다. 3장까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과 성도들이 누리는 새로운 신분, 그 원리를 다루었다면 4장부터는 그 원리에 따른 실천을 다룹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알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신분을 알 때 그 신분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당한 삶, 올바른 순종은 올바른 진리에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삶이 올바른 진리에 기초하고 있을 때 올바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설명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근거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그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적용해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 모든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로인해 지금은 비록 갇힌 자가 되었지만, 바울은 오히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게 됩니다. 문제는 그 부르심에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 전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영원한 심판의 부르심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하는 날, 그 날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살아있는 하늘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받았고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새로운 신분에 따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토록 놀랍고 풍성하며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씀에서 “합당하게”로 번역된 단어는 저울의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양팔저울 양쪽에 올려 둔 것이 무게가 같아야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품꾼에게 품삯을 지불하고 일을 맡겼을 때, 품꾼은 품삯에 맞게 일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게 하면 품삯에 합당한 품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지불하신 값은 얼마입니까? 예수님이라는 어마어마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 핏 값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 값에 균형을 맞추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합당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의 부르심의 값을 100조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그 부르심에 대해서 100원짜리로 행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 그 은혜에 합당한 삶,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 가지 명령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명령입니다. 하나가 되었으니, 지키라!’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합당하게 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이시고, 교회가 한 믿음으로, 한 소망으로, 한 세례로, 한 몸이 되었기에 우리는 그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 됨을 지킴으로 우리 삶 가운데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분적인 하나 됨이 실천적인 하나 됨이 되도록 계속해서 지켜야 합니다.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하나 됨을 지키는 방법!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으로 하나 됨을 지킵니다. 온유함으로 하나 됨을 지킵니다. 오래 참음으로 하나 됨을 지킵니다. 사랑으로 용납하여 하나 됨을 지킵니다. 하나 됨은 그냥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겸손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낮아져야 합니다. 온유함으로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오래 참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인내하고 화내지 않고 기다려야 합니다. 용납함으로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받아주고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 우리는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 되게 하셨고 한 교회로 모으셨습니다. 기질과 재능도 다르고 경험이나 관심사도 다르고 생각이나 성격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도 다르고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많은 수고와 희생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한 수고를 멈춘다면 하나 됨은 깨질 것입니다. 교회는 갈라지고 나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는 큰 어려움 중에 하나가 하나 됨을 지키는 일입니다. 교회가 하나 됨을 지키지 못해 서로 싸우고 갈라지고 조각나서 흩어집니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하나로 모으셨는데 하나님이 평안의 매는 줄로 묶으셨는데 교회가 하나 됨을 지키지 않습니다.

교회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교만으로, 온유함이 아니라 분노함으로, 오래 참음이 아니라 내 생각을 고집하고 내 권리를 주장함으로,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앞세우고 서로 미워함으로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잊은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와 악한 영들은 교회의 하나 됨을 공격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이처럼 효과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특히 교회의 인도자들을 공격해서 갈라지게 하고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인도자들의 싸움은 영향력이 크고 교회의 큰 어려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수고와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인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고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싸움의 대상은 서로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라 마귀와 악한 영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싸운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 피해는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단지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왔다 하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 됨이 깨지는 건 아주 작은 일,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에서 “지키라는 말씀을 수식하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힘써 지키라” 적당히 힘들지 않을 만큼만 수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에게 부담되지 않을 만큼만 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고 용납하고 오래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온유하고 겸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힘써라는 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온전한 수고를 다하는 것입니다.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다면 겸손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이고 부정적이라면 온유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쉽게 분노한다면 오래참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사랑으로 용납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명령입니다. ‘은혜를 주셨으니, 섬기라!’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각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 은사에 대해서 말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인 재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그럴 권한이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시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간단하게 이해하면, 시편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신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고 대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승리자로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리로 얻은 전리품을 나눠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뜻대로 은사를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은사라는 은혜의 선물을 주실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 ‘온전하게 하다’는 단어는 ‘준비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부러진 뼈를 붙이거나 뼈를 원래 상태로 맞출 때 사용되었습니다. 부러진 뼈가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그물을 수리하거나 범죄한 사람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물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 것이고 범죄한 사람이 회복되어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도 그러합니다.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합니다. 서로를 섬김으로 서로를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섬김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되게 하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는 은사를 ‘구원의 은혜’와 구분해서 ‘섬김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서로를 섬기라고 영적인 재능,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도 놀라운데 우리가 교회로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수 있도록, 서로를 세워주고 온전함에 이를 수 있도록 섬김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는 이러한 섬김의 은혜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한 주석가는 오늘날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사용합니다. 교회가 버스와 같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혼자서 열심히 버스를 운전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의자에 두 손 놓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축구 시합과 아주 비슷하다. 휴식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 22명이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운동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 5만 명이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다‘

우리 교회가 100명이라고 했을 때 경기장에서 뛰는 사람은 몇 명일까요? 100명 모두 경기장에서 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구원받은 사람이 100명이라면 적어도 100개 이상의 은사가 있습니다. 서로를 섬김으로 세워줄 수 있는 100개가 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은혜의 선물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며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손해가 되는 일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은 버스도 아니고 축구 시합도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각자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함으로 몸을 섬기고 몸을 건강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교회의 지체로서 주어진 책임과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섬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충성하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섬기는 모습은 다양하고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은사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한 목적으로 한 마음으로 머리되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몸인 교회를 섬깁니다. 구원의 은혜의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섬김의 은혜로 서로를 섬기며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서로를 섬긴다면 우리교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교회가 얼마나 더 주님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얼마나 더 주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런 교회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 모두가 섬기라는 이 명령에 순종할 때, 그런 교회를 함께 만들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명령입니다. 생명을 가졌으니, 자라라!’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건강한 교회는 성장합니다. 생명이 있다면 성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단순히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성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시간동안 계속해서 이루어 가야 하는 구원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화’되어가는 것을 ‘성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직접 만날 때까지, 주님에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장을 위한 수고를 그만할 수 있을 때는 주님과 같이 온전한 사람이 되었을 때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장을 위한 수고를 절대로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자라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님 안에서 보내는 세월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더욱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장을 위한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어린 아이들을 보면 참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엉뚱한 말과 행동은 큰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니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큰 어른이 어린 아이와 같은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행동을 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욕심대로만 행동합니다. 그러면 그런 모습을 보고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당연히 성장이 나타나고 성장에 따른 변화가 따라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다면, 성장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그 수준에 맞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늘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영적으로 성장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성장이 빨라서 쑥쑥 자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장이 느려서 성장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엄청나게 자라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그런 성장이 계속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성장하는 것은 드문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생명이 있다면 자란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성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생명은 성장으로 나타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 없이는 성장도 없고 성장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졌다면 자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를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영적으로 자라고 있는지 말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에게까지 자라가고 있는지요? 성장을 위한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은 이미 목표를 이루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수준에서 성장을 멈추고 그 상태로 머물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주님을 닮아가기 멈추고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는지요? 그럴 마음도 그럴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면 먼저 나에게 생명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함으로 자랍니다. 사랑과 진리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를 말할 때, 사랑과 진리가 나의 고백이 되고 나의 삶으로 증거될 때, 주님의 은혜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전하는 것은 때에 따라 참 어려운 일이 됩니다. 진리를 전하며 동시에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는 사랑으로 유화되지 않으면 딱딱해지고 사랑은 진리로 강화되지 않으면 무르게 된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 둘을 함께 붙들라고 명령한다’ 이런 말입니다. 진리는 사랑으로 부드럽게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너무 딱딱해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랑은 진리로 단단하게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물러 터져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희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고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이기에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진리로 나의 삶이 채워지고 사랑과 진리가 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성장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합니다. 성장을 위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장은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를 하고 책임을 다하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성장의 원천, 성장에 필요한 모든 자원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도움을 받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16).

그분이 우리의 목표가 됩니다. 그에게까지 자라갑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고 그분을 통하여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에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육체적인 성장은 한계가 있고 성장을 멈추는 것이 당연하지만, 영적인 성장은 멈춤이 없습니다.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계속 더 자라갈 수 있고 계속 더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우리는 그 완벽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완벽한 우리 주님에게까지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완벽함을 기대하며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자라갑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서로를 진리로 세워주고 서로를 사랑으로 붙들어 줄 때 사랑과 진리로 성장하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그러한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한 마음으로 함께 수고하기를 바랍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하나 됨을 지키고 은사로 섬기고 날마다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