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 중 ‘오직 성경’과 ‘오직 그리스도’에 이어 ‘오직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직 은혜’는 간단히 말해서 죄인인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솔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직’이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비슷한 위치에 올려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에 무엇이 더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통로’로서의 성례 참여나 부족한 공로를 채워 면벌을 가능하게 하는 면벌부(면죄부) 판매 등 다양한 이슈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구원을 위해 인간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가 있어야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렇게 은혜와 공로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성경은 정확히 반대로 말합니다.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이거나 아니거나입니다. 은혜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이런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맞는다면 오직 은혜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행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직 은혜’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나 필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어야만 존재하거나 만족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만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요? 구원받기 전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 외에 우리 쪽에서의 어떤 공로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3장의 중반까지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이유를 밝히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롬 3:9-12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중립적인 죄인이 아닙니다. 죄도 범하지만 선도 행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극적인 죄인도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죄를 범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우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죄인’인 상태를 곧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고 말합니다(롬 5:10).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원수와 친구 외에도 수많은 관계가 가능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이고 반역자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은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입니다(엡 2:1). 생명이 없는 자의 특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우리에게 없고 그럴 의지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나, 인간 편에서 보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 짓습니다. 어떤 종교가 되었듯 공통적인 메시지는 ‘너희의 최선을 다하라. 그럼 뭔가 너희에게 좋은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할 수 없으니 내가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을 더할 필요도 없고 더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직 은혜’를 말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오직 은혜’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자격이 없는 자들임을 인정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호의를 은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100m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1등 한 사람에게 공책 세트를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공책 세트를 받은 학생이 그것에 대해서 크게 감사하며 어쩔 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정당하게 자신이 노력한 것의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1등 한 학생에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노트북을 주었다고 해봅시다. ‘뭐 대단한 것 했다고 이런 것까지 줄까?’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자신이 노력한 대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억 원하는 아파트를 주면 어떨까요? 믿기 힘든 상황이고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겠지만, 여전히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2등 한 학생이 아파트를 받았는데 1등 한 자신이 노트북을 받았다면 당장에 항의를 할 것입니다.

자격 있는 자에게 아무리 큰 호의가 주어져도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조금이라도 먼저 고려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정말로 자격이 없고 우리의 어떠함이 은혜를 받는 데 있어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내가 대단해서 은혜 받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오직 은혜’는 또한 은혜를 베푸는 것은 100%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나 ‘공의’를 좋아하는지, 때로는 은혜와 공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좋은 예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추수할 때가 되어 품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침부터 와서 일한 품꾼도 있었고 일이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와서 일한 품꾼도 있었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온 자들에게도 약속했던 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당연히’ 먼저 온 자들이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어떻게 더 수고한 우리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받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를 포함해서)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과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주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묻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눅 20:15)

은혜를 공정하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은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받는 사람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정은 받는 사람을 고려해서 그에 합당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둘은 그 영역이 다릅니다. 은혜는 베푸는 사람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아프리카에서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보고 제가 ‘어떻게 다른 아이들은 다 내버려 두고 한 아이만 입양할 수 있습니까? 은혜롭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베푸는 사람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오직 은혜’는 우리가 얻은 것이 가치 없는 것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가치를 지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가치 없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구원에 대해서도 조금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은혜로 구원을 준다니 손해 볼 건 없네’라는 생각으로 믿는다고도 말하고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그렇게 취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인 이유는 그것이 값어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싸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에게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이 우리가 은혜로 얻은 구원입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성경의 진리는 우리를 한없이 낮아지게 하고 한없이 감사하게 하고 한없이 찬양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은혜에 반응하고 계십니까? 한 찬송가 가사처럼 온 세상의 내 것이라도 이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은혜받은 자로서 더욱 은혜에 합당하게 생활하여 이 놀라운 은혜를 세상 가운데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게 선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