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인과 죄

본문 : 베드로전서 2장 11-12절

설교자 : 조정의

벧전 2:11-12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의 시를 기록한 후에 신자에게 주어진 명령,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야 한다, 형제를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렇게 명령하는 근거에 대해서, 우리의 구원이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말을 마치고 그 말씀으로 다시 구원에 이르기까지 자라라고 말하고,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왜 그리스도여야 하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 택하신 기준점, 모퉁이돌이 되시고, 그분이 거치는 반석(심판자)이 되신다, 그분을 택한 자들(그분 위에 세워진 자)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교리적인 설명이라면 이제 오늘 말씀부터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13-17절에서는 인간의 모든 제도와 왕에 대해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 오늘날로 말하면 직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다음으로는 가정생활로 옮겨갑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앞서 오늘 말씀에서는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구원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될 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할 대상(죄의 실재)에 대해 말씀하고, 그와 관련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죄에 대한 명령)와 그렇게 하는 목적(그 명령의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과 죄’라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모든 죄를 벗어버릴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 완벽하게 의로워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을 향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 속에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1:22).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이것이 진실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가리켜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말합니다. “거류민”은 자신의 집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을 말하고, “나그네”는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다 자신이 속한 곳이 아닌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서 지낼 때 저는 그곳에서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차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잠시 머무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류민, 나그네는 자신이 속한 다른 곳이 있는, 즉 본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나그네와 행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강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권하는 내용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보통 성적인 의미로 이해하기가 쉬운데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의 정욕은 모든 죄에 대한 강한 열망을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육체의 욕망이 맺는 것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이 가진 특징에 대해 “영혼을 거슬러 싸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적군이라는 뜻의 군대용어로, 가차없고 악의적인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를 열망하는 마음이 우리의 영혼 가운데 있어서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테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호시탐탐 영혼을 무너뜨릴 기회를 노리며 신자 안에 새롭게 거듭난 마음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죄의 문제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완전하게 새롭게 된 사람이고 삶에서 죄를 짓는 이유는 사탄과 세상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싸움과 다툼은 지체 중에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약 4:1)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았으므로 죄의 문제는 나와 상관없다, 내 영혼은 완벽하게 깨끗하고 삶에서 죄를 짓는 것은 그저 내 몸이 짓는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했고 오늘날의 완전 성화주의자가 주장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영혼과 육체를 억지로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요일 1:10)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순간까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나 그 이후 짓는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카톨릭과 몰몬교 등의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2,14).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믿는 자들도 역시 마음에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1~24).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들의 동일한 고백이 아닙니까. 거듭난 영혼들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싶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반대로 죄의 열망이 있어 죄의 실재를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제어하라”는 것은 ‘떼어놓으라’, ‘계속해서 피하라’입니다. 이 말은 현재형으로서 지속적으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라고 말합니다. 옛 자아, 즉 죄의 정욕과 싸우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말입니다.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롬 6:12),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벧전 1:14). 이것은 그냥 미워하고 단순히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쟁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들면, 그것으로 괴로워해야 합니다. 성적인 죄가 마음에 들어오면 그것과 싸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죄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잠깐이라는 생각, 안일한 생각,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다른 사람은 더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 것이 죄이지만 이렇게 만든 상황이 있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 어떤 핑계, 이유를 대더라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정욕은 우리가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눈을 빼고 손과 발을 잘라서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온전한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작은 점도 흠도 죄입니다. 그 죄 때문에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예수님의 피가 흘려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사도 베드로는 악한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고 제어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선한 행실을 적극적으로 취하라고 말합니다. 악한 삶을 버리고, 선한 행실을 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양팔의 날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죄악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새 사람을 입었으니”(골 3:5, 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살전 4:3-4)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행실을 선하게 가지라”(벧전 2:11-12).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우리는 단순히 죄를 멀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에 따라 살다 보면 육체의 욕심을 버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새사람이 갈망하는 성령의 욕구를 따르는 것이 육체의 욕구를 버리는 길입니다.

 저는 어느 날 학교에서 길고 긴 수업을 들은 뒤 배고프고 고단한 상태로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가면 아내가 맛있는 밥을 준비하고 기다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갔는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아내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생겨납니다. 그러한 육체의 정욕이 올라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나의 권리라는 생각, 이기심과 교만인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남편으로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그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아내에게 화를 내고자 하는 마음이 나의 교만한 마음 때문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처한 환경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삶을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의 정욕을 피할 수 있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거나 방임해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테러리스트들과 싸우고 그들을 제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말씀을 사모하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옥에 갑니까? 이 땅에서 과연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모두 아니오입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이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힘들게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이 편지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부터 많은 비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고 거부했으니 사회적인 문제아였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노예제도였는데 그리스도인이 되면 한 형제자매가 되었으므로 그 노예제도가 와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정부를 흔드는 부정적인 존재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왕따와 같았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좋아했던 것은 오락과 향락, 성적인 쾌락 등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하게 살고자 그들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세속적인 영화나 문화를 거부하겠다고 하면 대중문화를 거부하는 부류가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마신다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산다면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교회가 전하는 진리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진화론이 거짓이라고 가르치고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진리를 거부한 자를 징계하는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무례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베스트셀러도 거짓이 가득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멋지고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가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세상이 비방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베드로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죄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선한 삶을 추구할 때, 우리의 선한 일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신약에서 “오시는 날”은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믿는 자가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애쓸 때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2:9-10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에 대해,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선한 삶을 사는 이유는 세상에 하나님을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와 싸우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그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죄는 실재합니다. 우리는 그 죄와 싸워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는데 왜 여전히 죄를 가지고 있을까요? 구원받은 이후에는 항상 찬송과 감사, 기쁨만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 여전히 죄가 있는 문제는 미스터리입니다. 왜 하나님이 여전히 죄의 문제를 남겨두셨는지, 믿는 자에게 육체의 정욕을 남겨두셨는지는 미스터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입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를 것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됩니다. 때때로 시기와 질투,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죄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와 싸우며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요? 그들은 마치 이 전쟁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듯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의 소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물어올 때 우리는 한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분의 이름입니다. 내가 자비하심을 맛보았던 그분, 그래서 나를 기꺼이 전쟁에 뛰어들게 하시는 분, 내가 죄와 싸울 때 힘을 주시는 분,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 말입니다.

우리의 죄와 싸우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니 죄와 끊임없이 싸우시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우리의 그러한 삶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