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반복되는 실패와 넘치는 은혜
본문 : 창세기 20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인 20장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별명과 전혀 어울리는 않는 아브라함의 실패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의 실패가 있는 곳에 또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실패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후, 마므레에 거하던 아브라함은 네게브라는 지역을 거쳐서 그랄이라는 곳에 거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예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 했던 일을 반복합니다. 어떤 일입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일입니다.

애굽의 일로부터 대략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전쟁에서 승리를 허락하시기도 하셨고, 그의 간구에 응답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신앙의 레벨이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믿음의 분량이 자라서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이전과는 다른, 뭔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실망스럽게도 아브라함은 25년 전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 거짓말의 결과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리고 갑니다.

지금 사라의 나이가 90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좀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사라가 타고난 동안에다 방부제 미모였는지 아니면 특별한 피부 관리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라가 정말 예쁘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파는 비겁한 행동을 다시 반복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로, 여러 경험을 하며 연륜을 쌓았지만, 자신에게 어려움이 생기자 똑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좀 한심해 보이십니까? 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아브라함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실패들, 그 중에 많은 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전에 했던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 많습니다. 사실 나를 얽매이게 만들고, 나를 무너뜨리는 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습관적인 죄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사투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니까 여러분은 제 고향이 경상도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계시겠지만, 제가 편하게 별 생각 없이 말하면 사투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쌀’을 ‘살’로 발음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듣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더 익숙하고 편한 게 있습니다. 죄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특별히 나에게 더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집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특별히 약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과한 욕심 때문에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권위에 반항하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부딪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부딪치고,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딪칩니다. 위에 있는 권위에 따르지를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반복해서 실패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한번 팍하고 터트리고 나서, 자신은 뒤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뒤끝이 없는 것은 좋은데, 앞 끝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뒤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이 문제입니다. 남의 말을 함부로 해서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되는 겁니다. 반복되는 같은 종류의 잘못들, 알지만 또 다시 실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인 유혹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약한 부분입니다. 자신에게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며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이렇게 또 다시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 번은 봐 줄 수 있었지만 두 번은 안 된다. 이제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이렇게 하셨을까요?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또 다시 아브라함의 편에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고를 수습하시는 겁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3)

아비멜렉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라를 데려왔다가 자신이 죽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

아비멜렉의 이 말은 아브라함이 소돔을 중보하면서 하나님께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범죄하기 전에 미리 그를 막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라는 단어가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선지자로서 할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도 소돔을 위해 기도했었고, 지금 이 시점에서도 선지자로서 기도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일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실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서 또 다시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의 선지자의 자격을 무효화 하거나, 그 역할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알고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8절에서 16절까지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아비멜렉이 믿음의 조상 같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같습니다. 조금 헷갈리기도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9-10)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방인 아비멜렉에게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혼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에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우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11-13)

아브라함은 이곳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8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그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로 아내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브라함이 사라를 이복누이라고 말한 것은 상대를 속이고 사라가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의도한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하는 말들은 핑계일 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상황을 탓하고, 사람을 탓하고, 변명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나의 잘못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애통함으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설픈 핑계와 구차한 변명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못했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바로 알 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변명은 이렇게 끝나고, 아비멜렉의 행동이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의 온전치 못한 변명에 비해서 아비멜렉의 행동은 파격적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의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합니다. 그는 사라를 돌려보내고 양과 소와 종들을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애굽 사건에 이어 또다시 재산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신문에 나온다면 어떤 제목으로 나올까요?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아브라함’ 별로 기쁘지도 않고, 떳떳하지도 않은, 찝찝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보상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거주 할 수 있는 땅을 제공하였고, 사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당시의 방법대로 은 천개를 줍니다. 특별히 16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사라의 남편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거짓말을 따라서 ‘오라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은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의 마음을 뜨끔하게 했을 것입니다.

잘못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비록 상대의 거짓말 때문에 잘 알지 못하고 실수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필요한 보상을 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을 말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핑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잘못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보상 이후 아브라함은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아비멜렉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패와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의 실패가 그분의 은혜를 없이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연약함이 그분의 은혜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습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브라함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지금도 반복되는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더 큽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몇 번 잘못했다고 인연을 끊자며 집에서 쫓아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혹시 아브라함처럼 실패하셨습니까? 그것도 같은 잘못을 또 저질렀습니까? 이제 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또 넘어지셨습니까?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 때문에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렇다 하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죄가 있다면 진심으로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당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가 죄의 모든 결과를 없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귀의 거짓말과 송사에 넘어가지 말고, 변함이 없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이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서로에게 은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없는 은혜를 받은 우리가 오히려 은혜에 대해서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가장 쉽게 범하는 죄가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와 비판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는 것처럼,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잊어버리고 스스로를 괜찮다 생각하며 별것도 아닌 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관대하도록 합시다. 나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합시다. 사실 가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면서도 때로는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릅니다.

빌리 그래함의 아내인 루스 사모님이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혹시 사모님은 남편과 이혼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루스 사모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저는 이혼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살인은 여러 번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많이 사랑하며 서로에 대해서 용납해야 할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낳은 자녀라 하더라도 은혜로 대하고 사랑으로 품어주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지만 사랑하기 힘들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향해 판단하며, 정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하는 일이고, 서로에게 은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향해 마음을 넓히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사랑을 담아서 말하고 은혜를 베풀도록 합시다. 서로에 대해서 친절히 대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잘하려고 하지만 또 넘어지고 자주 실패하는 우리를 인내하시고 받아주시며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