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날 때부터 눈 먼 사람(들) 1

본문: 요한복음 9장

설교자: 최종혁

메시아이신 예수님보다 조금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감옥에 있을 때에 그의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가 정말 맞느냐는 질문이었다. 요한이 감옥에 있으면서 어느정도로 심각한 믿음의 위기를 겪었었는지는 요한 자신 만이 정확히 알겠지만, 우리가 지난 시편 89편에서 봤던 그런 신앙의 괴리감을 요한이 느꼈던 것은 분명했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은 다른 구약의 성도들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즉각적인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를 거절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했었다. 그래서 요한이 선포했던 메시지도 그러했다. 그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며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곧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선포했다(마 3:10).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도 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셨다. 처음에야 당연히 그렇게 하실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요한 자신은 감옥에 갇혀 시간만 지나자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셨을까?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왜 요한의 기대대로 예수님께서 행하지 않으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셔야만 할 것 같았다. 요한의 기대가 틀렸다면 틀렸다고, 맞다면 왜 지금은 이런 상황인지 설명해주셔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하셨다. 그것이 요한에게 충분한 답이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일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는 요한의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요한의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그 일들은 메시아가 할 일에 대한 예언이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가 다스릴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35:4–6 …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이 정확히 이 일이었다. 메시아의 나라가 온전히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그런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올 메시아임은 분명히 증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이 말씀을 읽으셨다.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포하셨다(21절). 예수님이 바로 예언된 메시아이셨던 것이고, 그분이 보여주신 치유의 능력이 그 사실을 증명했던 것이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심으로서 그의 질문에 답하시고 그의 믿음을 굳게 하셨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요한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대부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9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동일하게 보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영적인 맹인이라 말씀하셨다(요 9:39).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사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포함해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이 가득했음을 볼 수 있다. 스스로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9장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길게 기록한 이유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의 영적인 이야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적인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이 영적인 맹인인 우리 모두의 메시아, 나의 메시아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자. 특히 오늘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고통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로 잡기 원한다.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어쩌면 이 맹인은 요한과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큰 믿음과 현실의 괴리감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도 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서 알았겠지만 보지 못한다는 남들과는 다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남들보다 훨씬 더 힘든 삶을 살아야만하는 자신의 삶을 볼 때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메시아에 대해서도 들었었고 앞서 읽었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도 알았겠지만 어쩌면 앞을 보지 못하는 자신이 바로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구걸하는 것 뿐이었다(8절). 그렇게 철저한 어둠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를 보신 것이다.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오처럼 이 맹인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부르며 도우심을 구했던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보셨다. 2절의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예수님은 그냥 보여서 그를 보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랬으면 제자들도 굳이 이 사람에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주목해서 보셨다.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보셨다. 맹인은 문자 그대로도 비유적으로도 어둠 만이 그의 친구였는데, 빛이신 예수님께서(5절)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2절을 보면 제자들은 이미 이 맹인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주목하시자 그들이 항상 논쟁하던 신학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다.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 질문에는 분명한 전제가 둘이 있다. 하나는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나쁜 일’(죄의 결과, 저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개인의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맹인이 된 것이라면 사실 논쟁이 될 것이 크게 없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했던 말처럼,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결과로서 이런 심판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면서부터 그랬다면 당사자에게서 원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어떤 랍비들은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약 성경을 보면 그렇게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에게까지 저주가 미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기도 하고, 대표적인 성병인 임질을 가진 여성이 임신 후 출산을 하게 되면 아기는 결막염이 생기거나 심하면 실명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부모의 성적인 죄 때문에 아이가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장애의 원인을 영적인데서 찾아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스겔 말씀에서 자녀가 부모의 죄를 담당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자기 죄는 자기가 담당해야 한다는 너무나 분명한 말씀이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다(출 20:5). 이런 말씀 때문에 사람들은 부모의 죄에 대한 댓가를 자녀가 감당하기도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측면보다는 집합적이고 일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한 사람이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만을 잘 섬기는 무고한 그 사람의 자손들이 대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우상 숭배가 그의 자손들에게 이어질 것이고 그로인해 여러 세대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자녀들은 부모의 종교나 도덕관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면에서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이어지고 대대로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한계점 때문에 어떻게든 당사자에게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랍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태어나기 전의 아기가 어떤 식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우 할 수 있는 얘기는 엄마 뱃속에서 너무 심하게 엄마를 발로 찼다거나 산고를 너무 많이 겪게 했다는 수준이었다.

즉, 일반적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신체적인 장애나 질병, 더 나아가 삶에서 만나는 여러 고난들, 즉 나쁜 일들은 개인의 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믿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진 경우는 논리적인 설명이 어려웠고, 따라서 이에 대한 논쟁은 사람들 사이에게 흔한 신학적 논쟁이 되어왔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이유도 정말로 ‘이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런 신학적 쟁점에 대해서 질문하기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실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둔 전제 위에서 답하지 않으셨다. 잘못된 전제 위에서는 제대로 된 답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예수님은 이들의 두번째 전제를 깨뜨리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궁극적인 원인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일 뿐이다.

성경은 분명 죄와 질병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죄로 인해서 사람들은 질병으로 고생하고 더 나아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질병이나 고통은 죄의 결과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죄의 결과로 누구든 질병에 걸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개인의 죄의 결과로 어떤 질병에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구약에서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을 때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진노하시고 나병에 걸리게 하셨다.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못에 있던 38년된 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나중에 그 사람을 만나져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4절). 이 사람의 경우도 병의 원인이 자신의 죄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와 질병(고난)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다. 즉, 일반적인 측면에서 죄로 인해 인류 가운데 질병 등의 고난이 들어왔고, 때로는 개인의 죄의 결과로 어떤 고난을 겪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난이 항상 개인의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38년된 병자나 오늘 본문의 맹인 같은 경우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질병과 장애의 원인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일을 당하더라도 누군가는 자기 죄 때문에, 누군가는 그와 상관없이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

오해하지 말라. 맹인이 죄인인 것도 맞고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도 맞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이나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진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5)고 말씀하셨을 때, 맹인이라고 해서 예외적으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다만, 그 혹은 그의 부모의 개인적인 어떤 특별한 죄가 맹인됨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사람은 어떤 일의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교만하게 내가 뭐라도 된 것마냥 “이게 다 나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물론 너무 많이 먹어서 살찐 것은 나 때문인 것이 맞다. 내가 부주의하게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난 것도 나 때문인 것은 맞다. 그런 책임 회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으로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그분의 지혜로 우리 삶에서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서 발생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 그렇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연약함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맹인됨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아래서 일어난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실 것임을 밝히 말씀하셨다.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 그로 인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이 이 사람이 맹인된 것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로서 예수님은 첫번째 전제도 깨뜨리셨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별 것 아닌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우리를 찾아와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셨을 때 사람들의 고통을 돌아 보시고 치유해주셨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통 중에 있는 맹인을 예수님께서 먼저 주목하여 보셨다. 고통은 고통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을 ‘나쁜 일’, 즉 나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 없었으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고통을 나쁜 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꺾이지 않는 마음, 즉 신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에게 있어서도 궁극의 선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의 고통이 ‘나쁜 일’이 아님을 알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요셉에게 일어났었던 일은 요셉을 괴롭게 했지만 요셉은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신 것이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누가 와서 그렇게 말했다면 분노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그런 하나님 안믿는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마 요셉은 형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살았을 것이고, 만약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올라 그의 형들을 만났다면 형들을 최대한 괴롭게 했을 것이다. 그에게 일어났던 나쁜 일에 대한 댓가로 그의 형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했을 것이다. 그것을 그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요셉이 경험했던 고통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 일로 인해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결국 죽음 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켰을 때 모든 것은 선이 되었다. 고통은 있었지만 나쁜 일은 없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맹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맹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그를 통해 드러났다. 그로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지만 그것은 또한 그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선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믿고 예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38절). 이 땅에서는 십수년 길면 수십년을 맹인으로 살았겠지만, 영원에서 그는 아무 고통없이 참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있었지만 나쁜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면 어떤 일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아야할 나쁜 일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나에게도 최고의 선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의 태도임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관점에서 삶을 살아야 할 것도 강조하셨다.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강조하셨다. 하나는 사명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는게 좋겠다거나 하면 도움이 된다가 아니라 해야한다다.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할만한 상황에서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제자들이 함께 한 것은 물론이고 지금의 우리도 동역자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의 가치에 두고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한다. 요한처럼 감옥에 갇혀있든, 맹인으로 태어났든, 어떤 상황에서 살아가든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한 나에게 나쁜 일은 없음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명을 내려놓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 상황에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최우선의 가치에 둔다면 중요한 것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된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렇게 하시나요가 아니라, 하나님 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요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조차도 내면의 수많은 싸움을 이겨내야 할 수 있는 질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가 던져야할 질문이고 살아야할 삶이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시간이다. 예수님은 때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낮에 일을 하고 밤에는 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낮이 언제고 밤이 언제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일을 할 수 있을 때가 낮이고 할 수 없을 때가 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이 낮이고 밤은 죽음 이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보면 살아 있을 때에도 주어진 상황이 계속해서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일은 어떤 시기에만 할 수 있기도 하다. 같은 학생회 주일학교 교사라고 해도 나이와 환경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 기회가 주어진 때를 낮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할 때 그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에베소서 5:16에서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기록했다. 시편 90편 12절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낮을 주시고 우리는 그 기회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때가 온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의 고통의 시간도 포함된다. 그 고통의 시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낮, 즉 기회일 수 있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예배의 모습이다. 우리의 고통 중에 우리는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고통을 선으로 바꾸시는 섭리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기회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과거에 할 수 있었던 일들 중에 못하게 되는 것이 많아지면서 점점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주님나라가는거지 뭐’라고 생각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직 하나님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낮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어렸을 때 할 수 없던 일, 젊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지금은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원리가 이 땅에 있는 자신에게도 해당됨을 말씀하셨다.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언제나 빛이시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으셨고 이제 그 일을 하실 것이다. 눈먼 자, 그리고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이다. 메시아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예수님은 이제 곧 하실 것이다. 그것은 다음 주에 이어서 살펴보자.

오늘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두고 벌어진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고통이 있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정리하면 이렇다. 죄로 인해 우리는 고통이 있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어떤 고통은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어떤 사람만 겪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이 꼭 우리에게 나쁜 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무궁한 지혜 가운데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최우선에 둔다면 이 고통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다.

그러니 첫째로, 남의 고통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무궁하신 지혜를 모른다. 잘 모르면서 남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먼저 고통 받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가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원인의 판단은 우리 몫이 아니다.

다음으로 나의 고통의 때에 이 모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눈이 멀어서 아얘 보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시력이 약해져서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한다. 특히 더 큰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렇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그가 그렇게 확신했었던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편의 저자들이 하나님께 어디계시냐고 묻고 언제까지냐고 물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고통 가운데 시력이 흐려진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고 더 기도해야할 때다. 우리 눈이 밝아져서 진리를 바로 봐야할 때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은 우리에게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지배 당하며 괴롭기만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보기를 원하시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참된 행복임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기회를 주시는 그 모든 시간 동안에 충성스럽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어둠 속에 있을 때 눈을 더 크게 떠야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해야할 때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어둠과는 비할 수 없는 것임에 기뻐하고 또한 세상 가운데 그렇게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