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
본문 : 누가복음 9장 18~27절
설교자 : 최종혁

2016-05-29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눅 8:18-27) 최종혁

 

오늘 본문은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뽑는, 복음서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개의 질문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의 제자는 어떤 자들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누가복음에서는 계속해서 이러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분의 입으로 직접 이것을 물으십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그의 영원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이 중요한 질문에 앞서, 처음 열두 사도를 세우셨을 때처럼 기도하시고 물으셨습니다. 두 개의 질문을 하십니다. 사실 첫 질문은 두 번째 질문을 위한 징검다리 질문입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기 부담 없는 질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 중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오병이어 사건 중에도 많은 사람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정말 몰라서 궁금해서 물어보신 것은 아니겠지만, 제자들은 각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대답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19절). 지금 이 시점에서 요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지가 요한의 메시지와 같았는데, 큰 능력으로 그것을 전하니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야도 기적의 선지자라 불리는 자였습니다. 엘리야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배할 자로 예언된 자입니다. 엘리야와 같은, 그와 같은 강하고 확신에 찬 선지자가 바로 예수가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더러는 옛 선지자 중 하나가 살아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신명기 18장 15절의 말씀(“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을 기억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올 것이라는 전설도 있었는데, 그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종합해서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심을 알았고 존경심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시는 말씀과 이적을 볼 때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알았지만 그들의 이해는 완전하지 못했고, 치우쳐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요 6:14).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받아들였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원했던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에서는 예수님이 요한이든, 엘리야든, 다른 선지자든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육적인 만족을 채워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원하셨다면, 그분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 이후에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중에 많은 수가 떠나갔습니다. 저 말은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했던 것은 그저 좋은 이야기와 육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딱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그런 분이실까요?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20절) 사역 기간에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사람, 수많은 이적을 경험하고 목격했던 사람들, 바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했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보면 이 대답에 다른 수식어가 더 붙었지만, 누가는 이 한 마디를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신,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인류가 처음 범죄했을 때부터 하나님은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의 자손을 통해 세상의 온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의 자손 중 영원한 나라의 왕이 올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시편 2편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와서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릴 것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제사장들, 왕들, 선지자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기름부으신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시작에서 우리는 천사들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들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눅 2:26). 그리고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자 이제 평안함 가운데 떠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미 간접적으로 이를 언급하셨었습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6-21).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되었던 말씀이 지금 너희들 귀에 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귀신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눅 4:41). 이제 처음으로 제자들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그 백성 가운데로 보내신 유일한 그리스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입니다. 예수님은 그 전하시는 말씀으로 또한 행하시는 이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계속해서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자들이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좀 이상합니다.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21)”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라면 모두에게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라도 더 빨리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예수님은 경고까지 하시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실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이어지는 말씀이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했던 것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이고, 로마를 비롯한 이방인은 그들의 지배 아래 놓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일은 그런 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왕으로 삼고 싶어 했는데,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라는 말을 제자들을 통해서 듣게 되면 더욱 그렇게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실 길은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면 구약에 예언된 대로 왕으로서 이 땅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고난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장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2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전에도 예수님은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셨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예수님은 고난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9:44; 12:50; 13:31~33; 17:25; 18:31~33). 그것이 예수님의 남은 사역에서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게 되실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악된 세상에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더욱 큰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육체적인 고통(가장 잔인하게 사형하는 방법인 십자가), 정신적인 고통(제자의 배신, 백성들의 배신), 그리고 영적인 고통(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일시적 단절)까지 예수님은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었지만(시 22; 사 53),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따라 행하며 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했습니다. 그 핵심적인 역할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인의 통치기구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입니다. 모든 권력 그룹들이 그렇듯, 이들도 서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기 위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도전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방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그들이 만든 전통을 따르지 않는 모습에 분개했고,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시기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힘을 합쳐서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이 계획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걸림이 되었던 것은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 앞에서 의롭기’를 원했던 그들은 대중이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이 예수님을 그냥 잡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공개처형을 원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 그들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잡을 수 있었고,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심문한 후 그들이 원하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넘겨서 예수님을 죽게 했습니다. 모두가 부끄러워하는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매달아 예수님을 공적인 죄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진짜 왕을 ‘자칭 왕’이라 조롱하며 십자가에 죽게 한 것입니다.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목격한 자들은 모두 다 예수님이 패배했다 혹은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과 죽음이 필요하듯, 부활도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이 성경에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확언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5-26).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는 일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한 제자들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어떤 제자는 예수님이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고난과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일이 있을거다 정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고난이 필요했을까?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눅 24:46-47)”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면, 죄 없는 자가 그 죄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죄를 담당해야 하고 그 결과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순종하여 그 길을 가시겠다고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십니다. 그 고난과 죽음, 부활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왕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해도, ‘그리스도, 즉 내 영혼의 구원자이며 주인이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이전과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 고백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가 어떤 자인지, 어떤 삶을 사는지 말씀하십니다.

그의 제자는 어떤 자들인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 가지 명령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르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부인한다는 것은 ‘거절하다. 포기하다. 내려놓다’입니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중심에서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삶의 주인으로서의 나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매우 근본적인 결정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나’입니다. 나의 주인은 나고, 내 삶의 목적도 나입니다. 무엇을 하든 내가 즐겁고 내가 행복한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꿔야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나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지금 나의 자리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면 나한테 뭐가 좋은데?’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하면 예수님께 뭐가 좋은데?’라고 묻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이 비유적인 표현은 당시의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죄수들의 모습에서 온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자신이 지고 처형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게 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매달았을 때도 힘들지만 그 전에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과정 속에 고통을 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공개 처형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합니다. 응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죄인을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수치를 겪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과정은 그 십자가를 지게 만든 자들(로마)의 절대적인 권력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십자가를 지고 걷는 순간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로마라는 나라가 이렇게 강하구나, 내가 굴복해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십자가는 누가 지운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가 진 십자가입니다. 어쩔 수 없는 굴복이 아닌 자발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십자가입니다. 그로 인한 수치와 고난, 때로는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삶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두 명령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과 실제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제자의 삶은 속세에서 떠난 금욕적인 삶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각오한 삶입니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따른다는 말은 뒤쫓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과 다른 것을 함께 따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단순한 삶의 원리지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상한 얘기지만, 왜 쉽지 않은가 하면 나에게 가장 큰 적이 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또 가장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나에게 가장 큰 적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앞의 문맥에 따라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목숨을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진짜 목숨인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을 위해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무엇을 택하고 싶으냐는 말입니다.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느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어떤 면에서 나는 내 목숨을 잃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진정한 삶을 얻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도 최선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25)” 예수님은 이 진정한 삶, 영생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온 세상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도 목숨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너무 손해만 보는 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삶의 가치는 온 세상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얻는 삶입니다. 밭의 보화를 발견하여 모든 재산을 팔아 밭을 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하여 모든 것을 팔아 진주를 산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화의 가치,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뿐입니다. 가치를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얻는 것이 정상입니다. 제자의 삶은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 가장 유익한 삶입니다. 우리의 눈이 이 땅에 고정되어 있으면 손해 보는 것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고정되어 있다면, 영원을 바라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26)” 예수님은 제자의 삶에 대한 말씀을 이 경고의 말로 끝내십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단 한번이라도 그런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예, 베드로).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결국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거절한다는 말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삶을 거절한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를 거절하는 자는 그분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은 고난 받기 위해 오셨고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심판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고난의 주를 따르지 않고 영광의 주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주, 심판의 주로 오실 때 예수님께서 영접할 사람들은 지금 고난의 주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 중 몇에게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변화산). 주님은 몇몇의 제자들이 보았던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도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여 영광에 동참합니다. 어떤 뛰어난 행위를 통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런 삶을 살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은 언제나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며 그런 삶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 영원한 것, 하늘의 가치를 압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더 큰 가치를 알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진 것,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즐겁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그 자리에 있는 무리들에게 ‘아무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이 예수님의 말씀에 해당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 제한 조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신분, 성별, 민족, 나이 등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현재 얼마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혹은 얼마나 착한 삶을 살아왔는지 등은 아무런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 나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기 위해 속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아무런 대가가 없지만, 제자로서 사는 것에는 분명한 희생과 대가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계산할 것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계산해보십시오. 나를 위해서 살면 이 땅에서 일시적이고 썩어질 것, 잠시의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의 나라에서 심판의 주를 만날 것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나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때 영원한 것, 하늘의 썩지 않을 것,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사랑의 아버지를 만날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미 제자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나는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연약함에 기대면서 하나님의 능하게 하심은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길에 들어선지 너무 오래되어 이 길이 어떤 길인지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삶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다시 목표를 향해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이 길에서 혹시 지쳐 있다면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그리스도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런 과정에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로서 그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갈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을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걷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고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시며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게 될 그 때, 스데반을 맞아 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맞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을 따라 고난의 길을 걸어온 우리의 발을 씻기시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기억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구역 모임을 위한 질문들

  1. ‘예수는 그리스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3. 제자의 삶이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4.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당신이 겪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어려움 속에서 무엇이 힘이 되는지도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