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2
본문 : 요한일서 1장 5~10절
설교자 : 최  종 혁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5절).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해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만들어낸 생각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영원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직접 전하시고 보여주셨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빛과 연결하여 말할 때 3가지 의미로 말하였는데,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진리되심, 그리고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 되심입니다. 요한은 이 빛에 대해 말할 때 그 빛이 어떤 영역을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딘가에 빛이 있으면 그 주변은 빛의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빛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빛은 어둠으로 인해 감춰져 있던 것들을 드러냅니다. 밤늦게 집에 들어와 전등불을 켜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둠에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빛이시고 진리의 빛이시며 생명의 빛이시기에 죄와 거짓과 사망, 죽음을 드러냅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이 진리(하나님은 빛이시라)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그리고 우리와 죄의 관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입니다. 이 원리의 적용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6-7). 이 말씀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상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상황이고(6), 또 하나의 상황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상황입니다(7).

 그들은 둘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동행한다’, ‘교제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또는 ‘내가 구원받았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올바른 복음을 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그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1-4절). 그러나 그들의 차이는 그들의 삶에 있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만난 사람은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실제적인 변화가 그 사람의 내면, 영적인 일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전체를 꿰뚫는 주제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진찰을 합니다. 환자에게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몇 가지 질문들을 통해 증상을 알면 그에게 어떤 질병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는 일이 그것과 유사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꼭 겉모습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그러나 여기서 “행한다”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걷는다’는 것과 같은데, 바로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한두 번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 특징, 패턴이 그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형제님들이 교회 뒤뜰에서 축구를 하지만 형제님들을 축구선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축구선수는 그의 삶이 모두 축구에 맞춰져 있고 그것을 잘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그 축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한다”는 것은 가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볼 때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입니다. 빛이 거룩함, 진리, 생명이라면, 어둠은 거짓이고 죄악이며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행하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행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들의 상태를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엡 5:8),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사 9:2), “눈먼 자”, “흑암에 앉은 자”(사 42:7).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를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이것이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과 사단, 육체의 정욕이 원하는 것을 따르고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것에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 7:5). 그 마음의 소원은 세상과 사단이 원하는 것, 육신의 정욕이 원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어둠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여전히 죄의 정욕을 따라 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의 삶은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원리에 따라 적용해보면 그분 안에는 거짓, 죄악, 죽음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거짓과 죄악, 죽음 가운데 거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일 수 있겠습니까. 그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간단하고 명료한 말씀이고, 또한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것, 스스로 진리를 행하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원수된 자이고 거듭나지 못한 자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 이들은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빛이신 것 같이 빛의 영역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 되시기에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진리이고 거룩하며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 나도 그 빛 가운데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빛에 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빛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빛이 있어야 빛 가운데로 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4-9). 어떻게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어둠 가운데 행하던 자들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 행하던 자들을 빛 가운데로 옮기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해서 빛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빛에 거하는 자들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어둠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은 세상과 사탄을 따라,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최우선이었고 크든 작든 그것이 그러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그 마음의 소원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어둠 속에서 가지고 있던 탐욕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대신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어둠에 행하던 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마음의 소원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그의 삶을 통해서 그러납니다. 입술과 행동을 통해서 크든 작든 드러납니다.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에 대해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함’이라는 뜻입니다. 일상에서는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종교적 규칙을 지키고 행동 강령을 잘 따르고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의 ‘경건’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그분을 닮은 모습입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어둠에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둠에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왜곡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둠 에 행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빛과 어둠이 나뉘는 것처럼 명확합니다. 중간 어디는 없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을 사도 요한은 다시 두 가지 표현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것은 구원의 목적과 같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사람입니다. 그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을 때는 서로가 다른 것을 원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결코 동행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믿는 자들에게,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믿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고 믿지 않는 자는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들어오면 우리는 원하는 것이 모두 같아집니다. 동일한 것,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사귐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말은 대부분의 다른 번역본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과 죄의 문제를 관계의 문제, 하나님과의 사귐의 문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적인 의미에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는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관계의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죄들도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해결했기 때문에 그 어떤 죄도 씻겨내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여전히 계속해서 씻겨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의미를 말씀하실 때, 주님과 더욱 깊은 관계에 있고 있다며 몸을 씻겨달라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 13:10)고 말씀하십니다. 목욕한 자, 곧 의로운 자는 다시 의롭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회복된 관계는 절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분이 그 구원을 지키시는데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짓는 죄에 대해서는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죄도 계속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0-31).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들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것은 절대 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죄를 짓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어놓지 않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면 이 약속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복을 여러분이 누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계시다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분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합니다. 그렇다면 그분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아무 죄도 짓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이에 대한 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줄이면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빛 가운데 행하는 분입니까, 아니면 어둠 가운데 행하는 분입니까? 과거에 어떠했는가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의 상태를 점검해보십시오. 만약 어둠 가운데 행하는 분이라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험한 말입니다. 진실하게 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고 말하고 그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확신 가운데 거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자의 삶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빛 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빛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삶으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