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목마른 사람(들) 4

본문: 요한복음 4장 1-42절

설교자: 최종혁

물이 필요해서 우물을 찾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그곳에서 참되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났다. 처음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물’이라는 생각 뿐이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잠시 육신의 갈증을 없애주는 물이 아니라 영원히 영혼의 갈증을 없애주는 생수,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그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메시야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서 드러내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그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구원자일 뿐 아니라 전도자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먼저 찾아 나선 전도자이셨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당시의 견고한 벽을 예수님은 먼저 허무시고 다가가셨다. 헛된 노력을 하며 자신이 정말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도 모르는 한 영혼을 예수님은 찾아 가셔서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선물은 더 이상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그것이 자신에게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물은 영혼의 구원이었다. 영생이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게 하셨고, 여자에게 그것을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죄를 직면해야 했다. 숨기고 싶은 죄를 드러내야 했다. 궁극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싸구려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위로 때문에 죄를 직면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멸망으로 이끄는 거짓말이며 사기가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위로의 말을 해야할 때가 있지만,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픈 진실을 말해야 할 때도 있다. 죄를 직면하게 하는 것이 그렇다. 예수님은 여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를 직면하게 하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수님은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으로서 메시야이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먼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말을 신뢰할 수 있도록 전지하심을 드러내셨고, 직접적으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말씀하셔서 사마리아 여자가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가 예수님 자신임을 알게 하셨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전도자 예수님께 배울 수 있는 전도에 대한 교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특별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전도에 대해서 배운 것, 그리고 우리도 배워야할 것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의 결말도 자세히 기록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
전도는 구원의 자연스러운 열매다
(27-30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제자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27절)

제자들은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확실히 드러내셨고 사마리아 여인의 결단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숨을 곳은 없었다. 눈 앞의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든지 혹은 거절하든지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제자들이 도착 후에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예수님께 물어보지 못했던 이유도 뭔가 그렇게 끼어들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놀랐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이나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인해서 놀랐었는데, 여기서는 단지 여자와 말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사마리아 여자가 그러했듯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 통념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수군수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 직접 묻지는 않았다. 앞서 말한 그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자신들이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묻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는 제자들이 너무 지치고 배고파서 굳이 묻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괜히 물어봤다가 점심 시간이 수업 시간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제자들은 이 상황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은 이러했다.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8-29절)

니고데모에게는 한참이 걸렸던 변화가 이 여자에게는 즉시 일어났다. 물론 거듭남은 순간의 사건이나. 하지만 그 결과로서의 열매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다르다. 어쩌면 니고데모의 경우는 포기해야할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었던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면 꼭 그렇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수학 공식처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거듭남이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변화는 빠르든 느리든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매우 극적이어서 누구든 그녀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물을 길으러 우물로 왔던 사람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우물을 떠났다. 사람들을 피해서 움직였던 사람이 먼저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해야하지 않느냐고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그 증거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먼저) 말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감추고 싶었지만, 아마도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일이었다. 그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았을 것이고, 자기를 두고 수군수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전도에 대해서 알아야할 또 다른 사실이다. 전도는 구원 받은 사람의 가장 확실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앞선 말씀에서 나눴던 것처럼 모든 사람은 예배자다. 예배자의 큰 특징은 자신이 예배하는 대상을 사랑하여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말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같은 생각과 감정, 경험 같은 것을 나눈다. 연예인들의 팬 클럽이 생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가 그런 예배자들이기 때문이다.

참된 예배자들도 같은 일을 한다. 우리가 모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는 등의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는 일들인데, 굳이 우리는 힘들게 모여서 그런 일들을 하고 또한 하고 싶어 한다. 예배자로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지상대명령을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전도하지 않았을까? 성경에 전도에 대한 명령이 없었으면 우리는 전도하지도 않고 전도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전도를 하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다. 그렇지 않다면, 참된 예배자가 아니다. 정말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우리는 그 얘기를 하고 싶어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어한다. 재밌는 경험을 하거나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를 당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즉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알리고 싶어한다. 그것이 예배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보면 그렇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가서 내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일을 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창하거나 매우 설득력있는 논리로 전도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며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라고 초청한 것 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30절을 보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30절)

하나님께서 진짜 이제 막 구원받은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이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사실 한 사람도 우리가 구원할 수는 없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구원의 산증인으로서 정직하게 증언할 뿐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말로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또 명령에 순종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이고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는 것처럼, 전도도 그렇다. 우리는 전도를 하고 싶어하지만 또한 그렇게 해야할 책임도 있다. 전도와 관련된 배움과 훈련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전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전도할 수 있고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
전도는 양식이다
(31-37절).

사마리아 여자가 동네로 돌아가서 복음과 구원의 증인이 되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에 대한 추가 수업을 진행하셨다. 수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1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31-33절)

예수님은 종종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셔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셨었다. 니고데모에게는 대뜸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셔서 그를 당황하게 하셨었다. 바로 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여자는 실제로 마시는 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다른 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 때는 가만히 들으면 예수님께서 뭔가 다른 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렇지도 않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33절처럼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소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영적인 양식이 있다”고는 말씀해주셔야 오해하지 않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오해하게 대답을 하셨다.

당연히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셨다. 제자들에게 영적인 원리를 더욱 확실하게 가르치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다. 너무 배고프고 지쳐있기에 모든 사람이 그 무엇보다 먹고 쉬는 것을 가장 우선시 하는 이런 상황을 예수님은 사용하셔서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양식”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이다. 우리는 음식을 왜 먹을까? 일차적으로는 영양과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는다. 그리고 그로인한 만족감과 기쁨을 위해서도 먹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렇게 하는 양식은 이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으로 힘을 얻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쁨을 얻는다는 말이다.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라고 표현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좀 더 특정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목적은 무엇일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미션, 즉 사명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신 후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9:10).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셨지만, 그 하시는 모든 일은 결국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관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는데, 바로 구원자로서 이 일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전도자로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신 것처럼 여기 사마리아 여인도 찾아 구원하셨고 이제 곧 그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무거운 ‘사명’이라고 해야할 이 일을 예수님은 “양식”이라고 표현하셨다. 이 일을 하는 것이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사탄의 시험이 바로 이것과 관련된 시험이었다. 사탄은 40일을 굶주린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마 4: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돌을 떡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다. 하지만 자격이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40일을 굶주린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에 떡을 먹는 것인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신명기 8:3을 인용해서 답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오히려 그것이 참된 양식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에 전반에서 볼 수 있는 원리였다. 요한복음 4장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오셨고,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그가 구원에 이르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셨다. 육적으로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그보다 더 큰 만족과 기쁨이 있었고 그것이 또한 예수님께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 실제로 예수님은 어떤 음식도 드시지 않으셨을까? 그랬다면 애초에 제자들에 예수님께 음식을 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목마르기도 하시고 배고프시기도 하셨다. 아마 이 말씀을 하시고나서 예수님은 음식을 드셨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휴식도 필요없다고 가르치신 것도 아니다. 육체의 쉼은 당연히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내서 제자들이 쉴 수 있게 하기도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과 교제하며 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셨다.

단지 예수님은 이 상황을 영적인 만족과 기쁨에 대해서 가르치기 좋은 상황으로 보시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신 것 뿐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제자들의 우선순위에 있어야 하며 또한 그 일은 소모적이거나 무거운 짐으로 여겨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힘을 얻기도 하고 기쁨과 만족을 누린다. 이 일에 내가 어떻게 관여했는지가 중요하지는 않다.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찾았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로 인해 모두가 기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항상 짐이 될 뿐이고 언제나 에너지를 쏟는 일만 된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점검해볼 필요도 있다. 단지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당 청소를 하거나 애찬 식사를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할 수 있다. 최근 어떤 교회에서는 AI가 설교를 하게 했다고 하기도 한다. 사실 돈만 많이 준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좋은 장소에서 더 맛있는 음식도 먹고 더 수준 있는 예배(?)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심지어 영이 없는 존재도 이런 일들을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일로 인해서 어떤 힘도 얻지 못하고 만족이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다. 그 일의 댓가로 많은 돈을 받아야 그렇게 된다.

만약에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그 원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잘못된 동기와 목적, 혹은 기대를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일을 멈추고 자신의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전도는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일반적인 속담을 사용해서 전도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말씀해주신다.

35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5-37절)

예수님은 당시 사마리아 수가 동네의 상황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동네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계셨다.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것이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도 이 추수에 참여하게 될 것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두 개의 속담을 인용하셨는데, 둘 다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신 부분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셨다. 이 시점에서 아직 추수까지 실제로 4달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와 관계없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속담처럼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인용하셨을 것이다. 즉,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까지는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데, 전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거두는 자는 이미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있다. 예수님께서 뿌린 복음의 씨는 이미 영생의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추수의 때는 항상 ‘지금’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속담을 인용하셨다. 일반적으로는 심는 사람이 거두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고 이 속담은 그런 상황에 사용된다. 거두는 사람 입장에서는 행운이고, 심은 사람 입장에서는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전도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전도의 관점에서는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른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신다. 38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 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사마리아 수가 동네의 추수에 기여했다는 의미다. 세례 요한도 그 중 하나일 것이고, 모세오경을 기록한 모세도 멀리 보면 씨를 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런 노력의 결과를 오늘 제자들이 수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36절 끝에 하신 말씀이다. 그로 인해서 뿌리는 자는 서러워하고 거두는 사람만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둘 다가 기뻐하게 된다고 하신다. 전도가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많은 사람이 관여하게 되는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둘 때, 거두는 사람만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도의 이 두 원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의 추수 때는 지금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이 추수에 동참하고 있다. 교회 안에 구원 받은 자가 더해지고 침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일처럼 여길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다 이 일에 관여했기에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다. 각자가 이 일에 관여하는 모습은 다르다. 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누구는 편한 일을 하고 누구는 힘든 일을 한다고 생각할 문제도 아니다. 누구는 인정받고 누구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함께 이 일을 하고 함께 기뻐한다.

끝으로 사도 요한은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하며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한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
전도는 멈추지 않는다
(39-42절).

39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결국 동네의 많은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다. 그들은 여자의 간증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신 줄 알고 믿게 되었다. 간증은 좋은 전도의 수단이다. 논리적인 변증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대상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은 바울의 말처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능력이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가능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런 말을 들을 때 서운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더욱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한 부분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들만의 구주가 아니라 “세상의 구주”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구주이시며 사마리아 여자의 구주시다.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자기만 믿고 끝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했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전도는 멈추지 않는다.

복음이 한 곳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들은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은 우물에서 한 바가지 길어낸 물이 아니라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다. 이 샘물은 우리의 필요를 가득 채우고도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우리 주변의 목마른 사람들에게 이 샘물은 흘러가야 한다. 우리가 그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 중 하나가 아니라 세상의 ‘유일한 구주’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샘물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샘물이시다. 세상은 예수님이 아니면 그 목마름을 채울 수 없다.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 샘물을 계속해서 흘러가게 해야 한다. 그것이 먼저 구원을 받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래서 끝으로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가 더 깨어나기를 원한다.

첫째로, 전도는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린 정말 하나님께 “저에게 이런 일을 맡기시다니요. 영광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바울은 옛언약의 사역자인 모세와 새언약의 사역자를 비교하면서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라고 말했다(고후 3:9). 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도 말했다(고후 4:7). 정말 그렇다. 세상의 구주를 세상에 소개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 같은 사람이 가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 귀한 일을 굳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정말 전도에 있어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할 것이다.

둘째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세상을 무심하게 보지 말고 부러워하며 보지 말라. 긍휼한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바로 목마른 사람들이다. 바다 한 가운데서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하려는 사람들이다.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내가 오늘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함께 했던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오늘 무시했던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내가 오늘 화가 나서 말도 섞고 싶지 않았던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내가 오늘 공부 때문에 속상해했던 내 자녀가 그런 사람이다. 그들이 정말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생각해볼 때, 오늘 나의 말이나 삶이 그에 합당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눈이 필요하다. 그분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의 말씀을 살펴봤다. 놀랍게도 이 본문에서 확실하게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목마르고 배고픔을 겪으셨다. 진짜 사람이 되셨다.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되셨다.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를 찾아 오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났던 일은 매우 특별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그녀를 구원하기위해 일부러 그녀를 찾아 가셨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모든 구원 받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다.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을 찾으셔서 구원하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인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또한 전하는 자들이 되자. 예배하고 전도하자. 그렇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