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거듭나야 할 사람(들) 2

본문: 요한복음 3장 1-21절

설교자: 최종혁

 

“누가 거듭나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누가 봐도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만약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나는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이 있었고 순종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세상의 기준에서도 종교적 기준에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면’, ‘더 노력해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과 같은 의미로 들렸을 수 있지만, 니고데모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뭐를 더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런 의미에게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해야할 무언가가 더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을 수 있지만,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해야 할 어떤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일어나야할 어떤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을 때, 이 말은 일차적으로 권리가 아니라 능력의 의미였다. 즉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권리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볼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사람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자기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노력이 부족해서 좀 더 노력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의 노력이 잘못되어서 다른 측면에서 노력을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또 있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던 부자 청년의 경우다(마 19:16). 흥미롭게도 이 경우에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야 한다”라고 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율법의 계명들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했는데, 이 청년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셨을까? 아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 속에 이미 답이 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선한 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게 하려고 하셨을 뿐이다.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 예수님의 이런 의도를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계명들을 지킬 것을 말씀하시자 그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반문했다(마 19:20). 그는 이미 할만큼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요구하셨다(마 19:21). 그러자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마 19:22). 누가는 그가 “큰 부자”였다고 기록했다(눅 18:23). 하나님보다 그리고 그의 이웃보다 자신의 재물을 더 사랑하는 이 사람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켰을리 없다. 예수님은 사람이 그렇게 의로울 수 없음을 율법을 통해 그가 깨닫게 하셨던 것이다. 더 많은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영생)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기준은 그보다 더 높기에 결코 거기에 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부자 청년이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하셨다.

사람의 노력이라는 것은 마치 시험보는 학생이 서술형 시험 문제의 답을 알지 못해서 엉뚱한 답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써내는 것과 같다. 그 정성이 갸륵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답처리를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내 입장에서야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점수를 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중요한 시험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답은 ‘거듭남’이다. 따라서 그 외의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는 굳이 부자 청년에게 하셨던 것처럼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셨다. 청년은 마치 대학을 갓졸업한 학생과 같았다.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 “좀 안다”고 말하는 것 같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다”고 호기롭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은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으셨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아니었다. 그는 지식적으로 훨씬 더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보다도 더 높은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박사였다. 종교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니고데모는 그러했다. 그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이고 또한 바리새인이면서도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답을 찾기 원했고 예수님은 ‘거듭남’이 유일한 답임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거듭남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보자.

‘거듭나야 한다’ 혹은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이렇게 답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

이 말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확실히 드러난다. 니고데모는 “다시”로 이해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이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물은 것이다.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가요?’라는 의미의 질문이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출생은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태어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니고데모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여기서 말했다.

첫째로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이 ‘나는 것(출생)’에 있다는 것을 그는 이해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지금까지 해왔던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해야한다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새로운 출생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와 관련된 질문을 했던 것이다.

둘째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니고데모는 알았다. 사실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느냐고 되물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니고데모는 여기서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다시 태어날 ‘능력’이 없다고 예수님께 말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이 니고데모가 알았어야할 (그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실체다. 사람은 육적으로 다시 태어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다시 태어날 능력이 없다. 태어나는 것은 그 어떤 경우도 태어나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거듭난다”는 표현에서 의도하신 부분이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해 온 니고데모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 그가 해야할 어떤 일이 아니라 그에게 일어나야할 어떤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이렇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진실로 진실로” 문구를 사용하셔서 지금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3절에서 하셨던 말씀을 조금만 바꿔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보다 조금 더 나아간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결국 둘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고,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차이는 “거듭나지 아니하면”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으로 바뀐 부분이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에 “거듭난다”는 말과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뜻이라고 봐야 한다. 즉, 거듭나는 것은 곧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언급한 것처럼 같은 방식의 출생이 거듭되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새로운 출생을 의미하셨다.

그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다. “성령으로 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셨다.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문제는 “물”이다. 어떤 사람은 물은 양수를 의미해서 육적인 출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물은 침례를 의미하기 때문에 구원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고 말씀하는 에베소서 5:26을 근거로 물은 곧 말씀(성경)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다 일리는 있는 주장이다. 육적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도 없다. 침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도 하다.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이 여기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여기 언급된 견해들은 지금 우리 입장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 니고데모가 알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0절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즉 구약에 능통한 학자로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셨다. 즉,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충분히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대한 말씀이 구약 어디에 있을까? 바로 에스겔 36장에 기록된 새언약의 약속에 대한 말씀에 있다.

겔 36:25–28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이 새언약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모든 죄에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물과 관련) 완전히 새로운 영,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진다. 아무리 주무르고 두드려도 변하지 않는 돌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마치 찰흙(클레이)과 같이 원하는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하는 성령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새언약이다.

이전의 죄에 대한 용서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 받고 나서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그 마음에 두셔서 온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드신다. 디도서 3:5이 정확히 이에 대한 말씀이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중생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다. 거듭난 자들은 죄에서 정결함을 받고 또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한다. 성경은 그렇게 다시 태어난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른다(고후 5:17).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기에 새롭게 창조된 자들인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탄생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누가 그렇게 하냐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누가 사람에게 새생명을 줄 수 있고 누가 사람을 창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답은 명백하다. 하나님이 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아주 극적으로 이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에스겔을 보내시고 물으셨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 37:3). 이제 막 죽어서 죽었는지 잠을 자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사람을 보고 물으신 것이 아니다. 이미 죽어 뼈까지 바짝 말라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그것이 다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없다. 절대로 죽은 뼈가 스스로 살아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이 와서 뼈를 잘 맞추고 최대한 사람과 비슷하게 모양을 만들어도 마찬가지다. 재주가 좋은 사람은 언듯보면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마른 뼈가 살아날 수는 없다. 하지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기에게 명하였을 때, 죽은 자들은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다. 이 환상의 의미를 하나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겔 37:13–14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살아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씀이지만, 구원 받는 사람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앞서 읽은 에스겔 36장에서도 사람을 정결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디도서 3:5에서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거기에 우리의 도움은 전혀 필요없다.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도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진술한 후에 “그러나!”라며 이렇게 말한다.

엡 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다. 여기 요한복음 3:6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다. 아무리 육적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결국 육일 뿐이다. 니고데모처럼 아무리 많은 성취를 이루어도 결국 그것은 육적인 성취일 뿐, 그의 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우리 죄 가운데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서 숨을 쉬고 있고 실제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에스겔의 환상에 나온 마른 뼈라는 얘기다. 니고데모가 했던 모든 종교적, 도덕적 행위는 그저 그 뼈들을 잘 맞추고 흙을 잘 빚어서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마른 뼈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좋지 않다. 실제로는 살아있지 않은데,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서 스스로 살아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다. 거듭남은 우리가 성취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시는 일인 것이다. 영으로 난 것이 영이다.

여기에 우리의 절망과 희망이 있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 내가 성취한 무엇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이 소식은 절망이다. 그동안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하기 때문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그는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리고 갈등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 떠돌이 랍비의 말을 듣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든지, 아니면 이 사람을 부정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던대로 살든지 선택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의 이 갈등은 우리 모두의 갈등이기도 하다. 삶을 얼마나 잘 살았든 상관없이, 내가 영적으로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교회의 집사이고, 심지어 장로에 목사여도, 내가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정확히 그런 위치에 있었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무엇 때문에, 혹은 내가 한 무엇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희망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유일한 희망이다. 내가 한 일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사람은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7절)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놀랐을 수 있다. 당황했을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절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하나님은 구약에서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느냐이기 때문이다. 만약 거듭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가 최종 결론이면, 우리 모두는 놀라고 절망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든, 결국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최종 결론이 아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그런 절망 가운데 두시지 않았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절)

중요한 것은 사람인 니고데모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하시느냐다. 예수님은 바람의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음을 분명하게 하셨다. 바람이 원하는대로 부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하신다. 바람은 보이지는 않아도 그 영향력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보이지 않아도 그 결과를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바람이 어떻게 불어오고 어떻게 불어가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실제로 누군가가 거듭나는 역사를 보면 이 말씀에 우리는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어설픈 전도자의 말을 듣고도 너무 쉽게 구원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몇 년을 체계적으로 복음을 공부해도 구원 받지 못하기도 한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서 누군가는 마음을 열고 구원을 받지는 누군가는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정말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끝까지 복음은 거절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 생각이 견고해서 절대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너무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왜 이렇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예측할 수도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 결론은 니고데모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이 맞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만큼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실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람을 다스릴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는 실패가 없다.

앞서 니고데모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질문을 가지고 왔던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했었다. 청년이 근심 가운데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24). 이 말에 제자들은 몹시 놀랐고, 그렇다면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지 않냐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하셨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이 무엇을 했느냐 혹은 할 수 있느냐가 구원에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으시고 또한 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니고데모는 자신을 보며 절망해야 했고 하나님을 보고 희망을 가져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얼마나 이루었든지 혹은 반대로 얼마나 이룬 것이 없든지 상관없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면 그만이다. 내가 거듭나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말씀은 사실 오랜 종교 생활을 한 사람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스스로 이룬 것이 많은 사람,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 받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깨끗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런 사람이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많고 교회 밖에도 많다. 

내가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스스로 질문해 보라. 나는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을 경험했는가. 나를 정결케 하고 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무슨 말씀을 듣고 뜨거운 감정이 올라오고, 그래서 눈물로 밤을 지샌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교회 잘 나가기로 마음 먹고 헌금도 잘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다 좋은 것들이지만, 그것이 거듭남의 경험은 아니다.

나의 공로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영적으로 나는 죽은 자이며 하나님 없이는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는 자임을 마음 속 깊이 인정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를 위해 살았고 항상 내가 중심이었던 내 마음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 원하고 하나님 중심의 마음으로 바뀌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사랑하기 원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고 싶으냐고 묻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라.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고백이다. 사람이 마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물로 정결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신 사람만이 진심으로 할 수 있는 고백이고, 이런 삶을 원하게 된다.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말 내가 거듭난 자인지 정직하게 점검해 보길 바란다. 만약 아직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겸손히 그 마음을 내려 놓고 기도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구제불능인 나의 삶에 개입해 주시기를 구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이루시고 나에게 거듭남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이제는 거듭난 자로서 살아가야 함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다.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길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순종할 수 있게 하신다.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삶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이 정말 거듭난 자가 원하는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