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이 남은 곳에서 회복은 시작된다

본문 : 시편 80편

설교자 : 최종혁

 

오래전에 길을 가다가 한 교회에 선교사 파송식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현수막이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선교사의 파송지가 ‘영국’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기준으로 선교는 이름도 생소한 나라나 부족으로 떠나는 것이지 영국처럼 현대 문명의 혜택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영국은 기독교 국가로서 선교사를 보내는 곳이지 선교사를 받아야 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속으로 ‘애들 유학시키러 가는구만’하고 정죄했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로 그 선교사가 그런 목적으로 영국으로 떠났는지는 알길이 없고, 사실 여부를 떠나서 현수막 하나 보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때 이미 영국 교회는 몰락해 가고 있었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오늘날 정말 복음이 필요한 선교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실버 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버들만 남아 있게 되었다. 교인이 없는 교회들이 늘고 결국 교회 건물을 부동산 시장에 내놓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때 교회의 예배 장소였던 곳이 도서관, 카페, 레스토랑이 되었다. 술집이 되었고 서커스장이나 클럽, 스트립바와 같은 오락 시설이 되기도 하고 이슬람 사원이 되기도 했다.

교회가 몰락했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성도의 수가 줄어들어서 교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런 동일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었던 예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현재의 유럽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여전히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성경과 다르고 세상과 닮아 있다. 물어보기 전까지는 누가 크리스천인지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성경은 참된 크리스천으로 말하지 않는다. 양적인 부분에서 교회의 몰락은 질적인 부분에서 이미 진행된 몰락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 사실 서구권 교회들이 내리막을 걷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절반 정도가 우리나라에 있을 정도였다. 선교가 필요한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 그것도 인구 비율로 보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이런 성장을 과거형으로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11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교인수는 계속해서 감소 추세라고 한다(뉴스앤조이, 2020 통계).

질적인 부분도 유럽의 경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유행한지 이미 한참 되었다. 성경과 교회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는다. 성공에 대한 가치관, 성도덕에 대한 가치관,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젊은 층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신앙은 삶의 일부로서는 아직 받아들여지지만 삶의 전부로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성경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세상에 속한 것들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고 있다. 계시록의 사데 교회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계 3:1).

시편 80편은 이와 유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공동체의 탄식(탄원)시라고 할 수 있다. 한때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렸던 하나님의 백성이 그 모든 복을 빼앗기는 혹은 이미 빼앗긴 상황에서 기록된 시라고 할 수 있다. 1절에서는 “요셉”이 언급되고 2절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주요 지파들인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앞서 살펴봤던 비슷한 배경의 시인 79편과는 다르게 남유다가 아닌 북이스라엘의 멸망이(BC722) 이 시편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칠십인역에는 “앗수르인에 대해”라는 표현이 표제에 추가되어 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가 앗수르이기 때문이다. 시의 내용을 봤을 때 기록된 시점은 멸망 직전일 수도 있고 그 후 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시편은 하나의 공동체가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 안에서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회복을 바라며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비슷한 상황을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또한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시편 80편을 보면 눈에 띄는게 3, 7, 19에 나오는 반복구이다. 개정개역은 약간씩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가장 앞에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동일하다. 우리말의 다른 번역도 히브리어 원문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본문은 이 반복구를 기준으로 3개의 탄원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탄원의 내용은 결국 동일하지만, 뒤로 갈수록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과 탄원의 근거에 대한 서술도 길어지면서 감정도 함께 고조된다고 볼 수 있다.

탄원 1 :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호소함(1-3절)
첫번째 탄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1절)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표현은 왠지 많이 본 것 같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표현이 사용된 것은 성경에서 여기가 유일하다. 하지만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실제로 같은 이미지를 사용한 말씀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아삽의 시편들
79:13,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78:52, “그가 자기 백성은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같이 지도하셨도다”
77:20, “주의 백성을 양 떼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칭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고 소생시키시고 안위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노래했다. 이사야나 에스겔에서도 이런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목양 문화였던 이들에게 있어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인 목자와 양의 관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한 좋은 은유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할 때 강조되는 것은 후술된 것처럼 “인도하심”이다. 아삽은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의 목자를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로 범위를 줄여서 말한다. “이스라엘”은 넓은 의미에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모두 포함할 수 있지만, “요셉”은 확실히 북이스라엘이 지금 이 시편의 관심 대상임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삽은 아마도 창세기에서 야곱이 요셉에 관련하여 사용했던 표현을 기억하며 목자에 대한 이미지를 사용했을 것이다.

창 48: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창 49: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어주셨던 것처럼 요셉에게도 그렇게 하여주시기를 축복했었다. 그리고 아삽은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멸망해 가는 혹은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여전한 인도자이며 보호자이신 궁극적인 목자이심을 기억하며 기도를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로 표현되었다. 이 표현도 성경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표현인데, 크게 3가지 정도를 의미한다 :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시 99:1), 신속한 역사(시 18:10), 그리고 친밀한 임재(언약궤).

여전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것처럼,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주권자로서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아삽은 목자이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기도를 들어 달라고 했고, 왕이신 하나님께는 그 빛을 비추어줄 것, 즉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호소가 좀 더 명확해지는 것이 2절이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2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 곧 구원이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기도는 마치 잠자고 있는 용사를 깨우는 것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 움직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잠자지 말고 일어나 그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를 구하여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기초하여 호소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인도하시는 하나님, 다스리시는 하나님,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비록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변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대로 계신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3절)
여기서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는 아론의 축복에 나오는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민 6:25)에서 가져온 표현일 것이다. 즉, 얼굴 빛을 비춘다는 것은 은혜 베푸시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얼굴빛을 비추지 않고 계시는 상황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을 보며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해도 아무 소용 없고 이제는 애굽에서 우리 조상을 구해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의 신을 섬기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유다왕 히스기야 때에 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에까지 사람들을 보내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할 것을 촉구했었다.

대하 30:8–9 그런즉 너희 조상들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와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의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 9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

이에 대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반응은 조롱과 비웃음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하심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따라서 회복도 경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히스기야의 부름에 응답했다(대하 30:11). 그들은 남아있던 유다의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구했을 것이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구한다. 하나님만이 능력 많으신 우리의 목자이며 왕이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도 유다가 멸망한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애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어디 멀리 떠나 계시지 않다. 떠난 것은 우리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서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과 아버지와 같다. 아들이 떠났고, 아버지는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기만 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 다시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여 아버지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아삽의 기도 “우리를 돌이키시고”는 이전의 상황으로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 필요한 회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회복을 원하는 우리는 회개도 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시 하나님은 은혜로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세상의 파도에 무너진 나라, 교회, 가정, 혹은 나의 삶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이다.

탄원 2 : 자신들의 비참함에 호소함(4-7절)
다음 탄원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먼저 아삽은 지금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결과임을 말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4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큰 힘이 되는 표현이다.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노하심은 우리의 대적을 향한다. 대적들은 멸망하고 우리의 구원을 얻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어 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기도를 듣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신다. 1-3절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신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삽은 “어느 때까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6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5-6절)
여기서 눈물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치지 않는 고통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이 역시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백성들을 인도하셔야 한다. 그래야 좋은 목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고 계신 것은 눈물 뿐이다. 그들은 눈물을 먹고 마시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라며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을 언급하며 힘을 얻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정반대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눈물의 양식을 먹이고 마시게 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고통을 주고 계신다.

그 고통의 큰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사람들의 다툼거리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는데 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백성이 저렇게 멸망했는지를 두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며 조롱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이 시편을 기록한 사람은 아삽으로서 북이스라엘이 아닌 남유다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의 입장에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통쾌한 일 일수도 있고, 적어도 당연히 받아야할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 조롱할 수도 있고 혹은 이런저런 뒷애기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라고 말한다. 비록 나라는 갈라졌지만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고통의 자신의 고통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튼, 아삽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처한 비참한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이 상황이 더욱 비참한 것은 모든 일이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책임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회개의 메시지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있다. 다만 여기서 이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7절)
“하나님이여”가 “만군의 하나님이여”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기도는 동일하다. 우리를 징계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킬 유일한 분이시다.

이렇게 자신의 비참함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시편도 그렇고 다른 믿음의 선진들의 기도에서도 이렇게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상세하게 아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괜찮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고통을 토로하고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구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이 그렇게 나아왔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시곤 했다.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를 돌보심이라”고 말했고(벧전 5:7), 바울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다(빌 4:6). 염려하지 않고 염려를 맡기려면, 결국 염려를 맡아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는 수밖에 없다. 믿음이 남아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탄원 3 : 과거의 은혜, 현재의 치욕, 미래의 약속에 호소함(8-19절)
세번째 탄원은 가장 길고 조금은 감성적이다. 아삽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하셨는지, 지금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를 말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구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다. 특히 아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수고하셨음을 강조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8-11절)
이 말씀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번성하게 하신 일에 대한 비유다. 출애굽, 광야 생활,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셨던 기간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수고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그들은 땅에 가득하게 되었고 산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게 자랐다. 그들의 영토는 지중해와 유브라데 강까지 이르렀다(신 11:24).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생각해 보면 그런 이스라엘의 번영은 절정을 이루었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소유인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은혜를 누려야 했고, 이방 민족들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잊고,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모든 상황은 달라졌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12-13절)
담을 허셨다는 것은 더 이상 포도나무를 돌보지 않고 보호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포도나무를 약탈했다. 더 나아가서는 멧돼지와 들짐승이 그것을 먹었다. 아삽은 하나님께 “어찌하여”라고 묻는다.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에 대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구한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14-16절)
아삽의 기도가 참 애절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한다. 그는 하나님께 지금 들짐승들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유린당하는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시라고 강권한다.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심으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가 바로 그들이다. 특히 여기 ‘가지’라는 표현은 ‘아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친밀하고 정성스럽게 가꿔온 그런 이스라엘이 불타고 베이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멸망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삽은 마치 하나님께 “정말 이스라엘이 이대로 멸망해도 괜찮으십니까?”라고 묻는 듯하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지 않으실테니, 이제는 그 마음을 돌이키셔서 이스라엘을 돌보아 주시기를 구한다. 이스라엘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7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언급한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17절)
여기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시 110:1)와 인자는 하나님게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들의 구원자가 될 왕을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여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시 자신들을 회복하여 주시면 다시는 이전의 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을 결단한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8절)
주에게서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반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행하신 일들을 선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실함에 대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도는 마지막 후렴의 반복으로 마무리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절)

마지막으로, 모두의 믿음이 무너진 상황에서 여전히 믿음을 가진 자는 이렇게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다.

도전
정리하면, 우리는 무너진 곳에서 기도할 수 있다. 믿음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우리의 비참한 상황,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무너져 가는 곳에 있거나 이미 무너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가 그렇게 되어 가고 있고 교회들이 그렇다. 유평 교회는 어떨까? 우리의 가정은 어떨까? 나의 삶은 어떨까?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믿음이 무너진 곳에 있다.

그래서 때로는 모두가 믿음을 떠나는 것 같고 남은 자들의 힘은 너무 약해 보일 수 있다. 나 하나, 우리 교회 하나가 뭐 어떻게 한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있고, 내가 아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해야할 일이 있다.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회복이 완성되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믿음이 남은 곳에 있는 내가 기도하지 않고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회복은 시작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아직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지금 믿음이 남은 곳에 있는 것이다. 회복을 시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회복하길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게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